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라운드, 공동 주거의 화신
에이라운드의 건축 하면 건축의 형상이나 스타일보다 어떤 친밀감이
먼저 떠오른다. 그것이 건축물이 풍기는 분위기인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주는 인상인지는 약간 혼란스럽지만, 왠지 모를 호감의 기운이 에이라운드의 건축 주위를 두르고 있다. 건축의
느낌이 친밀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새로 들어선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위화감이 없고, 위압적이지 않고, 왠지 아는
곳 같고, 언젠가부터 쭉 거기 있었던 것 같고, 편안히 머무를
만하고, 자꾸 말을 건네는 것 같고, 좀 더 지나면 팔짱을
낀 마냥 거리감이 사라지는, 그런 것 아닐까.
그런데 에이라운드의 건물에 발을 들이고 그 면면을 하나둘 유심히
들여다보면, 친밀감은 조금씩 놀라움(일종의 배신감)으로 바뀐다. 만만한 동네 친구일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꾸민 듯 안 꾸민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몹시 꾸민 주도면밀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친밀감의 정체는 겉에서부터 속까지 매우 사려 깊게(혹은 능수능란하게) 코디네이트된 건축의 자세다. 그것은 방문자를 맞는 면의 진입각, 공간의 크기와 배치, 재료 손질과 매무새, 빛과 어둠의 조합, 움직임을 관장하는 속도와 리듬 같은 것들이다. 그때부터 친밀감의 실체를 처음부터 다시 유심히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속셈을 다 간파할 능력이 내겐 없다. 감정이 그런 현상과 물성으로 다 환원되지도 않는다. 그저 거기에 감각과 경험을 열어 에이라운드의 건축을 즐길 따름이다.
은근한 친밀감에 연결되어 있는 에이라운드의 건축적 지향이 있는데, 바로 사회성과 공동체성이다. 그에 따라 작업의 카테고리도 자연스럽게
공동주택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설계 과정에서 ‘심리적 경계’를 중요한 이론으로 삼는다. 에이라운드는 2012년 무렵 서교동에 완성한 작은 다세대주택(나무282)의 성공적 분양과 긍정적 피드백에 힘입어 일찌감치 도심의 소규모 공동주택 작업에 발을 들였고, 연이어 동숭동에 꽤 사양이 높은 다세대주택(조은사랑채)을 완공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동주택 영역을 파고들었다. 공동주택은 에이라운드의
포트폴리오 중 몇 칸이 아니라 사무소의 전력을 쏟는 일이 되었고, 최근에는 기획부터 운영 계획, 입주민 구성, 지역 맞춤 프로그램까지 아우르며 ‘써드플레이스’라는 이름의 사업 모델로까지 발전시켰다.
서교동과 망원동 경계에 있는 나무282가 에이라운드를 다세대 주택의 세계로 인도한 운명적 프로젝트다. 첫
방문 때 집의 전체적인 인상은 한마디로 ‘알뜰함’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몹시 신경 썼음이 분명해 보이는
듬직한 공동 출입문, 은은한 채광이 되는 작지만 아늑한 복도, 없는
공간을 야금야금 모아 간신히 만든 공용 발코니와 전실, 그 앞에 보관되어 있는 소소한 물건들(자전거, 화분, 우산)이다.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구석구석 공용공간을 최소한의 크기로
확보해낸 데에 건축가는 뿌듯해했고, 실제로도 제 용도대로 잘 쓰이고 있는 모습을 본 나도 괜히 같이
뿌듯해했다. (나는 이 답사를 계기로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잘 쓰이는 건물’이라는
답을 자신 있게 추가했다.) 나무282는 각 세대 공간의
양을 최대화하는 방식보다 공용공간(공동공간)의 질을 높이는
것이 냉혹한 주택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고, 에이라운드는 이때부터 공용공간의 가능성에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혜화역 역세권 동숭동에 지어진 조은사랑채는 공동주택에 투신하는
에이라운드의 결의를 담은 출사표였다. 전작 나무282가 알뜰살뜰
꾸린 집이라면, 조은사랑채는 다채로운 공용공간과 사이 공간이 주는 공간의 풍요로움이 가득했다. 골목 쪽으로 트인 널찍한 복도 같지 않은 복도, 그와 나란히 오르내리는
새하얀 계단실, 넉넉한 환기와 채광이 되는 지하 같지 않은 지하 주차장, 집 뒤편 언덕을 열어주는 깊고 높은 보이드 공간 등. (나는 5분 만에 그곳에 너무 마음에 들었고, 입주해서 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집값을 알기 전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모든 집이
뒤편 언덕 풍경을 누릴 수 있게 설계되었고, 맨 위층 집은 실내에 투명한 중정까지 놓아 그 집이 펜트하우스임을
말해주었다. 공동주택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약점들을 세대별 특색으로 녹여낸 것도 눈에 띄었다. 집마다 문에는 가죽 공예로 감싼 손잡이가 달려 있고, 은은한 간접
조명과 심플한 문패가 하나의 조각처럼 그 앞에 세워져 있었다. 나무282에서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주 출입구는 맞춤 제작한 물품보관함과 천창의 환한 채광이 하나로 합쳐져 여유롭고 세심한 서비스 공간으로 진화했다. 이 모든 감성적/감각적 구성 요소들이 모여 일찍이 다른 데서는 만난
적 없는 에이라운드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때가 2014년이다.
전농동의 유일주택은 지금 와서 돌아보면 에이라운드의 써드플레이스
프로젝트의 파일럿 프로젝트였다. 유일주택은 실제 건물을 가보지 못했는데도 이미 여러 번 다녀온 착각이
드는데, 그 집이 이름을 얻기 전부터 나는 그 집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가로부터 주입식 선행 교육을 받은 것이다.) 처음 호칭은 ‘고대 근처 목욕탕집’이었다. 이름
없던 프로젝트가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뜻밖에도 도쿄 도심의 한 갤러리였다. (이 일은 작고 단순한
전시였지만 거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한 경험과 추억을 남긴 사건이기도 하다. 이때의 인연과
에너지 덕분인지 에이라운드는 전시 때 가깝게 교류했던 일본 건축가 유리 나루세와 녹사평역 리모델링을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도쿄에서 한국 건축가 3인전으로 열린 《금》(2016, 프리즈믹 갤러리)을 시작으로, 이듬해(유일주택이라는 이름을 달고)
《넥스토피아》(2017, 온그라운드 갤러리), 그
이듬해 한일 건축가 교류전 형식으로 꾸린 《금》(2018, 온그라운드 갤러리)을 통해 연이어 소개되었다. 이 세 번의 전시는 새로운 공동주택에
대한 에이라운드의 철학과 의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이 과정에서 에이라운드가 흡수한 ‘심리적 경계’(앞선 전시 제목 ‘금’도 경계선의 뜻이다)라는 개념은 이후 작업들에 적극적으로 적용되면서
건축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또한 건축의 사회적 역할, 특히
서울 같은 초대형(초익명) 도시에 맞는 공동체적 주거가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다세대·다가구 주택이 요즘 젊은 건축가의 주 활동 영역으로 자리 잡았지만, 여기에 주력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EMA, 서가, 요앞, 소수 정도가 떠오른다.) 건축계에는
사회적 소임이나 공동체성 회복에 관한 말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많이 쏟아지지만, 그것을 건축설계라는
직업 전문성 레벨에서 피상적으로 소화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실질적인 구현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에이라운드가 특별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은 공동주택이라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공동체라는 영혼을 불어넣으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에이라운드는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믿는, 건축이 공동체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이어가고 있는, 우리 건축계에 흔치 않은 존재다.
한국성
한국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건축계 내에서 자주 회자되는 단어임에도 누구도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하기 어렵고, 피하고 싶지만 항상 우리에게 질문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로서는
‘이건 한국성이야’라고 규정할 수 있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든 한국성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다양한 관점의 한국성을 모았을 때 ‘대략 이런 것들이 한국성으로
읽힌다’고 정의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왜냐하면 다양한 생각과
문화가 합쳐져서 한국성을 이루는 것이지, 순수한 결정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것을 같이 논의할 수 있는 그룹이 적고, 결과도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몇몇 사람이 말하는 한국성은 그 사람의 생각일 뿐, 그것이 대표성을 띨 수는 없다. 이런 문제의식이 어쩌면 한국에서
건축을 하는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성도 결국 아이덴티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DNA는 타자인 유럽이나 미국, 인도네시아 건축가와 다르다. 그 차이를 찾다 보면 자연히 한국성에
대한 부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 지역 건축가 인터뷰를 해보니 각자의 국가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드러내는지 형식과 방법이 각 나라마다 다르다. 일본은 일본성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면서 이야기하는 젊은 건축가가 거의 없다. 그들이 작업을 하면 서구에서는 일본적인 것, 일본의 성격을 대변하는
결과물로 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오랜 기간 이어온 깊이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만들어진 덕택이다. 그래서 일본 건축가들은 하고 싶은 걸 하기만 하면 일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아도 일본성을 의식한 적 없고,
그런 질문이 이상하다고 반문할 정도다. 반면, 동남아시아
건축가는 각자 자기 지역의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는 결과물을 만들고 있고, 전통의 현대화에 관심이 많다. 전통으로부터 자신들만의 특징을 더욱 끌어내어 유럽이나 다른 문화 강대 국가의 건축가와 대별될 수 있는 장점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중간하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한국성, 한국적 건축에 대한 부분을 의식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만들어 둔 토대가 없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건축가들이 노력하는 그런 유의 접근법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그런 준비가 미흡하다는 반성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성을 대변하고 싶진 않다. 전통을
어느 시점으로부터 끌고 올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 차라리 우리가 처한 현실과 싸우면서 드러나는 결과물이
한국성을 대표하거나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의 물결을 타고 넘어가는 생존 게임의 결과로 한국성을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의지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 의해 드러나는 처절함이다. 그러한
연유로 세련된 한국성을 표현하는 결과에 이르고 싶진 않다. ‘그 결과가 좋은 것인가?’라는 의문이 따르기 때문이다. 최근 포스트 모던의 형식을 띄어서 여러 내용으로 한국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결과가 한국성의 대표로 내세울만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또는 내가 생각하는 한국성을 표현할 수 있는 근거와 그걸로 이야기할 수 있는 단어들이 아직까지 없는 것 같다. 아니, 있긴 있는데, 그들을
한 단어 아래 모으는 비평의 작업이 필요한 상황이다.
안팎의 공공성
사회 인식에 대한 자각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일본의
경우 1980년대 버블 경제 당시를 돌이켜보면 일반인들에게 건축가는 ‘이상한
건물을 디자인하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건물을 설계하면 주목받지
못하니 어떻게든 튀는 건물을 지어야 했다. 그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는 건축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건축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난민을 위한 셸터 디자인을 이야기하며
공적 역할을 해냈다. 그러면서 시민들이 건축가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함께 겪고 나서 일본 사회에서 ‘이웃, 연대, 관계’가 강해졌다. 국내에서는 세월호 사고 당시 ‘우리 사회에 속한 전문가로서 이러한
대형 사고를 외면하는 게 맞는가’라는 사회적 물음에 조성룡 선생이 나서서 배 모형을 제작함으로써 사회
문제를 공론장으로 이끌어냈던 예를 떠올릴 수 있다.
획일 지향의 공모 제도
얼마 전에 끝난 창원시립미술관 설계공모 지침서의 ‘일반 설계공모의
배점기준 및 평가항목’을 보면 ‘공공건축물의 유형을 탈피한
새로운 디자인’이라는 기준이 명시됐다. 그 문구를 보고 기뻤고, 한편으로는 ‘요즘 설계공모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입상작을 보니 재료, 형태, 프로그램 방식 등이 비슷비슷했다. 공모를 통해 지어진 미술관이 지역을 막론하고 유사한 안으로 설계된다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작가성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거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해서 안을 내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공모의
투명성이다. 여전히 투명하지 않다. 조달청을 통한 공모는
정보가 완전히 공개되지만, 개별 부처에서 나오는 공모는 그렇지 않다.
모든 공모 심사가 투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안이 나올 가능성은 낮아진다. 한편으로는 당선될 가능성이 높은 방향으로만 설계를 풀다 보니 결과물이 획일화될 수 밖에 없다. 또 공모 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일부 공모의 심사 과정을
유튜브로 생중계했는데, 이런 방법이 모든 공모 심사에 도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누가 얼마나 보든 공개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사하는 사람들이 의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의 자질도 검증해야 한다. 그런 절차 없이 주최측 내부 리스트에서
고르면 출품 건축가보다 심사위원회 수준이 떨어지기도 한다. 각 공모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되는 사람이 그
공모에 관해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심사를 할 준비가 돼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면 스스로 공모 내용을 충분히 숙지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공모의 운영위원회는 이 프로젝트가 공모로 나와야 하는 이유, 주제, 방향, 과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프로젝트에 따라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거나 전례없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끌어내는 등 그 공모에서 필요로 하는 바를 명확하게 만들고, 요강을 정확하게 작성해야 한다. 심사위원은 그에 의거해 심사하게끔
해야 한다. 지금은 공모 요강 만드는 사람, 기획하는 사람, 심사하는 사람 등이 제각각 나뉘어 있다. 그러니까 공모의 질을 높일
수가 없다.
이외에도 여러 문제가 있다. 조달청의 존재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새로운 재료나 디테일을 쓰거나 기술적인 실험을 하려고 하면 조달청에서 제동을 건다. 또한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최저가
입찰은 사라져야 되고, 설계자가 직접 공사 감리를 해야한다. 이처럼
공모에 대한 여러 문제가 개선되지 않으면 좋은 안이 나오기도 어렵고, 좋은 안이 나와도 실제 건축물은
산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행정적 틀을 더 잘 갖추고, 건축공간연구원
같은 연구기관에서 정책 보고서를 만들고, 이를 법제화해 공모가 진행되어야 한다.
리모델링 시대
건물의 수명
이미 여러 나라에서 인구가 줄기 시작했고, 감소 속도가 빨라졌다. 이는 지금 지어지는 건물을 쓸 사람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일본도 1970~80년대에 소방서, 경찰서와 같은 관공서를 많이 지었는데
다수가 통폐합되었고, 빈 건물은 흉물로 남아 슬럼화 됐다. 그래서
바바 마사타카(도쿄R부동산)
같은 사람이 등장해 공간이 필요한 사람에게 빈 관공서 건물을 렌탈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공공건축물을 새로 짓고 있다. 건축가들은 당장 일이
많아서 좋을지 모르겠지만, 20년, 빠르면 10년 내에 큰 부담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급격히 축소되고 있는 국내
지방 도시에 체육관을 짓는다면 조만간 관리 비용만 축내는 애물단지가 될 것이 뻔하다. 이제라도 건물을
기획할 때, 공모 준비 단계부터 장기적인 활용 방안을 마련하고 설계한다면 건물의 수명을 훨씬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면적의 다변화
민간 영역에서는 다른 각도로 접근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즘 1인 세대수가 급격하게 늘고 2~3인 세대는 줄어서 2~3인 주거의 평면을 나누는 작업을 많이 한다. 이를 법제화해서
허용하는 것처럼, 1인 세대를 위한 작은 집들이 지나치게 많아진 상태에서 다른 수요가 발생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인 거주 면적 기준을 25~30m2로
잡을 때, 일반적인 저층형 집합주택은 대지 면적에 따라 한 층에 두 집 아니면 세 집이 살 수 있다. 우리는 같은 층에 위치한 여러 세대를 합칠 경우를 상정해 세대 간의 벽을 털어낼 수 있는 유닛을 개발했고, 설계에 반영하고 있다. 공동주택에서는 법적 제약이 있어 적용하기
쉽지 않다. 당장은 여러 한계가 있더라도, 공공 영역에서만큼은
인구 변화를 고려한 대안을 설계안에 반영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해야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곧
닥칠 미래이기 때문이다.
설계 교육
건축학과에서 신축 설계 교육만을 계속해야 할까? 홍콩이나 대만처럼
땅이 비좁은 나라는 신축 기회가 드물다. 그러다 보니까 건축을 공부한 졸업생들이 대부분 인테리어나 리노베이션
분야로 간다. 국내 건축학과는 리노베이션 관련 설계 수업을 대체로 한 학기 정도 개설하는 것으로 안다. 앞으로는 빈 집, 빈 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는 교육의 비중을 더 높여야
할 것이다.
오래된 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면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소방, 전기, 설비, 구조 등을 어떻게 계획에 포함해야 하는지도 배워야 하고, 프로그램 전용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학교로 쓰이던 건물을 병원으로
바꿔본다든지, 기존 병원 건물에 절반만 다른 프로그램을 도입한다면 병원과 어떤 프로그램이 만났을 때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같이 이야기해 보는 등 기획에 관련된 훈련이 필요하다. 환경 문제와
관련해서도 기존에 있던 건물들을 어떻게 다시 재활용하고 업사이클링 할 것인지 고민하는 수업이 많아지고 관심이 더 커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건축가는 여전히 할 일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파트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