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박성용
Part-1 서론
본 소고는 현대건축 비평에 있어 거주와 재현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지금까지 거주의 문제는 르코르뷔지에의 ‘주거는 살기 위한 기계’에 대한 피상적 이해에 의해 즉물적 기능주의로 등한시되어 왔다. 또한, 재현의 문제는 근대건축의 추상공간에 대한 선호 이후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외’가 현대사회의 본질로 주목받게 됨에 따라, 거주가 기능주의 이상의 문제라는 사실이 자각되고 있으며, 현대가 어느 시대 못지않게 이미지를 중시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재현의 중요성 또한 재조명되어야 할 상황이다.
주지하다시피 과거 강력했던 건축의 재현기능은, 현재 극단적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사물은, 사회 내에 존재함과 동시에 모종의 메시지를 발산할 수밖에 없고, 의미를 창출하는 어떤 체계에 참여한다. 따라서 건축 또한, 현대문화의 다른 분과들과 마찬가지로, 재현의 문제를 등한시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재현의 대상과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현대건축의 수준과 역할을 결정하는 중요 주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건축, 특히 주거건축은 무엇을 재현해야 하는가? 물론 정답을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소외라는 병리학적 사회현상을 보았을 때 사적 삶과 공적 삶 사이의 모순은 풀기 힘든 딜레마인 동시에 현대 사회의 본질 중 하나로 보인다. 주거건축은 두 삶 사이의 모순이 가장 첨예한 건축유형이라는 점에서 본 소고에 적합한 고찰 대상이다. 또한 재현의 문제는 하이데거의 ‘거주’ 개념과도 관련된다. 그의 거주개념은 세계 내 근본 4-요소(신성, 하늘, 땅, 인간)들과의 관계 맺기인데, 재현 또한 관계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 및 문화적 맥락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논하기 위해 본 소고는, 먼저 공간과 재현의 관계를 통해 거주개념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재현의 문제를 현대사회와 건축의 측면에서 논한 후, 주택 프로젝트 사례(에이라운드-박창현 소장, 제주 서호동 주택)를 통해 유의미한 하나의 건축적 방식을 보여주고자 한다.
공간 VS 재현
근대건축 역사의 한 경향은, 과거의 양식과 표현을 무(無)로 환원시켜 건축을 점점 추상화하는 과정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건축의 핵심 가치로 ‘공간’이 제시된 것은, 건축 표현의 근대적 추상성과 공간의 추상성이 잘 맞아 떨어진 결과다. 전통적 재현 대상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무언가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빈 공간’은 추상적이고 반(Anti)-재현적인 재현의 대상으로서 최적의 개념인 것이다.
프램프톤에 따르면, 근대건축을 공간으로 이해하고자 한 시도는, 슈마르조의 「The Essence of Architectural Creation」에서 시작되었다. 근대건축은 슈마르조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는데, 기드온의 「Space, Time and Architecture」 등에 의해 근대건축의 볼륨이 전통건축의 매스와 구분됨에 따라 건축의 중심주제는 공간으로 넘어왔다. 이후 건축의 모든 구성적 형태들은 (내부)공간과 (외부)형태의 통합이라는 주제로 수렴되었다. 이로서 건축은 자기 자신(즉 내부공간)을 표현하는 것으로 내면화됐다. 프램프톤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을 통해 이후의 건축역사는 공간이라는 단일 가치로 수렴됐다.
공간에 의한 역사의 단일화 과정에 저항하기 위해 프램프톤이 주목한 것은, 건축물의 제작방법(poesis)인 ‘건설’이다. 여기에서 그가 이야기한 건설은 오직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건설은 일종의 재현(representation)의 측면을 가지는데, 건축물이란 제작된 사물로서 제작 그 자체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용도를 반영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건축물의 용도와 거주인의 경험과 삶은 사회적 맥락 안에 위치하기 때문에, 건축물의 재현 또한 사회적 맥락에 속할 수밖에 없다. 건축 재현이 사회적이라는 것은 추상적 근대건축과 달리 실제적이라는 의미다. 프램프톤은 건설과 재현의 포괄적 관계를 “텍토닉 문화”라고 표현한다.
프램프톤은 텍토닉(tectonic)의 어원을 설명하며 건축 재현이 일종의 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텍토닉의 그리스 어원인 텍톤(tekton)은 제작자(capenter) 혹은 건설자(builder)를 의미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poesis) 또한 제작을 통한 작가의 감성표현을 의미한다. 텍토닉은 두 의미를 동시에 가지며, ‘조립의 예술’(the art of joinings)을 의미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텍토닉 개념을, 디테일의 구성측면을 넘어, 프램프톤이 이야기하는 문화 개념으로 과감히 연장할 수 있다면, 조립의 대상은 건설 요소들 너머로 확장된다. 따라서 ‘조립의 예술’은 문화적 측면에서 생활환경의 구축이라는 일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확장된 의미에서 텍토닉 관계에 의해 재현된 건축은, 하나의 포괄적 문화에 속하며 예술 혹은 시적 수단을 통해 사회의 통합적 관계를 표현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거주’의 문제를 다루며 제기한 ‘세계 내 4-요소’의 관계 맺기와도 유사한 개념이다. 하이데거의 4-요소는 젬퍼의 텍토닉 4-요소와 쉽게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텍토닉 개념과 ‘거주’ 개념의 친연성은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텍토닉 문화는 관계 맺기 혹은 관계 ‘조립’을 통한 의미의 시적 상징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는, 인간(필멸자)의 존재 방식이자 세계 내 ‘거주’ 방식이다. 물론, 이미 너무나 도시화된 현대 문명사회에서 우리가 관계 맺어야 할 대상들이 반드시 하이데거의 4-요소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현대사회에 ‘거주’하기 위해 즉 상징적 재현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맺어야 할 ‘관계들’을 새로이 드러내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근대건축의 공간에 대한 선호를 개시했던 슈마르조의 공간이론 또한 그 안의 거주자와의 관계를 가장 주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가 건축의 원초적 본질로 생각한 공간은 거주자의 확장으로서 그를 감싸는 한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그에게 “공간 구축은 인간 현존의 발산”이며, 그 현존이 투사(projection)된 결과다. 이는 그 현존의 재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인간 현존은, 구체적인 한 명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이상화 된 주체’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어떤 개념, 단체, 종교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건축은, 피상적 근대건축과 달리 완전한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 혹은 주체와 지적 감각적으로 교류하는 공간이며, 그는 이를 ‘직관된 공간(intuited space)’이라 부른다.
공간 VS 재현 : 현재 상황
건축 재현에 대한 오해와 건축과 도시환경의 현재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근대건축에서 표현과 장식을 죄악시한 경향이 본격적으로 표면화 된 것은,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범죄」에서 부터다. 이후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등 근대 대가들의 건축이 “백색 건축”과 “유리 건축”으로 “세속화” 되는 과정에서 시적 가치를 잃었으며, 현대건축은 무언(無言)의 건축이 돼야 한다는 오해가 하나의 사실로 굳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와 달리, 아돌프 로스가 「장식과 범죄」에서 죄악시한 ‘장식’은, 과거 특정양식에 대한 분별없는 모방을 의미한 것일 뿐이다. 건축과 공예(Craft)에 대한 로스의 진정한 이해는, 오히려 프램프톤이 말하는 텍토닉 특성과 일정 부분 유사하다. 그는 19세기 후반의 건축과 공예품들에 대해 논평하며 재료, 목적성, 유용성 등에 따른 올바른 제작과 그에 대한 표현을 옹호했다. 마찬가지로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또한 건축을 무언의 사물로 보기보다 하나의 시적 대상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모든 재현적 기능이 무화되는 즉물적 기능주의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으며, 건축과 공간을 통해 시대정신을 재현하는 것을 건축의 핵심 과업으로 이해했다. 그들에게는 공간 또한 하나의 재현적 기능을 가지고 있던 셈이다. 이렇듯 건축에서의 재현과 표현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자,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시금 건축의 역사적 어휘들과 소비주의 문화를 건축의 재현수단으로 포섭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단은 재현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제작과 건축의 공간 구축형식을 표현과 극단적으로 분리시켰고, 결과적으로 피상적 근대주의의 ‘이면’(antithese) 역할 이상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오해에 의해 건축에서 재현적 기능이 제거됨에 따라, 그에 대한 보상 혹은 반동으로 무의미한 시각적 유희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에 따라, 과잉된 형태와 무미건조한 공간들이 현대 도시를 점령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 건축계에서도 뚜렷이 발견된다. 최근 건축 잡지에 등장하는 건축물의 형태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고 새로운 인상을 주지만, 그것들의 형태 조작과 내부공간 구성 사이의 관계는 매우 빈약하다. 건물의 역동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내부공간은 밋밋하기 그지없다. 기드온이 옹호한 근대건축이 내부공간의 반영을 목표하며 주변과 분리되어 오브제가 되었다면, 현재 국내 건축은 내부공간, 기능, 구조, 형태 등 건축 구성요소들의 관계에서 조차 분리된 셈이다. 현대가 파편화된 사회라면, 어떤 의미에서 건축보다 더 파편화 된 대상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내부적 관계조차 구축하지 못하는 이러한 건물들은 그 화려함과는 반대로 외부 대상에 대해 어떠한 재현이나 소통기능도 담지하지 못하는데, 기껏해야 설계자의 부풀려진 자아만 불편하게 과시할 뿐이다. 도시가 이러한 건축물들로 가득 참에 따라, 사람들과 건축과의 시적 관계는 사라져 버렸으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도시 내 ‘거주’하지 못하고 이방인이 되었다.
현대에서 재현의 문제
현대에서 재현의 문제는 비단 건축만의 주제는 아니다. 18세기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군중이 형성되고, 개인과 군중 사이의 관계가 익명성에 근거하게 됨에 따라, 개인은 더 이상 전체를 반영하거나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전통의 붕괴와 자유의 획득 과정이기도 하다. 19세기의 근대인들은 그러한 익명성에 대해 절망했지만, 현대인들은 서서히 적응했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익명성에 기반을 둔 개인의 자유는 현대인에게 세속적 혹은 정치적 측면에서 긍정적인 가치로 여겨졌고, 현대 도시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익명성을 재현의 문제로 고찰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익명성과 재현가능성은 정의상 모순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현대사회의 익명성에 따르면, 각 개인은 자기 자신 말고 그 무엇도 대변 혹은 재현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재현)으로도 충분하다면 현대인은 왜 끊임없이 변해버리고 말 유행에 편승해서 무언가 공동체에 소속되려 노력하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현대인은 익명성이 부여한 세속적 자유를 포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만 만족한 채 재현의 문제를 모른 채하고 살아 갈수도 없어 보인다. 이러한 세속적 삶과 정서적 삶의 분리는, 현대인들 특히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자들에게 ‘정동적 불만’을 야기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불만은 정치와 경제라는 수단으로 위장되어 표출되지만, 그 분리가 현대의 속성이라면 정치와 경제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조금 부연하면, 정동적 불만을 정치적 불만으로 위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익명성의) 자유와 (전체적) 평등 사이에 극단적 선택을 강요하며 둘 사이의 모순적 공존을 참지 못한다. 하지만 분리된 둘 사이의 화해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소망일 지도 모른다. 더구나, 화해에 대한 소망은 차치하고 진짜 문제는, 익명성의 세속적 자유와 공동체의 시적 재현은 각각 분리된 채로도 여전히 둘 다 유효한 가치라는 점이다. 그들의 소망과 달리 이 세상은 두 가치 모두에게 실제적인 삶의 장을 부여한다. 따라서 둘 중 하나가 사라진다고 그들이 원했던 이상향이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기만 한다.
18-19세기, 과학과 사고방식의 급격한 변화 또한 진리와 재현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칸트가 진리로서 형식을 부여한 공간과 시간의 절대성을 무너뜨림에 따라, 고정된 진리에 대한 재현의 문제는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이후 20세기 과학과 철학에서 진리의 중심과 고정된 형식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끊임없는 실험과 비판(의심)이다. 이러한 경향을 지지하는 형이상학의 현대적 시작은 니체와 베르그손이다. 그들이 주장한 생의 철학은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변화와 생성을 절대화했다. 변화의 실체인 ‘운동’은 재현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운동’은 과거의 고정된 진리보다 더욱 초월적인 것이 되었는데, 과거의 진리는 적어도 우리와 (재현을 통해) 소통하길 원했으나, ‘운동’은 더 이상 소통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계승한 들뢰즈는 ‘초월적 경험론’을 이야기하는데, 이제 진정한 ‘운동’은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초월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리가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재현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고 믿어지는 현대에서, 그렇다면, 재현의 문제는 덧없는 것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예술은 그러한 덧없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입체주의를 간략히 살펴보자. 입체주의가 현대 예술에 미친 영향을 개괄하기 위해서는 몇몇 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예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세잔으로부터 영향 받은 입체주의(Cubism), 반 고흐의 표현주의(Expressionism), 고갱의 원시주의(Primitivism)를 20세기 현대예술을 촉발한 주요 계기로 파악한다. 이중 당시의 시대정신과 현대적 공간개념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창시한 입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술사학자 닐 콕스(Neil Cox)는 “입체주의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게 발전한 유일한 사조”라고 평가했으며, 기디온은 “르네상스 이후 최초로... ...새로운 공간 지각 방법에... ...완전한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입체주의를 통해서”라고 평가했다.
현대사회의 속성과 재현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는 입체주의와 20세기 초 현대사상들과의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이중 앙리 푸앙카레의 ‘규약주의’ (Conventionalism)의 영향은 특히 중요하다. 푸앙카레는 물리학, 기하학, 수학개념 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완벽한 포착이 불가능한 진리를 그것에 대한 근사치일 뿐인 우리의 가설적 수단과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불변하는 진리인 ‘자연 현상’은, 우리의 ‘과학 현상’으로는 결코 완벽히 표현할 수 없다. 수학적 미분은 완벽한 ‘연속’인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 현상’의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공간과 관련해서 부연하면 그는, 공간을 설명하는 학문인 기하학 또한 하나의 가설 혹은 규약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기하학이란 그 본성상 모든 것을 고체로 해석하지만, 기하학이 설명하고자 하는 공간은 결코 고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기하학은 본성상 근사치의 학문이다. 어떠한 기하학도 공간의 형식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완벽히 틀린 것도 아니다. 기하학의 개념 자체가 이미 공간형식에 종속된 하위 개념이기 때문에, 공간의 형식을 어떻게 가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식의 기하학이 가능하다. 따라서 당시 등장한 다양한 비유클리드 기하학들과 유클리드 기하학 사이에도 절대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규약적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사용하는 이유는, 일상생활의 속도와 규모 차원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공간형식을 평평하게 가정했을 때 가장 편리한 기하학 체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즉, ‘과학현상’은 ‘자연현상’에 대한 일종의 규약일 뿐이며, 둘 사이의 간극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과학현상’은, 근사치에 불과한 덧없는 것일지라도, 일관된 규약체계를 형성함으로써 여전히 ‘유의미’하게 통용된다. 이러한 그의 규약주의는, 진리와 재현의 관계 사이에서 포착할 수 없는 진리보다 우리의 인식체계에 직접 호소하는 재현의 규약체계가 현실적으로 더 ‘의미 있는’ 것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생각의 켜를 따르면, 예술을 통해 진리를 표현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그것이 진리 혹은 모종의 현상을 재현한다고 ‘규약’적으로 통용된다는 점에서 이미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 ‘규약’이란 단어를 예술적 색채를 띠는 용어로 대체하면, ‘상징’이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에서 건축은 무엇을 재현 혹은 상징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목록이 있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소외현상과 개인과 전체의 현대적 모순, 즉 개인과 군중의 문제, 익명성과 재현의 문제 등은 분명 상위 목록에 들어갈 것이다. 더욱이 주거건축은 익명성을 획득한 근대적 개인을 상징하는 대표 건물 유형이라는 점에서 상기한 문제들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근대건축이 본격적으로 개화한 20세기 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의 건축철학을 대변하는 건물들이 모두 주택이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들 모두는 새롭게 대두된 근대적 개인의 삶을 건축을 통해 재현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국내 주택작품 사례를 통해 개인과 전체의 현대적 모순을 다루는 재현적, 규약적 방식에 대해 살펴보자.
Part-2 제주도 서호동 주택
들어가는 길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서호동 주택은, 서울 이방인을 위해 지어졌다. 이방인의 주택은 태생적으로 두 개의 질문 사이에서 고민한다. 주변과 섞일 것인가? 아니면 홀로 설 것인가? 일견하기에 서호동 주택은 주변과 섞이길 선택한 듯하다. 주변과 자연스럽게 섞이기 위해 기존 지형의 흐름을 보존하고 건물을 띄워 지웠는데, 보통 제주 구릉지 집들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자리 잡는 것과는 차별되는 방식이다. 최근 신도시 주택들이 담을 쌓지 않는 대신 사적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지층공간을 폐쇄적으로 계획하는 것과 달리, 서호동 주택은 최소한의 요소들을 제외하곤 통으로 비웠다. 비워진 지층부분으로 제주의 구릉 지형과 바닷바람 뿐 아니라 주민들도 자유롭게 왕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건축가 박창현 소장(에이라운드)의 설계 개요 또한 주변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기를 원했다고 밝힌다. 호쾌하게 비워진 지층부분을 보고 있노라면, 소통과 관계를 원했던 설계자의 의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오브제와 전체
단순한 형태의 건물매스는 르코르뷔지에의 사보아 주택처럼 공중에 들어 올려져있다. 들어 올려진 매스는, 일견 근대건축의 오브제처럼 건물의 존재감을 강하게 주장한다. 더욱이 진입도로의 경사가 주택에 다가가며 상승하기 때문에 공중 오브제의 존재감이 한 층 강조된다. 지층이 비워지고, 옥상에는 작은 박스들이 올려진 형태가 사보아 주택의 3단 구성을 닮았다. 역시나 사보아 주택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층은 공공에게 할애하고, 옥상은 사적 정원으로 활용한다. 지층과 달리 옥상정원은 관계로부터는 고립되어 있으나 개인이 최대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사적 파라다이스다. 지상을 공공에 내어주었으니, 공중의 자유는 침해하지 말라는 자세다.
추상적 미로공간
서호동 주택의 외부재료가 물성을 강조한다면, 내부공간에서는 추상성과 미니멀한 처리가 강조된다. 재료의 추상성은 거주자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아 익명적이다. 재료의 사용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벽체와 천장은 백색의 이음새 없는 면으로 마감되었으며, 바닥의 나무마루도 최대한 이음새를 드러내지 않아 하나의 면으로 읽히고자 노력했다. 실내 가구들 또한 최대한 마루와 물성을 맞춰 존재감을 최소화 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실내 문들도 벽체와 물성을 맞추고 존재감을 최소화 했다. 재료와 디테일이 가지는 추상성은 현대적 거주인의 익명성을 대변하는 듯하다.
들어가는 길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서호동 주택은, 서울 이방인을 위해 지어졌다. 이방인의 주택은 태생적으로 두 개의 질문 사이에서 고민한다. 주변과 섞일 것인가? 아니면 홀로 설 것인가? 일견하기에 서호동 주택은 주변과 섞이길 선택한 듯하다. 주변과 자연스럽게 섞이기 위해 기존 지형의 흐름을 보존하고 건물을 띄워 지웠는데, 보통 제주 구릉지 집들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자리 잡는 것과는 차별되는 방식이다. 최근 신도시 주택들이 담을 쌓지 않는 대신 사적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지층공간을 폐쇄적으로 계획하는 것과 달리, 서호동 주택은 최소한의 요소들을 제외하곤 통으로 비웠다. 비워진 지층부분으로 제주의 구릉 지형과 바닷바람 뿐 아니라 주민들도 자유롭게 왕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건축가 박창현 소장(에이라운드)의 설계 개요 또한 주변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기를 원했다고 밝힌다. 호쾌하게 비워진 지층부분을 보고 있노라면, 소통과 관계를 원했던 설계자의 의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 번 더 눈여겨보면, 주택의 지층부분에는 관계 맺기와 반대인 내밀함의 정동도 느껴진다. 주변으로의 열림이 건축가의 의식이라면, 내밀함은 무의식적 속내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낯선 환경에서 이방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방어심리의 표출일수도 있겠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주거의 진입현관은 외부로부터 수줍게 숨은 듯 대지 안쪽 깊숙이 들어와서야 나타난다. 너무 높지 않은 지층 천정고도 내밀감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바닥마감은 진입로와 주차공간을 제외하곤 모두 흙과 조경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땅은 사람의 장소는 아니며, 자연과 인공 중간쯤에 머문다. 바람길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했지만, 사람의 왕래에 대해서는 명확히 길을 따로 둔 셈이다. 하지만, 동선에 다양한 선택 경로를 두어 다행히 경직된 느낌을 주진 않는다. 현관까지의 진입은 창고와 계단 그리고 상부로부터 내려온 구조체들이 형성한 미로 때문에 약간은 어둑하다. 하지만 또 사방이 열려있고 자연지형이 살아있어 완전히 음침한 정도는 아니다. 진입 경로 곳곳에 위치한 5개의 ‘빛 우물’은 지층의 미로가 너무 음침해지지 않도록 적절히 빛을 전달한다. 2개의 세대를 위해 각각 준비된 진입계단들은 5개의 ‘빛 우물’로 둘러싸인 가운데 위치한다. 이로 인해 외부에서 바라본 진입계단들은, 빛의 조도 차이에 의해 신비하게 숨겨진다. ‘빛 우물’ 하부는 수목이 식재되었는데, 진입현관은 빛과 함께 수목으로 다시 한 번 가려지고, 거주자는 빛과 수목 사이를 헤쳐 현관에 도달하는 셈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지층에서 진입하며 경험하는 서호동 주택은, 주변으로의 열림과 내밀함이 혼합된 공간감을 갖는다. 주변과 관계 맺기를 원했던 건축가의 명확한 의도는, 이방인으로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은연중의 내밀함과 묘하게 뒤섞여있다.
오브제와 전체
단순한 형태의 건물매스는 르코르뷔지에의 사보아 주택처럼 공중에 들어 올려져있다. 들어 올려진 매스는, 일견 근대건축의 오브제처럼 건물의 존재감을 강하게 주장한다. 더욱이 진입도로의 경사가 주택에 다가가며 상승하기 때문에 공중 오브제의 존재감이 한 층 강조된다. 지층이 비워지고, 옥상에는 작은 박스들이 올려진 형태가 사보아 주택의 3단 구성을 닮았다. 역시나 사보아 주택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층은 공공에게 할애하고, 옥상은 사적 정원으로 활용한다. 지층과 달리 옥상정원은 관계로부터는 고립되어 있으나 개인이 최대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사적 파라다이스다. 지상을 공공에 내어주었으니, 공중의 자유는 침해하지 말라는 자세다.
하지만 사보아 주택과의 차이도 명백하다. 사보아 주택이 백색의 추상적 상자라면, 서호동 주택은 진회색 벽돌을 사용하여 거친 물성을 강조했다. 형태도 순수기하학에서 대지 형상을 반영하여 변형된다. 건물은 남동쪽 두면이 대지 곡면을 따라 하나의 면으로 펼쳐져 있는데, 제주의 습한 바람과 따가운 햇살이 벽돌의 거친 면과 색을 통해 시시각각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다. 공중의 오브제가, 사보아 주택에서는 기하학적 이상의 추상적 실현인 반면, 서호동 주택에서는 거친 물성과 감각의 변화를 통해 여전히 현실에 뿌리 내린다.
현실에 뿌리내리고 외부와 관계 맺고자하는 노력은 입면과 매스형상에서도 반복된다. 우선 한눈에 보이는 특이사항은, 건물을 대지에 가득 차게 들여앉혔다는 점이다. 대신, 중정(5개의 ‘빛 우물’들)을 두어 법정 건폐율을 맞췄다. 이로서 건물매스 형상이 필지 모양을 즉물적으로 반영한다. 필지는 사거리 모퉁이에 위치하는데, 거리 축은 완벽한 직각이 아니며, 남북으로 눌린 형상이다. 해당 필지는 도로모퉁이와 90도로 만나지만 둔각으로 열린 맞은편 필지와 함께 넓게 펼쳐진 느낌을 준다. 건물의 입면 또한 하나의 곡면으로 처리되어 도로 모서리를 향해 펼쳐진 느낌을 강조했다. 필지가 속한 도시블록은 비정형이며 곡선도로로 둘러싸여 있는데, 건물 외벽 선이 도로 곡선에 순응한다. 이에 따라 건물 매스가 도시블록 전체의 비정형 형상에 녹아들어간다. 필지와 도시블록 형상에 대한 순응적 자세 때문인지, 지상으로부터 띄워진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건물 매스가, 주변으로부터의 이질감이나 불편한 느낌을 주진 않으며, 오히려 중구난방 지어진 주택들로 어지러운 주변 경관을 차분하게 정리한다. 즉, 건물의 입면과 매스형상은 공중 오브제로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강조함과 동시에 도시블록 전체의 형상 속으로 녹아들어가며, 개인(오브제)과 함께 공동체(도시블락)의 개념을 상기시킨다.
곡면 파사드는 개구부가 절제되어 있으며 매끈한 면을 강조했다. 재료로 쓰인 벽돌은 속성상 모듈이 조밀하여 면의 조형성을 강조하는 데 최선의 선택이다. 물론 노출콘크리트 또한 면과 형태의 조형성을 강조하는 데 유리한 재료이나, 서호동 주택에서는 구조체(콘크리트)와 표피(벽돌)의 재료를 달리해 건축적 표현의 가능성을 높였다. 지층이 비워져 중력에 저항하는 매스, 표면에 입혀진 벽돌면, 그리고 입면 수평창은 매스조형, 재료, 개구부 형성 방법의 관계에서 벽돌이 표피 즉 켜라는 것을 암시한다. 건물에 다가가면 상부 옥상정원의 작은 매스들이 중첩되어 나타나는데, 마치 곡면 뒤에 ‘다른 건물’들이 위치한 것으로 인지된다. 이로서 곡면 파사드는 하나의 켜 혹은 표피로서 도시블록의 건물들을 감싸는 ‘담장’으로 인지된다. 해당 주택이 도시블록에 접근하는 모서리 입구에 위치하기 때문에 ‘담장’으로서의 상징은 더욱 강조된다. 결과적으로, 곡면 파사드는 물리적으로 주택 내부공간의 사적 삶을 보호함과 동시에, 도시블록의 ‘담장’으로서 공공의 삶을 상징한다.
추상적 미로공간
서호동 주택의 외부재료가 물성을 강조한다면, 내부공간에서는 추상성과 미니멀한 처리가 강조된다. 재료의 추상성은 거주자의 개성을 드러내지 않아 익명적이다. 재료의 사용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벽체와 천장은 백색의 이음새 없는 면으로 마감되었으며, 바닥의 나무마루도 최대한 이음새를 드러내지 않아 하나의 면으로 읽히고자 노력했다. 실내 가구들 또한 최대한 마루와 물성을 맞춰 존재감을 최소화 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실내 문들도 벽체와 물성을 맞추고 존재감을 최소화 했다. 재료와 디테일이 가지는 추상성은 현대적 거주인의 익명성을 대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역시나 단언하긴 이르다. 공간 구성에 있어서는 완전히 반대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내 공간은 미로 같이 내밀하며, 외관상 보이는 익명성과 추상성을 보완한다. 공간구성에는 많은 ‘구석’들이 존재하며, 각각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다. 지층 접근로가 가진 내밀한 공간감은 2층 실내까지 연장된다. 주공간이라 할 수 있는 2층 평면은 도넛 형식이며 중앙 ‘빛 우물’ 주위로 크게 순환한다. 순환경로 곳곳에 위치한 조그만 ‘빛 우물’들은 실내공간의 채광상태를 다양화 했으며, 빛의 농담(濃淡)을 만들어 낸다. 또한 ‘빛 우물’들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내부공간에 두터움을 만드는 시각적 공간적 켜를 만들어 낸다. 동선경로에 따라 바닥 레벨, 천정의 형상과 높이, 빛의 농담 등이 다양하게 변화한다. 공간구성이 가지는 내밀감은, 재료와 디테일의 익명적 처리가 근대건축의 추상성을 목표한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백지 같이 비워진 주택 내부의 표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밀조밀 다양한 내부공간을 반영하여, 거주자의 개성과 삶의 흔적으로 채워질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2층 주 공간이 2개의 세대로 나뉜 것인데, 이로서 미로의 순환동선이 단절되고 단순해진 측면이 있다. 각각의 세대는 젊은 부부와 부모님이 거주하는데, 애초 계획은 두 세대의 동선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서로 간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동선을 분리하였다고 하는데, 중앙 ‘빛 우물’에 면한 곳에 테라스를 두어 향후에라도 두 세대의 동선이 연결될 수 있도록 고려했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서호동 주택의 내부공간은 마치 원시인의 주거 동굴처럼 내밀함을 간직한다. 외부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의 몸을 숨기고 자기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동굴의 어둑함과 구불구불한 내밀함은, 원시인에게 심리적 안전감을 부여하는 피난처이자 거주공간이 가진 중요한 가치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들이 비좁은 구석을 찾아들어가는 것은 인류공통의 현상이다. 현대사회의 문명 환경 또한 원시인들의 자연 환경 못지않게 가혹하다. 현대사회가 가지는 외관의 화려함과 말끔함은 현대인들의 마음에 위안이라기보다 댄디한 무심함의 증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인들에게도 외부로부터의 피난처가 필요하다면, 거주공간은 어느 정도의 내밀함을 가져야한다. 따라서 주변과의 관계를 원하는 공공의 삶과 내밀함이 필요한 사적인 삶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주거건축에서 다루어야할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즉, 하이데거가 주장하듯 ‘거주’하기 위해 우리가 관계 맺어야 하는 것은, 세상을 이루는 4-요소만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자신의 공적 삶과 사적 삶 사이의 적절한 관계야 말로 현대인들의 거주 방식을 결정하는 데 더욱 중요한 요소다. 서호동 주택은 겉모습이 화려하진 않지만 담담한 방식으로 이를 다루고 있다.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