한국 공동주택의 위기와 변화
공동주택의 사회적 현실
공동주택은 서울에서는 이미 80%가 넘는 주택 유형으로 공동주택에서
살지 않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공동주택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주택에 대한 개념이나 이웃에 대한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한 건물에 살고 있지만 함께 사는 공동주택이라는 생각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옆집이지만 전혀 대면이 없거나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함께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개별 주택에서 원하는
프라이버시는 점점 강화되고, 함께 사는 공동주택에서의 공동체성은 우리 삶에서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한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가 지금처럼 이웃이 부재하는 방식으로 살 때 문제는 없는가? 문제가 없다면 우리는 이런 논의를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위아래집이나 옆집에 사는 사람들을 알지 못하고 밀실화된 집에 스스로를 격리시켜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나 심리적 버퍼가 사라지고, 물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서로 불편을 느끼거나
불신만 커진다. 층간소음이나 고독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런
문제들은 사회적 갈등을 야기시키고 서로를 불신하는 관계로 내몬다.
우리는 이런 방식의 삶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가? 언제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서서히 진행되어온, 지금은 고착화돼버린 공동주택의 형식이 가져온 결과인지도 모른다. 개인
프라이버시 우선주의와 1인 주거의 증가로 더욱 밀실화되고 있는 집은 우리 사회문제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주범일지도 모른다.
공동주택의 공동체성
지금 공동주택에서 공동체성을 말하는 것이 어쩌면 어색한 상황이다. 공동체성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실질적인 주민참여와 주민자치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공동체성의 가치는 급격한 사회 변동을 겪는 도시에서는 그 의미가 희미해지고 있다. 지역 기반의 ‘함께’라는
의식보다는 개별적, 개인적 활동으로서의 의미가 강해지다보니 공동체성에 대한 인식과 필요성이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전의 공동체 개념에서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공동체성의 개념을 만들고 싶다면, 서로에게 필요로 하는 환경을 공유할 수 있는 느슨한 공동체성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역 공동체성의 형성은 사회적 문제를 줄여나갈 수 있는데, 이는
주체성 있는 시민정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주민참여는 그것의 발현이다. 이것이
지역 경제나 상업 활동과 연결되면 지역을 바탕으로 한 공동주택에서의 공동체성이 더욱 탄탄하게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폐단과 기회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뤼스토우(Alexander Rüstow)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법칙에만 맡겨두면 사회는 반인간적으로 변하고, 사회적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산출하는 생명정치1로 신자유주의를
보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에 좌우되는 대중이 생겨날 것이며, 이들은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세력에 쉽게 포섭당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로 나타나고, 모든
낯선 것에 대해 타자를 배척하고 혐오하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에 살며 불안과
적대감에 휩싸여 있는지 모른다.
신자유주의에 익숙해진 우리는 항상 소비자의 자리에 속해 있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되어 있다. 그 때문에 사회변화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 아니라 변화에
대해 진정한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가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하고 가능한 것은 공동체 모델 그 자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우연적 사건’을
드러내는 비판적 실천이다. 우연적 사건이 지금 우리 인식의 토대에서는 배제되어 있을지 몰라도 공동주택에서
의사소통의 가장 보편적인 조건을 만들어준다.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때 소속의 융통성이 중요하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룹을 선택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물리적인 지역을 기반으로
다양한 그룹으로 형성된 풍부한 프로그램은 소속감에 대한 부담을 줄여준다. 여러 그룹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유연한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거기서 오는 편안함이 공동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공간에서도 열린 구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건물이나 각 집 일부에
물리적으로 공용공간을 열고, 지면과 저층부에서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공유공간을 만들어
개개인이 소외되지 않는 공동체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열린 구조의 공간은 파괴된 일상생활을
다시 만들어나가는 중심 공간 역할을 하고, 주변 환경과 함께 계획되면 지역 내에 작은 경제권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안정적인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지금까지 공동주택 공급에서 입주자를 수입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과의 관계는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입주자 위주의 생활방식이나 프로그램이 있다면, 또 그것이
물리적 감각과 잘 맞아떨어진다면 공동주택은 더 나아질 것이다. 프라이버시만을 중요시하는 집에서는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렵다.
공동주택연구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