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평단 : 집은 무엇으로 사는가




<신화리 주택>

구부러진 공간과 세갈래 공간

하나의 필지로부터 시작되는 두 집은 같은 면적, 같은 비용, 같은 재료, 같은 어휘를 쓰지만, 공간의 성격이 드러나는 문법은 달리 출발한다. 대지 위 배치에 따라 각 건물은 서로 다른 대응을 하는데 도로와의 관계에 따라, 주변 대지와의 관계에 의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두집의 배치는 땅의 형상과 도로와 접하는 방식에 의해 자리 잡게 되고 함께 만날 수 있는 내밀한 외부공간을 공유한다.
하지만 두 집 내부에서 전개되는 공간의 경험은 다르다. 굽은 집은 도로에서 입구가 시작되고 공간의 형상이 선형이며, 갈래집은 가운데 외부공간을 거쳐 입구가 형성되고 건물의 중심에서 세 방향으로 공간의 형상이 펼쳐진다. 굽은집은 다양한 방향으로 외부를 볼 수 있는 외부 지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중앙에 이를 보완하는 썬큰이 있다. 반대로 갈래집은 내부 지향적이며 넓은 중심공간을 통해 각 공간으로 펼쳐진다.
각 공간의 성격은 판(벽이라 하기에는 움직임이 있고 문이라 하기에는 그 기능이 달라 판이라는 단어를 씀)의 위치에 따라 변하지만 궁극적으로 천장의 형상이 결정한다. 막힌 공간과 열린 공간은 선택적으로 분할되어 다양한 공간의 성격을 부여하고 우발적인 상황에 대응한다. 판의 움직임은 공간의 성격을 만들기도 하고 변화시키기도 한다. 판으로 분리되지 않을 때는 천장으로 유입되는 빛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집과 두 집의 이웃

두 집의 관계, 두 집과 이웃의 관계도 상황에 유동적인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도로와 인접해 있어 도로에서 집이 어떻게 보일지, 무엇을 보여줄지 고민하였다. 경계를 만들고 차가운 벽을 대면하는 방식의 관계는 이 동네에 대한 태도로 적합하지 않았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각각의 풍경과 내용을 다양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것이 첫 출발이다.
동네와 집의 관계는 담이라는 벽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집과 도로 사이는 길과 풀과 부드러운 둔덕이 중첩된다. 집에 들어가는 것은 길에서 집이라는 영역의 농도 속을 서서히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첩된 레이어들이 동네와의 관계를 설명해 준다.


고정된 형태는 고정된 관계를 만든다

집 내부의 경계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방식으로 모호하면서 유연한 건축을 구상했다. 움직이는 판들은 위치에 따라 공간을 느슨하게 나누고, 요구되는 기능에 따라 공간을 부여한다. 이 집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장소인 동시에 여러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된다. 하나의 공간인 동시에 여러 장소여야 하며, 단순하면서 다양해야 한다. 각각의 공간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고 거리에 따라 다양한 공간이 공존한다. 부분과 전체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되는 유연한 공간을  제안한다. 시간이 흘러도 대응할 수 있는 원초적인 하나의 방으로부터 출발한다.


느슨한 관계

문이자 벽(판)의 형식은 각 공간의 성격을 말하면서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드러낸다. 느슨한 경계는 느슨한 관계를 말한다. 하나의 방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기능에 적합하게 분할되는 방식에 따라 인접한 공간의 성격도 달라진다. 상호작용을 통해 각 공간이 인접한 공간과 관계를 맺으면서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판의 움직임에 따라 공간의 질서가 달라지는 불안정의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움직이는 판과 입체적인 천장

움직이는 판을 위해 바닥은 평평하고 벽은 가구로 둘러싸인 단조로운 구성이 될 수 있었다. 움직이는 판의 크기와 영역 그리고 두 판이 만나는 지점이나 방식도 다양하게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공간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관계와 기능도 변한다. 입체적인 천장과 움직이는 판의 위치에 따라 공간의 분할이 시작되고 공간을 분할하는 다양한 방식이 전개된다.














<연암빌딩>

기억과 상황의 재현

처음 대지를 방문했을 때 마주한 것은 오랜 시간 골목길을 지키고 서 있었을 커다란 목련 나무였다. 마침 따뜻해진 날씨에 나무에는 흐드러지게 목련이 피어 있었고, 바람에 날린 꽃잎은 골목길 초입까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건물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가기도 하고, 점심시간이면 식사를 마친 주변 직장인들이 나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가기도 했다.
목련 나무는 사라졌지만, 나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해 이어지기를 바랬다. 나무가 서 있었던 과거 골목길의 녹음과 꽃의 이미지를 건물 입면에 투영하여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현재에도 그 기억을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자 했다. 과거 건물에서 느꼈던 구상적 형상보다 그 당시 길에서 벌어지는 행위와 분위기를 이어 나가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계절의 변화와 푸르름, 그늘과 위안, 공적 공간에서 벌어지던 다양한 행위들이 지속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재료 마감은 과거 건물에 사용된 붉은 벽돌을 선택하고 도로에 인접한 1층 입면은 개방감을 극대화하면서 길가의 식물들은 더 세밀하게 계획하였다. 건물 1층은 많은 사람에게 개방된 그리고 접근 가능한 기능을 상정하고 계획했다. 과거 건물에 있던 반지하 공간을 1층으로 계획해 좁은 면적으로 인한 답답함을 해결했다. 각 층의 입면은 층 구분이 모호하도록 구성하였고 계절과 시간을 드러내는 식생을 두어 이전의 푸르렀던 기억을 연결한다.


깊이

연암빌딩의 입면에서는 수평적 면의 연속 속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깊이의 감각을, 재료에서는 보는 거리에 따른 다양한 이미지로 이야기를 담는 시간을, 내부 공간에서는 어둠과 밝음의 대비로 심리적 효과를 느낄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입면

요즘 도로에서 보는 건물의 입면은 점점 매끈한 형태를 띠고 있다. 더 얇고 더 투명한 재료로 미끄러지듯 그 재료의 속성을 숨기고 있다. 점점 매끈해지는 입면과 공간에 의해 도시의 기억이 점점 지워지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매끄러움 대신 형태의 굴곡이나 질감, 재료의 속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이야기한다. 입면에 굴곡을 만들어 그림자가 생기면 깊이가 생기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입면에서는 그런 깊이감을 부각하기 위해 요철이 있는 입면의 양쪽 모서리를 같은 재료인 벽돌로 얇게 처리해 대비시켰다. 그리고 서로 다른 크기의 입면 안쪽의 어두운 공간에는 움직임과 변화를 보여주는 식물과 창이 자리 잡고 있다.



재료

벽돌: 한 가지 벽돌이지만 사용하는 방식을 달리하여 각각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일반 벽돌, 일반 벽돌에 같은 색의 평줄눈, 빛에 따라 질감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줄눈, 반 토막 내어 사용한 벽돌 등 사용 위치에 따라 다양한 성격을 드러낸다. 테라코: 테라코의 어두운 색은 빛의 각도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벽돌과 달리 재료의 줄눈도 없어 하나의 형태로 읽힌다. 큰 도로에서 보이는 검은 입면은 동측에서의 효과, 도로 뒷면은 서측에서의 낮은 입사각의 효과로 다양한 질감과 건물 인상을 표현한다. 목재: 목재 루버는 방향에 따른 시각적 차폐와 반공간을 잘 표현한다. 서로 다른 무늬와 색은 자연스럽게 따뜻함을 표현하고 시간의 깊이를 전달한다. 콩자갈: 몇 가지 색의 콩자갈의 조합이 하나의 면을 만들어낸다. 멀리서는 하나의 색이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면 자갈들이 자신의 색을 드러낸다.



공용공간

요즈음 도시도 건물도 재미없어진 이유는 어두운 부분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없는, 빛뿐인 공간들. 어둠이 없는 공간은 빛의 장점도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건물 내부에서의 심리적 길이를 조절하고자 시도한다. 외부에서 건물로 들어갈 때 처마가 있는 공간은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크기로 줄여 시작한다. 대문에는 내부와 통하는 틈이 있어 다음 경험하게 될 공간을 살짝 드러낸다.
대문을 거쳐 들어간 공간은 어둡고 높은 차가운 공간이다. 이 공간은 심리적 불안감을 주고 멀리 계단 끝에 있는 빛을 올려다보며 오르게 만든다. 멀지 않은 거리지만 어두운 공간에서는 더 길게 느껴지며 빛을 향해 더 빨리 가고 싶어지도록 한다. 복도에서의 단절은 연결을 위한 매개의 기능을 담고 있다. 어둡고 긴 복도공간의 끝은 창을 통해 외부가 보이고 단절된 꺾임은 빛과 그림자로 다음 공간을 연결한다. 2층 입구를 거쳐 조금 올라가면 공간이 꺾여 다음 공간을 기대하게 된다. 이 지점까지도 자신이 있는 곳이 내부라고 생각하는 공간이다. 복도를 꺾어 올라가면 하늘이 살짝 보이고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다다른다. 반 층을 올라가면 3층 입구가 있고 다음 계단에 시선을 두는 순간 자신이 외부에 있다고 느끼게 된다. 마지막 계단참에 다다르면 4층과 함께 높은 목재 루버로 된 반공간으로 진입하며 4층의 외부 마당과 연결된다. 4층까지 이르는 거리를 심리적, 공간적 장치로 조절해 더 짧게 느끼도록 하였다.


















<박창현 근작 비평집담>

1부.  신화리 주택과 연암빌딩에 대한 건축가의 간단한 설명

신화리 두 집은 대전의 아파트에 살던 친구 사이의 두 가족이 양평에 있는 초등학교 근처에 대지를 정하면서 시작되었어요. 그 동네가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된 20채 정도 모여 있는 작은 마일인데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그 집을 왔다갔다하면서 잘 어울려 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집의 경계에서 마을과 두 집, 그리고 두 집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좀 개방적으로 접근했고 담장의 방식과 집의 배치 그리고 조경의 방식까지 이어졌죠. 그리고 좀 특이한 조건이 있었는데 두 집은 대지부터 시공까지 모두 1/2씩 내어 짓기로 해서 대지의 면적도, 건물의 면적도, 재료와 방식도 통일해서 진행하기로 한 것이 출발점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어떤 부분들은 공유하게 만들고, 어떤 부분들은 개인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할지 조율하는 과정이 외부공간이랑 건물 배치에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각각의 집 내부에서의 가족 내의 관계인데, 이 부분도 일반적으로 집이 기능에 의해 구획하고, 잠그고 하는데 건축가들이 계획하면서 집의 구성을 모두 결정하는 것이 옳은지 스스로 질문했고 그런 결정된 구성에서 벗어나 좀 더 유연하게 해 사용자들이 훨씬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고자 했습니다. 집 내부의 형태, 크기, 빛의 상황 등을 거주자 자신들이 조절할 수 있게끔 선택권을 열어주고자 한 부분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집의 형상이 그렇게 나오게 되고 붙박이 가구들이 전부 다 외벽 쪽으로 배치되고, 공간을 달리 분할하며 움직이는 판들이 완전히 닫히기도 하고, 살짝 열리기도 하고, 아예 통째로 열어서 한 공간이 되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첫 제안에서는 두집의 관계를 생각해서 하나의 큰 대지에 여덟 개 정도의 덩어리를 만들어 각자 자신들이 원하는 공간을 선택해서 쓸 수 있게 하자, 임의대로 바꿔 쓸 수 있게도 해보자는 안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건축가가 다 결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가지고 설계하다 보니, 움직이는 판도 나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움직이는 판에 의해 변형 가능한 평면에서 각 공간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천장의 형태와 빛의 유입을 스터디해 나갔습니다. 처음 건축주가 요구했던 아파트와는 다른 공간들이 생겨났고 양쪽 집의 구성이나 분위기도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성격들을 부여하게 된 것이 중요하게 남아있습니다.

연암빌딩은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도심지이기도 하고 저희 사무실에서 가까웠던 위치이기도 하고 뒤쪽에 아파트가 지어지기도 하는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30년 이상 된 옆집 건물과 쌍둥이 건물이었는데 옆집과 다르게 집 앞에 큰 목련나무가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연암빌딩 앞이 주차장으로 비어있고 차도 별로 없다 보니 사람들이 지하철역에서 나와 담배 피우며 약간 머물고 가는 장소가 목련이랑 이어져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동네를 기억하는 것들을 좀 연결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좁은 길가에 있는 큰 목련나무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 기억을 새로 계획하는 건물의 입면에 투영하자고 생각했던 것이 시작점이었습니다. 그리고서 가급적 이전에 서 있던 건물의 마감 재료도 같은 재료를 쓰고자 했고 이전에 있던 반지하의 레벨을 이용해 1층의 레벨을 낮춰 공간의 폭과 높이를 통해 편안하고 인상적인 공간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1층도 아니고 지하도 아닌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내부를 잘 사용하기 위한 가구배치, 사용자의 쓰임새, 그 다음에 남측 창 앞쪽에 수직 화단 등을 고려해서 평면을 계획하였어요. 그 다음에 공용공간의 가능성과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은 저희는 매번 프로젝트마다 고민하는 것이 있는데 이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로 근생이기는 하지만 공용복도에 빛이 들어오는 방식이라든지 높이라든지 밝은 것과 어둠이라든지 신경써서 했고 각층으로 올라갈 때 각각의 공용공간에서 기분이 다르다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굳이 똑바로 쭉 올릴 수도 있는데 외부와의 접점이나 시각적 처리, 분절된 경험으로 공용공간인 복도와 계단들을 계획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머지 4층, 5층 주택과 관련 부분들은 좁지만 답답하지 않도록 고려되었습니다.





2부. 비평집담

이번에 박창현 소장을 호출하게 된 것은, 여름호 주제도 그렇고 여름호 주제에 따라 가을호, 겨울호 주제로 얼마나 연장 또는 확장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집에 관한 얘기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코로나라는 사건은 집을 좀 다르게 생각해 봐야 하는 큰 전 지구적인 사건이기도 하고, 그래서 여름호를 준비하는 비대면(줌 화상) 편집회의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책 제목처럼. ‘집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잡기로 결정하고는, 첫 부분은 이번 기회에 모처럼 가급적 많은 평단 편집위원들이 각자 자신의 의견을 펼쳐내기로 하고, 둘째 부분은 그 질문을 몇 개의 질문으로 구성해 우리의 (특히 젊은)건축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탐침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으로는 여름호 주제로 감당하기에 분량이 충분치 못해, 마침 박창현 소장이 젊은 건축가로서는 제법 많은 단독주택을 지었을 뿐 아니라, 몇 년 전부터 공동주거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번 근작이 시기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박 소장에게 근작소개를 요청하면서 제가 구성한 두 개의 질문을 동료 건축가들에게 좀 돌려 답변을 얻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자신이 코로나와 연관된 질문을 덧붙여 일차로 일곱 명에게서 답변을 보내왔는데, 정작 자신은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박소장의 집 답사를 마치고 비평 대담하는 이 자리에서, 박 소장은 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질문들로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베이비부머가 몇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은퇴에 돌입하면서 탈-아파트, 탈-공동 주거, 탈-도시 공간에 대한 욕망이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 같고, 게다가 지금 젊은 건축가들의 작품, 특히 데뷔작은 대부분 단독주택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던졌습니다. 당신이 집(단독주택)의 설계할 때 그것을 통해 실현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건축적 특질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질문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만약에 당신이 당신의 집을 짓는다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인지 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코로나가 우리 삶의 방식이나 일하는 방식이나 세계 또는 생활세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동시킬 가능성이 큰데, 포스트코로나 시대에서 집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 것인가? 어떤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양평 답사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뻔한 사실이지만, 아무리 건축을 오래 해도 역시 실물을 접하지 않고서는 그 공간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는 겁니다. 도면으로 볼 때 답사대상 주택이 붙박이 가구들도 많고 해서 부잣집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스케일 감각이 도면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재료나 마무리 상태도 예상을 크게 빗나갔습니다. 매스들, 특히 입구가 아주 작고, 전체 구성이 매우 아기자기하고, 집의 마감이나 만든 모양새도 다소 거칠고 원시적이었어요. 답사 때 텔레토비라고 얘기했지만, 아동의 상상력이나 아동들이 돌아다니기에 딱 좋은 마치 놀이터처럼 집을 만들었는데, 외부계단으로 올라가 조그만 옥상공간을 돌아다니는 맛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내부 공간감은 역시 모던하고 전형적인 모더니즘 공간인데, 외벽이 홑벽이다 보니, 빛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조금 다르지만, 공간 토폴로지나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지나치게 말하면 매우 보수적인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고, 다른 형태의 가족이 사는 두 집이 매우 유사한 토폴로지를 가지고 있어요.

이제 박 소장이 여름호 주제를 위해 던진 앞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고 질문들을 좀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 전에 오늘 답사한 집에 관해 몇 가지 물어야 할 질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 소장은 거주자가 그 집을 능동적으로 공간을 바꾸거나 통제하거나 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과연 그것의 내용이 무엇인가, 기변적인 벽을 통해 무엇을 얻어내고자 하는가.. 빛의 양을 컨트롤하는가, 프로그램도 바꿀 수 있는가, 바꿀 수 있는 정도가 어느 만큼이며 무엇인가. 평면을 보면, 바꾸게 하기 위해서 실과 실 사이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공간들이 있는데, 이 공간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떤 것을 예상하는가. 물론 우리가 삶이 예상할 수 없지만, 도대체  그 공간은 무엇이냐. 이것과 연관된 질문들. 그리고 이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박 소장은, 제가 보기에, 매우 보수적 건축가입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달리 말이죠. 시카고 시티 슬로건이 ‘Together Alone’입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혼자 살아야 하고, 세계 자체가 다 떨어져서 혼자 살아가면서 연대하는 삶이 가속화되는 방향으로, 코로나가 아니어도 이미 세계는 그런 쪽으로 가고 있는데, 박 소장은, 예를 들어 공공성 또는 뭐 내 것과 네 것 사이의 공간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 건축적 관심이 온통 쏠려있습니다. 여전히 공동체의 가치, 한국 사람들이 여태껏 살아왔던 공동체나 국가주의에 억눌려서 개인이 충분히 개인적일 수 있을 때까지 밀어붙여도 될 거 같은데 여전히 공동체적 가치, 관계성, 공공성 등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특히 집 공간에서요. 물론 이제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진보적/혁명적인 것이 대세이어서 거꾸로 보수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혁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보수적인 것이 좋다, 나쁘다, 또는 혁명적이다 아니다’를 떠나,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집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이 화두가 육박하고 있어서, 오늘 답사한 박 소장이 지은 집을 둘러싸고 집에 관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박 소장은 앞서의 세 질문에 대해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들어보며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박창현 ㅣ 사실 그 질문을 받고 그다음에 하나의 질문을 포함해 여러 건축가에게 보내고 받고 하면서 정작 저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지금 생각하면 사실 신화리 두 집 이야기하면서 저희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거의 다 한 거 같은데요. 조건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완전 도심지냐 아니냐, 높낮이가 있냐 없냐, 등등의 물리적인 관계에 의해서 건물이 만들어진 것은 당연하지만, 저희는 각각의 집에 사는 구성원들끼리의 관계들에 물리적인 어떤 장치로 모종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에 기본적인 탐구심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저희가 집에 대해 가지고 가려고 하는 방향이 그쪽으로 많이 몰려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반대로 저희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서, 그게 이제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이웃과의 관계, 집안에서 사람들끼리 관계, 옆집과의 관계 이런 부분들을 약간의 장치로 무언가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않을까가 제일 큰 관심사였던 거 같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질문 그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지 잘 모르겠네요



이종건 ㅣ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오기 전에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다른 사람도 생각해 놓은 코멘트가 있을 거 같은데, 물리적 공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과연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모종의 건축적 개입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을지…

오래 전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에서 시작해서, 제가 유학 갔을 때 건축 쪽의 큰 리서치 이슈가, ‘공간과 인간의 행태’의 관계성이었어요. 미국 몇 대학에 박사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서너 대학은 두 개의 전공, 그러니까 ENB라 부르는 ‘Environment and Behavior’와 ‘역사/이론/ 비평’이 있었어요. ‘역사/이론/비평’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찬밥이지만, 그 당시 ENB는 펀드가 제법 있었고, 호주의 존랭이라는 사람이 그 학문계의 거두였는데, 20년쯤 후 문득 돌아보니 그쪽 디스플린이 거의 소멸했어요. ENB가 철학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현실적인 문제까지 설득력이나 실효성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죠. 특히 디자인계나 역사와 비평 쪽에서 무가치하다는 의견이나 인식이 만연했어요. 80년대에는 하브라켄이라든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인간 행태와 공간의 연관성이 매우 밀접하리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는데, 실천 가능한 또는 과학적으로 유의미하고 현실적으로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거죠. 그런데 박 소장은 지금 다시 그쪽 관심으로.. 이게 그러면 새로운 부활이냐 아니면 반복이냐, 잘 모르겠어요. 일본 건축가들은 인간행위의 미시적 부분에 관심이 많아서, 그 분야에 관심을 두는 건축가가 좀 있는데, 아마 일본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다른 나라는 인간의 행태보다는 프로그램이라 부르는 다소 다른 차원에 주목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박 소장은 공간에 대해 보수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당혹스러운 지점들이 있어요. 그게 박 소장에게는 프로젝트의 핵심 부분인 것 같고, 그래서 홍은동 공동주택 특히 다가구라든지 주택에서 그런 부분, 공용 부분에 관심이 엄청 많고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까 그 집도, 집과 집 사이, 가족과 가족 사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부분을 설명했는데, 그러한 관심을 어느 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작업에 옮기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박창현 ㅣ 저희가 그런 부류의 관심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서 그것들이 기능을 할 수 있는지, 지금까지 계속 실험하고 있어요.  예를들면 오브제가 될 수 있고, 그 다음에 움직이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기능이 없는 어떤 공간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까 잠깐 선생님이 이야기 하신 ‘제로의 공간’들이 두 집에 각각 하나씩 붙어있어요.  그 ‘제로의 공간’이 인접한 다른 공간들과 붙으면 또 새로운 변화가 있고, 얘가 얘랑 붙으면 얘도 가능성이 있고, 사실 ‘기능 없는 공간’들이 양쪽 집에 딱 하나씩 있어요. 저희가 양쪽 집에서 제일 가능성이 있다고 봤던 부분들이, 가운데 있는 매개인 제로의 공간이 하나, 둘, 세 개, 네 개까지 합쳐지면 또 다른 영역들을 만들어 내고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종건 ㅣ 이쪽 편도 되었다가 저쪽 편도 되었다가 하는 것이 기능이 아닐까요? 기능이 없다고 하는 것보다 확정적인 공간이 없다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을 기능으로 파악하는 것이죠. 기능이 없다고 하는 건 좀 이상한 얘기이네요. 아무튼 그런 용도로 정의하지 않은 상태인 공간인데.



박창현 ㅣ 저희는 그런 공간의 위치, 크기, 방식 이런 부분들에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다른 공간들도, 저희가 이 공간은 이렇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되도록 결정하지 않고 사용자에 의해 그 기능이나 쓰임이 생기도록 계획하려 합니다. 그러면 사용자는 그 영역의 기능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조건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능이 없는 기능에 관심을 가지고 잇죠



이종건 ㅣ 근데 실제로 소장님이 지금까지 건축 활동을 하면서 그전에 하신 학습 과정에 환경, 생태, 심리, 지각 등의 주제를 가지고 씨름해 보신 적 있으세요? 제가 보기에는 없을 것 같은데. 지금 두 분이 하신 이야 기가 세대 차이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신세대한테 관심이 없다 는 이야기는, 이미 그 주제는 소진이 됐는데…

지금 양평 집에 두 채가 있잖아요. 우리는 전통적인 가옥 구조에서 민가의 경우 여러 채로 되어 있는 게 하나의 집이잖아요. 거기에서는 여러 가지의 관계 설정 방식들이 이미 있었어요. 근데 저 집은 두 채인데, 사실 두 채가 아니라 가구가 다른, 소유 주인이 다른 구별 개인들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궁금해 하는 것은, 그렇게 한 가족이 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건축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 영역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 내용을 얼마만큼 추출해서 여기저기 대입했느냐고 했을 때, 저는 그것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저에게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 드는 것은, 두 물체의 관계, 두 집의 관계를 두 채의 관계처럼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 게, 이게 설득이 될까? 당장 저 집이 시간이 지난 다음에 두 집에 살던 사람이 더는 저 집과 관계하고 싶지 않게 되는 일이 생길 때, 그때는 답이 그래서 하나를 사든가 아니면 그냥 개조하든가 아니면 그 안을 그냥 저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 막는 장치를 놓게 되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번 해봤어요.

더 설명해 드리자면 두 집이 지금 밖에 없죠. 근데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요. 나중에 어떻게 안 좋아질 것까지 저희가 예상을 해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 두 집의 관계들이 더 접근이 더 친해지면 더 친해진 만큼 변화가 생길 거고, 만약에 더 떨어지면 떨어진 만큼 어떤 새로운 무언가하는 것들이 생길 거라고 봐요. 저희가 궁금한 것들은 저희가 해놓은 대로 그대로 살라는 건 전혀 아니고, 도리어 거기에서 새로운 뭔가의 변화들이 생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또 그 변화들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김영철 ㅣ 그 부분이 저에게는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들려요. 지금 그 생활방식도 그 집의 현상에 따라서 이미 규정된 거잖아요. 그럼 그 방식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창이 열렸으면 내가 그거를 통해서 안과 밖의 소통, 공기와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바꿀 수 없어요. 답이 이미 주어져 있는데 그럼 답을 줬다는 이야기는 그 방식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얘기예요.



이종건 ㅣ 여기서 사실은 철학적으로 뭘 해야 할 질문은, 어려운 질문이지만, 인간에 대한 전망입니다. 제가 이번호 제일 앞에 쓴 글을 들고 와 말하자면, 동양과 서양이 좀 다릅니다. 서양은 소위 말하는 윤리의 황금률이, 예수의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방식으로 대접하라’는 것인데, 그게 문제일 수도 있죠. 왜냐면 나는 저 사람이 대접받고 하는 방식으로 나를 대접해주기를 원치 않거든요. 동양에서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는 방식입니다. 한쪽은 부정적으로 가고 다른 한쪽은 긍정적으로 가죠. 그쪽은 잘못하면 강요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지만, 이쪽은 남이 싫어하는 것을 안 하게 되어서 위험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사회 공학이란, 분명한 악을 제거하기 위해 컨트롤해서 조금씩 줄일 방법을 디자인해 나가는 쪽입니다. 그 반대 쪽이, 무엇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디자인하는, 소위 유토피아적 낙관론이거나 자기의 신념에 따른 가치를 설정해서 제시하는 것인 반면, 분명한 문제를 제거해나가는 방식이라 문제의 소지가 없어요. 부정적인 것들을 줄이는 쪽으로 디자인한 것과, 긍정적인 것을 제안하는 쪽으로 디자인하는, 두 개의 큰 차이는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전망과 상황에 대한 것으로, 철학의 최고봉에 해당하는 윤리학의 주제입니다. 저는 건축가에게 이 지점이 굉장히 크리티컬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건축가들은 착각을 자주 해요. 하비의 말처럼 우리 모두 건축가이기도 하고, 보는 각도에 따라 아니기도 하겠지만, 건축가들은 자기가 설계를 하면 반드시 더 좋게 만든다고만 생각해요. 더 나빠진다는 생각을 안 한다는 건 매우 이상해요. 자신들의 디자인이 그 이전보다 더 나쁠 수도 있는데, 그거를 한 번도 생각 안 한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착각이에요. 환상이고 환영입니다. 이 문제는 건축가들이 굉장히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철학적이자 윤리적인 문제예요. 이 시점이, 오늘 집도 그렇지만, 박 소장이 건축의 길을 걸어가는 데 반드시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하는 주제가 아닌가 싶어요.



박성용 ㅣ 지금 가장 크게 든 생각이, 박 소장님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를 하셨는데, 제가 느끼는 바는 우리가 이제 건축가로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있고, 두 번째로는 왜 인간과 건축의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를 안 하고 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냐면 제가 생각했을 때 이제 거주하는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체계를 만들어나가는 거로 생각하거든요. 단순히 몸이 여기 들어가서 사는 것보다는. 그러면 우리가 건축을 통해 어떻게 거주환경의 의미 체계를 구축해 나가는가. 물론 현대 사회에서 그게 굉장히 어렵겠지만, 그래도 예전에 그 고정된 사회에서 뭔가 어떤 건축물에 갔을 때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었단 말이죠. 의미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적어도 감정의 소통이 있었다는 말이죠.

현대에도 모종의 그런 관계를 통해 만들어내는 의미의 상징화라든지, 어떤 것들이 재현체계라든지 어떤 것들이 있을 것인데, 그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과 건축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건축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져 주고 서로 어떤 것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조금 고민해야 될 거로 생각하고 하고 있거든요. 근데 이제 만약에 집이라는 문제라고 보면, 제 개인적으로 가장 우리 현대 세대가 처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건축가들이 좀 등한시하는 문제는, 아까 이제 이종건 교수님도 개인과 전체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지만, 저는 그 두 개가 이 사회에서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둘 중의 하나가 옳고 그른 거가 문제가 아니고, 지금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문제는 이게 모순임에도 불구하고 둘 다 유용하다는 거. 근데 이제 우리가 집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개인을 위한 건물이잖아요. 그러면서도 전체라는 것에 대해서도 등한시할 수 없는 문제란 말이에요. 그럼 우리가 집을 지을 때,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줘야 하느냐. 이게 그런데 이제 프로그램적으로 하는 거는 저는 조금 과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아까 이종건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히 틀린 방법이 한 100개를 시도하면 99개는 틀릴 거거든요. 보나마나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프로그램적인 문제를 약간 피해가면서 우리가 뭔가 긍정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들은, 예술적인 방법들, 시적인 방법들, 그게 이제 현실적인 제약에서 약간 느슨한 상태에서 모순을 다룰 수 있는 좋은 그런 거를 통해서 뭔가 재현체계나 의미체계를 만들어간다면, 전반적으로 우리 거주환경이 의미 있는 거주환경이 되는 거라고 저는 조금 보고 있거든요.



이종건 ㅣ 조금 전에 말했듯 인간과 인간이 아닌 인간과 건축이라고 한다면, 건축이란 용어가 좀 부담스럽다면 사물이라고 해도 돼요. 집도 사물이기 때문에.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좀 나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같아요.



현명석 ㅣ 저 는 양평 주택에 갔을 때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박창현 소장님이 생각하는 그 기능, 그 개념 자체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엌, 침실 이런 개념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거 같아요. 박창현 소장님이 예를 들어 기능이 없다고 할 때 그거는 단지 부엌이나 침실 이런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말씀이신데, 그거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태도는 분명하지만, 거의 강박적으로 설정하는 기능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공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거를 굉장히 세밀하게 정의하려는, 어떻게 보면 양극단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엌, 침실과 같은 기능은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근데 그 반면, 이 공간과 저 공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거는 진짜 섬세하게 들어와서 그거를 정의하려는 점이 저는 매우 흥미로웠어요. 그런 의미에서, 아까 말씀하신 인간과 건축 사이의 관계도 별로 관심이 없으실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인간하고 건축이 어떤 방식으로, 건축이 어떤 의미체계를 갖느냐 아니면, 건물이 어떤 파사드를 갖느냐에 전혀 관심이 없으실 것 같아요. 제 생각엔, 뭔가 이 공간하고 다른 공간하고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 그런 느낌을 양평에서도 받았고 여기서도 그런 생각,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런 걸, 진짜 근본적으로 기능이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보다는. 예를 들면 도시 레벨에서는 르코르뷔지에 방식의 무엇, 용도별 지역 지구별 조닝 도시계획과, 스미슨 부부가 했던 도시들 간의 관계 이런 차이 정도로. 형태적인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공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게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 것 같고, 그게 실체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창현 ㅣ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사실 그전에는 우리 사무실 내부적으로는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반대로 공간 또는 건물이랑 사람들의 접점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교감시켜 줄 수 있을까. 왜냐면 항상 ‘공간 따로, 사람 따로’이거든요. 그리고 감흥도 없고. 이제 저희가 이런 종류의 작업을 한 계기가 그 접점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어떻게든, 찾아보려고 노력한 흔적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현명석 ㅣ 저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아까 말씀하신 의미체계라는 것이, 사실 양평 주택 같은 경우는 이것보다 훨씬 덜한 것 같은데, 형상이 아니라 작은 디테일들 이런 데서 오히려 질감이라든지 이런 것들 관계 안에서 설정되는 것이지, 형태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양평 주택도 형상이 특이하잖아요.



박창현 ㅣ 저 프로젝트에는 조금 덜 나왔지만 지금 시공 중인 홍은동 프로젝트는 아무런 쓸모없는 기능의 오브제들이 층만다 나와요.



현명석 ㅣ 그러니까 그 오브제라는 그것도 아까 계속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일까 저는 계속 궁금했어요. 오브제라고 할 때 , 예를 들어 양평 주택 같은 경우, 제가 이해하기로는 빛을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 아닌가요?



박창현 ㅣ 아니에요. 그냥 형태에요. 재료로 만들어진. 저희는 이제 그게 아무런 내용도 없이 또는 의도도 없고 기능도 없이 공간에 존재할 때, 그 공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아까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어쩌면 예술이에요. 저희가 이전 프로젝트에서는 미술 작가와 협업했어요. 두 명의 작가와. 그게 효과가 저희가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컸던 거예요.



박성용 ㅣ 아까 이종건 교수님이 제가 건축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사물이라는 단어로 고쳐 주셨는데요, 사물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제 사물이라는 것이, 제가 어떤 레퍼런스를 딱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두루두루 읽은 이제 이런 내용에 기반해 보자면, 일단 질료가 있으면 질료를 구성하는 형식이 합쳐져 하나의 사물이 되는 건데 그 사물이 온전했을 때 요게 사람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단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오브제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건축물을 온전한 사물로서 만들어내느냐, 그럼으로써 그것과 인간과 어떤 의미체계를 만들어내느냐, 전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김영철 ㅣ 그 지적을 계속 보고 있었는데요. 그 질문에 대한 소장님의 답은, 제가 보기에는 사물로 가지 않은 것 같아요. 아직 가기 전 단계인 거 같고. 그래서 지금 오브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인식에는 도달했는데, 지금 우리가 공간이라고 말했을 때는 그것이 오브제가 되면 안 되는데, 그거를 오브제로 옮겨 놓고 있는 거 같아요. 근데 그 이야기가 뭐냐면, 그 건물하고 이 주택에서 제가 본 건, 그리고 소장님이 지금 우리가 지금 보는 주택이나 아니면 이 건물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무엇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제가 그 부분을 고민해보면, 아주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소장님한테는 기본적인 도구가 면인 거 같아요. 선도 아니고 입체도 아니고 면인데, 이 면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이 돼서 이것이 어떻게 조합이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 그 과정이, 건축이란 결과를 이루어낸 것이고, 그 과정에서 목적해야 하는 바가 있는데, 목적해야 하는 이 영역을 아직은 잘 못보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이제 다행인 것은, 면으로만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히 이거는 장점이라고 드는 생각은, 양평 집의 구성은 다 면이에요. 지붕도 면, 벽도 면인 이런 기본적인 요소들의 조합에 이것을 어떤 나열이거나 구성이고, 여기까지는 자유로운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 중에, 3차원이라고 했을 때, 이 면이라는 이차원의 속성에서 갑자기 뛰어든 다른 차원에 서야 하잖아요. 지금 이 3차원의 영역을 책임지는 방식이 이것을 채우는 내용 자체가 무엇인가 혹은 더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없는 거 같아요.



현명석 ㅣ 그 양평 집에서 면이라고 하시는 게 어떤 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김영철 ㅣ 예를 들어볼게요. 이 공간도 마찬가지인데 여기 바닥, 저 의자도 면, 이 모든 것이 면이라고 하는 것의 조합의 결과예요.



현명석 ㅣ 양평 집 같은 경우 인상적이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말씀하신 대로 그 중간에 닿는 슬라브 그 밑으로는 다 면이에요. 하지만 그 위에는 전혀 다른 형태 언어를 사용하잖아요. 그 두 개가 겹쳐져서 그 집이 흥미로운 거잖아요.



김영철  ㅣ 제가 면이라고 했을 때, 그 위에 수직이 서야 하고 직각으로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고, 기본적으로 예를 들면, 저는 교수님 입장하고 달리 박 소장님의 건축 어휘가 굉장히 라디컬하거나 모더니스트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관점에는 보수적인 내용이 전혀 없어요. 예를 들어 마당이라고 하는 개념을 빌려와도 마당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고, 이렇게 한번 해볼까 하는 것이지, 마당이라고 하던 우리가 알던 의미를 분해해서 재구성했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거실이란 영역, 침실이란 영역, 아니면 특히 지붕, 지금 말씀하신 지붕도 우리가 지붕이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논리, 그리고 거기 들어있는 여러 가지 의미들을 보면, 지금 양평에서 본 것처럼 몇 가지 면의 비정형이거나 다른 방식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그것은 조병수의 건축에서 똑같이 볼 수 있던 건데, 조병수 건축의 특징이, 일단 벽면이 서 있으면, 어떤 벽은 이렇게 서 있어요, 그거를 천장이라고 하거나 지붕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렇게 기본적으로 구조의 논리는 면의 구성밖에 없고, 이것이 벽이라는 이름이 되든지 지붕이라는 이름이 되든지 상관이 없어요. 땅에 파고들든 위에 올라가든. 근데 그 논리가 소장님한테서 보인다는 거죠. 지금 이 공간, 이 집을 구성하는 그 논리가 처음부터 끝까지인 거 같고. 그래서 제가 특이 이거를 지적하는 이유는, 이 집의 기본적인 매스 설정이 이 양쪽 벽이 있죠, 이 벽 선이 밖에 튀어나오는데, 아니 벽이라고 했을 때는 뭔가를 지지하는 중요한 구조체이고 의미죠. 우리는 거기에 기대거나 하죠. 그런데 이 바깥의 이거는 구조체가 아니고 또 공간을 정의하는 요소도 아닌데, 건축가가 어떤 이유에선지 이것을 들이댔어요. 이 선을 연장한 거죠. 이 집이 면의 구성, 면의 논리를 채워가는 방식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게 다른 요소와 혼재되지 않은, 그래서 면이 면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고집이거나 아집이거나 디자인의 창작 의도가 되는 거죠. 그쪽에서 다른 의미는 부여하기가 어려운 거죠. 그런 차원에서 지금 건축을, 건축물을 표현한다고 했을 때, 그 기본적인 관점은 면이라고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어떻게 전개되고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는 답이 되어 있는데, 이제 제가 지적하려고 하는 부분은, 그렇게 해서 이차원의 요소들이 결합해서 3차원으로 되어서 차원이 달라질 때는, 그냥 그것이 그 면의 구성요소가 하나 더 느는 게 아니라, 그래서 여섯 개로 돼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있어요. 3차원이 된다고 하는데 그 지점에서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이 지금 안 보인다는 거죠.



이종건 ㅣ 우선 첫 번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몇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보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건축에 대한 태도이지, 마당, 공간, 장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화를 해석하는, 인간관계를 보는, 인간에 대한 전망이 보수적이라는 이야기였고. 흔히들 이제 건축가들이 ‘실험적’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실험은 정해진 컨디션 안에서 변수를 조작하면서 변화를 통해 결과를 얻고, 그리고서 그 결과를 다시 피드백하는 것인데, 그래야 실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냥 새롭게 뭔가를 해 보는 것을 흔히들 실험적이라고 해요. 실험적이라는 용어가 남용되는 측면이 있죠. 첫 번째 질문이 건축가가 남의 집을 설계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전망과 사물에 대한 전망이 없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왔는데, 다시 또 이야기 안 하면 두기로 하고, 두 번째 질문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집을 지을 때에는 어떤 세계관과 삶의 태도가 문제로 나타나겠죠. 좀 전에 ‘표현’이라는 말을 했는데 표현 의지가 있는가, 표현성이 있느냐를 따져봐야 하겠죠. 표현은 사물의 존재 방식이기도 한데, 표현을 못 한다는 것은 사물이 제대로 존재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문제는 또 다른 측면에서 논의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그런데 첫 번째 문제보다 두 번째 문제가 표현과 더 밀접한 문제이기도 해요. 자신의 집이기 때문에.


박창현 ㅣ앞에 있는 저 사진들도 그렇고, 저희가 일반적인 설계사무소가 할 수 있는 범위와 내용에서 벗어나 확대되고 있어요. 저희가 하는 영역들이 넓어지고 있는데, 뭔가 제한할 수 있는 폭과 그거에 대한 실질적인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이 무엇일까. 저희의 관심은 홍은동에서 지금 짓고 있는 그 건물에서 저희가 약간의 시도를 하는 것은 설계를 시작하기 전에 프로그램에 관여하는 거예요. 저희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그 프로그램대로 그것이 실제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 수 있을지.. 저희가 프로그램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했거든요.



이종건 ㅣ 자신의 집을 지을 땐 자신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겠죠. 그리고 아까 프로그램, 기능 등에 대해 왈가왈부했는데, 실제로 부엌이고 침실이에요. 이건 기능이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고, 침대를 가져다 놓으면 침실이죠. 인간이 살아가는 행위를 분리해 볼 때, 이건 침실이고 저건 거실이고, 그런 형식이 이미 근거가 있어요. 행동의 다발들이 그 공간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인데, 그게 아무 의미가 없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두 번째 이야기로 자신의 집을 짓는다고 가정할 경우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프로그램이 중요하다면, 어떤 프로그램? 다른 집들과 뭐가 어떻게 다르길래 프로그램이 중요하다고 말하는지, 그 부분에 대한 얘기가 없으면 그냥 흔한 이야기가 되고 말죠.



박성용  ㅣ 박창현 소장님 이야기하는 거 들으면서, 저는 소장님이 건축가로서 매우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게 프로그램은 아닌 거 같아요. 솔직히 제가 느끼는 소장님의 장점은, 소장님이 설계한 건물들을 보면,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나라 젊은 건축가 중에서 미국이나 뭐 그런 쪽에서 하는 건축과 가장 유사한 방식으로 건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일단 우리나라 건축을 할 때 콘크리트를 붓는 방식으로 건물을 많이 짓는데 박창현 소장님은 일단 구조체를 최소화한 후에 제작한단 말이에요, 내부 공간을 만들 때. 그게 이제 박창현 소장님의 배경이 조형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재료들을 서로 붙이고 자르고 제작해서 내부공간을 구축하는 방식들, 사실 이게 좀 더 선진적이라고 하기에는 웃기지만, 우리나라 외부, 바깥에서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인데, 우리나라에서 젊은 건축가 생각을 가장 재미있게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이 저는 박창현 소장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아까 이제 그 이야기를 잠깐 하면, 이 공간에 어떤 구축 원리나 형식을 부여하겠다고 했을 때, 지금 가장 유리한 작업방식을 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또 박창현 소장님 일 수 있어요. 이거를 어떤 식으로 제작하면 문제에 가장 밀접하게 서 있기 때문에.



이종건 ㅣ 두 번째 질문이 어려운 건 일종의 건축철학을 묻는 것이기 때문이죠. 어렵지만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고, 문제는 내가 내 집을 짓는다고 했을 때 클라이언트가 없잖아요.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맞닥뜨렸을 때 나는 과연 무엇이 중요한지를 묻는 거라…



현명석 ㅣ 아까 프로그램 말씀하셨을 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프로그램이랑 다른 의미로 말씀하시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박창현 ㅣ저희는 저희 방식으로 공동주택에서 계속 새로운 제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그것이 저희 사업성에 아주 중요하거든요. 절대 안 된다는 범주 안에서 무언가를 계속 제안하고. 아니면 만들어 놓고 그게 몇 년 지나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계속 피드백 받아요. 그러면 그 다음 버전에서는 그것보다 조금 더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해요. 그렇게 해서 온 게 지금 유일 주택까지고. 유일주택에서도 저는 불만족스러워서 그 다음 단계를 하고 있어요. 저희가 제안하거나 아니면 디자인한 부분들, 의도한 부분들이 시간이 좀 필요해서 그렇지, 익숙한 상황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구나, 특히 유일주택 같은 경우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거든요.



이종건 ㅣ 여기 있는 사람들은 유일 주택을 본 적도 없고 그래서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잘 모르니까 이야기가 겉도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는 것에 대해, 혹은 그것의 표현성이 있는가, 존재에 표현성이 있는지, 그런 거 포함해서 내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만한 이슈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박창현 ㅣ 일단 지금 상황으로는 조형적 관심은 전혀 없어요. 제가 관심 있는 것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희가 시 했던 것이 실제로 사용자들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있어요.



이종건 ㅣ 자신이 만들어내는 자신의 공간은 자신이 사용자이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죠.



김영철 ㅣ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돼요. 이게 되게 많은 걸 이야기하네요. 그 집의 모양을 결정하는 원리도 해당이 되면 좋고 안 돼도 상관이 없죠.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그 집에 의미가 규정이 되는 거잖아요. 의미가 규정이 되니까 그 집의 후손들은 알게 모르게 그걸 따를 수밖에 없는 거죠. 그게 뭔지 알면 다행이고 몰라도 하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제가 보기에 집을 생각할 때 그 부분이 주제가 되지 않으면.. 프로그램이라고 그러시는데 프로그램은 미리 앞에 규정된 다이어그램, 도식들, 그럼 그걸 그렇게 따를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거를 그렇게 했을 때 그걸 우리 뭘 하기로 했는지, 그래서 음악회도 어떤 프로그램, 따라서 그 프로그램이 있기 이전에 오늘 주제는 무엇이라는 주제가 설정되잖아요. 우리는 그거를 알고 싶은데, 그냥 프로그램 과정, 순서가 어떻다는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거든요. 그건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요.



이종건 ㅣ 건축가들 대부분 자기는 그렇다고 믿으면서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방금 나는 조형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관심이 없다는 것은 무책임한 이야기고,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은 책임을 져야 하는데, 나는 형태는 어느 정도까지만 필요하다든지 그런 게 있어야죠. 조형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죠.



박준호 ㅣ 저도 사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설계하는 사람으로서. 건축가들이 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형태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이거는 정말 거짓말이고, 가식적인 말로 들려요. 아까부터 계속 사람의 행위에 따라 공간이 바뀐다고 이야기할 때 떠올렸던 게, 알렌드로의 엘리멘탈이죠. 똑같이 만들지만 몇 년 후 사진을 보면 계속 바뀌어 가는 사진들이 이제 있다는데, 그것도 결국은 똑같은 걸 반복하는 형태적인 작업이지, 건축하는 사람이 형태를 빼고 뭘 한다는 이야기는 없어서 시작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이종건 ㅣ 형식 없는 사물은 존재할 수 없죠. 형식이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형식을 모르겠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죠.



박창현 ㅣ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니고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게 아니라, 한참 뒤의 순위라는 말이예요.



이종건 ㅣ 그럼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남이 아니라 내 집을 짓는데 내 이야기를 못 하고날 남의 이야기만 해. 내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남의 욕망을 하겠다는 건 좀 앞뒤가 안 맞지 않나?



박준호 ㅣ 아까 관계가 중요하다고 했잖아요. 지금 자기가 자기 것을 할 관계가 아직 설정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종건 ㅣ 우리는 우리 각자 살아오면서 축적된 우리 자신의 기억을 통해 우리가 경험해온 관계를 근거로 삼아 상상해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유추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나로부터 출발한 관계들을 미루어 짐작해 그로써 모종의 관계를 좋게, 또는 나쁘게 만들어나가는 건데, 그런 점에서 우리 자신이 빠져있다는 것은 뭔가 크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영철 ㅣ 저는 박 소장님의 의도를 짐작이긴 하지만, 형태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는, 사실 형태는 수단인데 이 수단은 반드시 무엇이어야 한다고 규정할 수 없다고 이해하고 싶어요. 근데 이게 바꿔도 되고 때에 따라서는 대체 가능하다는 이런 논리인데, 그런 수단들을 통해 내가 이루려고 하는 것, 아니면 이 수단이 어떤 목적에 기여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머물지 않겠다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현명석 ㅣ 집의 형태를 만들 때 집의 형태의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집에서 나타나는 부산물 정도의 차원에서 형태는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이종건 ㅣ〈신화리 주택〉이 마을 어귀라 들어가고 나올 때 무조건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에 맞는 풍경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풍경이 형태인거죠. 형태를 자꾸 나쁜 용어로 생각하는데, 매스도 형태죠. 형태 없는 매스가 어디 있어요. 형태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그래도 이런 식으로 빛이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죠. 형태란 사물이 자리 잡은 모습을 보고 미루어 짐작하는 건데, 사물이 등을 돌리고 있는지 바로 보고 있는지 등, 그런 것이 모두 형태와 관련된 것이죠. 이세웅: 근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형태를 만들기 위한다고 한다기보다는, 설계를 하다 보면 구축 방법이라든지, 시공법, 재료의 특성, 기술적인 과제, 이런 것들에 의해서 개인적인 주관은 좀 빠지고. 그렇게 건축가들이 활용하는 그나마 객관적인 근거들로 형태의 초점을 좀 모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면 건축가 본인은 ‘나는 형태에 별로 관심 없는 거 같은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현명석 ㅣ 외부의 모양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내부 공간이 어떻게 될 것인가, 천장 높이와 각도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게 더 중요해서, 그게 형태로 발현된 캐릭터가 세요. 그 하나의 감각 박스를 만들기 위한 그 각각의 플레이들이 있고, 그게 이중적인 면인데, 인간을 규정할 수 없으므로 정의되지 않는 공간을 만들겠다, 관계를 계속 탐구해 보겠다는 등, 사실은 특정한 공간에 기분을 만드는 거랑 이율배반적인 상태로 보이거든요.



이종건 ㅣ 상황을 보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나쁜 태도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죠. 예를 들어서 사과를 먹습니다. 사과 모양이 달라도 맛은 똑같아요. 맛만 있으면 된 거지 다른 건 신경 안 쓴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시각성이라는 게 모두에게 평등할 뿐만 아니라 공적이고 동등하죠. 공간은 공적이지 않아요. 그래서 시각적 차원이 중요한 차원인데 이거를 부산물로 보는 이런 전통적 정서가, 오랜 것들이 우리를 보이지 않게 훈육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호중 ㅣ 형태를 진짜로 완전히 상관없어 하는 사람이 건축가 중에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땐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굉장히 섬세하게 신경을 쓰고 디자인을 하면서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은 위험한 것 같아요.



이종건 ㅣ 건축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형태를 다스려야 하는 책임이 있는 거죠. 책임이 있는데 ‘사과가 맛만 있으면 된 거지 모양이 무슨 상관이 있어요.’ 하는 것은 건축이 가지고 있는 13가지 노래하는 방식 중 중요한 한 가지 노래방식에 대해 무심한 만큼, 그걸 좋다기보다 나쁜 것으로 봐야지. 그거를 미덕으로 보게 한 묵은 이데올로기 영향이 아닐까 싶어요.



현명석 ㅣ 그런 흐름은 분명히 있겠지만, 박창현 소장님 세대에서 형태가 없다는 말과 그 세대는 차이가 있는 거 같아요.



김효영 ㅣ 저는 스케일의 차이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박창현 소장님이 건축을 경험하거나 인지하는 방식에 스케일의 차이도 있는 거 같아요. 사실 형태가 넘쳐나죠. 디테일부터 해서 손잡이까지 형태가 넘쳐나잖아요. 근데 그게 건물의 큰 형태, 밖에서 인지하는 이런 거보다 실제로 손이 닿는 스케일에서 건축 공간 이런 것들, 아까 오브제라고 하셨는데 그 스케일의 경험이 박창현 소장님에게 아주 중요한 거 같아요. 근데 저는 사실 좀 아이러니하게 생각하는 게, 아까 박창현 소장님이 어떤 소통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좀 희한하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게 더 희한하거든요. 제가 느끼기에 한국 건축계 전반에 그런 강박이 있거든요. 소통을 시켜야 하고, 공동체를 위해야 하고,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는데, 솔직히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까 얘기하신 대로 박창현 소장님이 잘하는, 드러나는 걸로 볼 때는 박창현 소장님이 잘하는 이야기가 아닌 데라는 생각이 좀 들어요. 근데 잠깐 그 이야기하셨는데 사실 원래는 건축과 사람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찾은 게,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한다고 그래서 거기서 오브제도 나오고 그랬는데, 그 소통의 방식으로, 수단이라고 하는 게 이 부분들이 아닐까. 실제로 사람들이 만난 어떤 공간에서 체험적으로 느끼는 디테일, 분위기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 거를, 지금 어떤 수단과 목적으로 생각하고 계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박준호 ㅣ 나도 사실은 박창현 소장의 작품을 많이는 못 봤지만 도리어 거기에 더 집중하고 확대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어요. 거의 정말 스카르파처럼. 그게 도리어 건축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 배경도 좀 다르고 우리가 건축과를 나와서 건축 실무를 하고 건축으로만 연결된 사람과 다른 시각과 다른 감각이 분명히 있단 말이죠. 그게 더 집중되고 확대되는 게 장점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만들어놓은 거 보면 굉장히 잘했거든요. 우리 같은 사람들, 좀 딱딱하게 건축을 계속 공부한 사람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가죽으로 뭘 만든다든가, 이런 것들은 매우 큰 장점인데, 그걸 사소하게 할 게 아니라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그게 소통의 수단이 되고, 그게 공간을 규정짓는 단서가 되고, 나는 그 공간을 교정할 때 첫 번째가 일상성이라고 보거든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들어가면서 공간을 도리어 규정지어 주는. 요새 맨날 얘기하는 DLK공간이라는 거 있잖아요. 그런 것들 말고. 건축 근대성으로 오면서 빼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잖아요. 이것도 좀 거부하고 부정하고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종건 교수님 말씀처럼 도리어 고전적인 게 혁명적일 수도 있다는 그 말이 맞다고 봐요. 왜냐면 전부 다 그렇게 사라지고 도리어. 박창현 소장님한테는 훨씬 더 큰 장점, 남들이 없는 장점들인데, 도리어 형태가 필요 없고. 나는 사람이 어떤 그거에 따라서 자기가 만들어 달라고 이런 얘기들이 굉장히 좀 그렇게 유토피아적으로 들리거나 그래요.



이종건 ㅣ 유토피아보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죠. 왜냐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전체를 알아서 하겠다, 열어주겠다는 이야기인데, 살아보면서, 아까 소통 이야기했는데 소통하고 경험하고는 다릅니다. 감각의 경험을 소통이라고 볼 수는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죠. 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내면이 소통하는 경험은 평생에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상처를 두려워해서죠. 소통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내야 해요. 상처 없는 소통은 불가능하고요. 개인적인 확신이지만 앞으로 바뀔 수도 있겠지만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간과 인간의 소통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 곧 인간관계를 건축의 포커스로 둔다는, 좀 희화적으로 말해 허무맹랑성, 이거는 건축가도 아니고 철학가도 아니고, 어떤 게 들어와도 인간과 인간 사이를 과연 이 방향, 저 방향으로 한 발짝 움직이는 데 과연 어떤 몫을 할 수 있을까? 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건축의 주제가 인간 관계를 중심에 놓고 갈 수 있는 게 과연 가능할까. 아까 실험이나 몇 개 들어 봤던 그 정도는 실험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데이터가 부족하고, 컨트롤도 되지 않은 상태고 그래서, 그거로는 솔리드한 결과나 믿음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과학적 근거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 안 해요. 그래서 이 주제가 무겁고 불가사의하고 허무맹랑하기도 해서, 손으로 만드는 일은, 손맛이라는 게 있잖아요. 기계로 사물을 만들어 가는 데 세상에서 사물성을 회복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건물도 사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쪽으로 가기보다는… 건축가는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서 한두 번은 방법론적 회의를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영태 ㅣ 이종건 교수님은 아라베나 같은 경우는 전혀 인정을 못하시는 거죠?



이종건 ㅣ 아라베나 건축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내가 알고 있는 아라베나 작품은, 가난하니까 이 사람들 공간이 이만큼 필요한데 예산이 적어요. 그럼 살아가면서 손으로 지으면서 공간을 만들어나가라고 하부 구조를 지어 준 거죠. 불법이든 뭐든 자기 공간을 영위하면서 그게 저절로 틀이 되도록. 마치 건축가 없는 건축이 되는 거죠. 아라베나는 그렇게 정확하게 프로그램을 생산할 수 있는 기본적인 프레임을 디자인한 거고.



박영태 ㅣ 절대 건축가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고. 그런 차원에서 플랫폼이라고



이종건 ㅣ 아니 안 되어도 상관없다는 거죠. 그거하고 인간관계의 문제는 이슈가 완전히 다르죠. 인간과 인간의 소통 문제가 아니라, 집을 지어 나가는 데 집을 필요에 따라 지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터를 만들어 주고 도와주는 것은, 인간과 인간 간의 소통의 문제하고 전혀 다른 맥락인데, 질문이 이상해요.



박영태 ㅣ 어찌 되었건 누수나 잉여가 있지 않은 한, 더 폐쇄적으로 될 거 같아요.



이종건 ㅣ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죠. 예산을 내가 100원을 가지고 있는데 소위 말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건축을 해 줄 것인가 했을 때, 100원으로는 제대로 된 집을 지어주기가 불가능해, 허술하더라도 터를 만들어주고 그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자기 집을 확장해가면서 만들어나가겠다. 집이라고 하는 게 한 번에 완성되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늙어가고 아이들이 성장하면 그러면 집이 똑같이 작동할까? 그럼 그때 되면 집을 팔까? 잘 모르겠어요.



현명석 ㅣ 인간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박 소장님도 많이 하시지만, 오히려 좁혀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런 식의 담론보다는 제가 그냥 박창현 소장님이 하신, 특히 양평 집 같은 경우 보고 느꼈던 점은, 예를 들면 공간 같은 것들을 이 사람들이 어떻게 가변적으로 쓸 수 있게끔 벽을 움직일 수 있다거나. 근데 그 논리를 잘 생각해보면, 그냥 벽 없이 주고, 알아서 파티션해서 써. 그게 그거에 대한 해결 방식일 수 있잖아요. 근데 그렇게 안 하잖아요. 그래서 뭔가 공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세밀하게 조절하는 실험을 들을 때마다 무슨 말일까? 저거 어떻게 한다는 거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으니까. 예를 들면 이것도 제가 처음에 봤을 때는 그냥 가변적인 벽을 만들었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양평 집을 딱 봤을 때 제가 느낀 점은 그냥 이 건축가는 공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진짜 섬세하게 만들어가고 있구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될지 진짜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사실은 박창현 소장님의 관심이고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사실은 물리적인 차원에서는 이런 기틀들로 나타난 것이고, 공간의 차원에서는 그 관계들로 나타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거를 차이, 차별점을 둬서 박창현 소장님의 위치를 잡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게 예를 들면 뭐 헤르만 헤르츠버거 이런 식으로 골조만 주고 그냥 알아서 해, 이런 거는 이것과는 또 다른 뭔가 다른 방식의 공간적 가변성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딱 규정되는 공간들 그리고 그걸 그냥 열어 주고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그 사이에서 뭔가 섬세하게 이것들을 다듬어 가는 그런 뉘앙스로 말씀하셨는데, 그게 어떻게 한다는 걸까에 대한 약간 궁금증이 있었는데, 양평 집을 봤을 때 그런 걸 전 봤어요. 그래서 그 지점이 사실은 되게 중요한 거 아닌가. 어떤 방식으로 그거를 규정 하는 것이 중요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종건 ㅣ박 소장의 주된 관심은 단독주택이 아니고 공공주택, 다가구 주택이란 말이죠. 복도나문을 열어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는가? 어떤 소통이 만들어져서 사람들의 관계가 좋아지느냐, 어떤 이웃이 되느냐. 이런 거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오늘 이 두 집에서 프로그램보다 그 사이의 관계, 그게 이제 단독주택보다는 다가구주택 쪽에 훨씬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자신의 건축의 중심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 이제 사람과 사람 관계가 공간을 변화시켜 주거나 열거나 닫거나 하면서 어떻게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거죠.



김영철 ㅣ 저는 그 질문이 제가 보기에 의미가 없는,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인 것 같아요. 두 사람에게 관계를 사실은 정의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나’가 아니라 ‘우리’잖아요. 인문학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내가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것도, 어딘가에 답이 있거나 이렇게 되어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도 불안정한 뭔가의 구성체일 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이 이미 답이 되어 있는 구성체고 그다음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서로 조율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질문인 거 같아요.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경우는, 저희가 사회적인 건축에서 봤던 것처럼, 이 사회의 구성원이 다 동일한 권리나 어떤 위치, 가치를 부여받아서 그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존재할 수 있는 최소의 장치를 해 줘야 한다, 그건 가능해요. 지금 이 주제는 그게 아니잖아요. 최소 장치가 아닌 거잖아요. 오히려 가치 영역을, 가치를 어떻게 같이 갖게 하는 거라고 되어 있는데 그게 뭔지 계속 질문했잖아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는데 그게 어디서도 나오지 않아요. 그 이야기는 우리 각자에게도 그 주제의 삶의 의미와 가치, 이게 주제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에요. 근데 이거를 다른 사람도 똑같을 거라고 전제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건, 제가 보기엔 가능한 일이 아닌 거 같아요.



박성용 ㅣ 제가 비유를 한번 들어 보면, 이게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어떤 장인이 아주 기가 막힌 칼을 한 자루 만들었던 말이에요. 그런데 이 칼을 여기에 놓았는데 어떤 기가 막힌 셰프가 와서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줬어요. 그리고서 그 셰프가 갔어요. 그런데 범죄자가 오더니, 기가 막히게 날카로운 칼이라고 이 칼로 살인을 저질렀어요. 같은 칼인데 셰프가 사용했을 때는 좋은 칼이고 살인자가 사용했을 때는 나쁜 칼이 되는 건가요? 만약에 그 기준으로 보지 않고, 이 칼은 날카로움이라는 칼의 본연의 가치에 충실히 하는 것으로 이미 좋은 칼이라는 것과, 셰프가 사용해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줬기 때문에 좋은 칼이라고 얘기하는 것, 이 둘 사이에서 칼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저는 전자로 생각하거든요.



이종건 ㅣ 일본의 유명한 전설은 그 문제를 좀 다르게 봅니다. 칼의 최고의 장인 마사무네에게서 칼 제작기술을 배운 제자 무라마사가 어느 날 스승과 대결하는 이야기입니다. 스승의 기술을 능가했다고 판단하는 무라마사가 먼저 흐르는 강물 속에 자신의 칼을 꽂습니다. 그러자 물결을 타고 내려오는 나뭇잎뿐 아니라 물고기를 포함해 모든 것들이 즉시 둘로 베입니다. 그런데 스승이 칼을 내려놓자 고기는 피하고 나뭇잎만 잘립니다. 그러니까 이 전설에 따르자면, 생명을 해하지 않는 칼이 있다는 겁니다. 칼만 데고 보아서도 이미 좋은 칼과 나쁜 칼이 있다는 겁니다.



김영철 ㅣ 저도 그럼 다른 관점에서 칼 이야기를 하나 할게요. 칼이 하나 있었는데 그 칼을 농부한테서 빌려왔어요. 이제 쓰고 돌려줬어요. 선한 일을 한 거죠. 근데 어떤 강도한테서 칼을 빌려왔어요. 그리고 잘 썼어요. 돌려주려고 하니 그 강도가 살기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그 칼을 돌려줘야 되냐 말아야 하냐 했을 때, 돌려주면 살인이 일어날 게 뻔해요. 근데 내가 언제 돌려주기로 했으니까 돌려줘야 하는데 그럼 돌려줘야 하냐 말아야 하냐. 그러니까 칼이 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인데 이 얘기를 한 이유는, 지금 우리가 이런 집을 지었을 때 이게 이제 칼처럼, 사실을 어느 많은 부분에서 형태를 부정한다고 하시는데, 도구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 도구가 어떻게 도구 역할을 하는지 질문하거나, 아니면 어떻게 되어야 가치가 있는지, 의미 상태가 드러날 수 있는지, 이 질문을 하는 방식이 되어야 하지. 그 도구가 도구로써 잘 작동 한다 안 한다는 판단 기준에 머무르면 일단 안 된다고 하는 거죠.



이종건 ㅣ 칼은, 만든 이든 쓰는 이든, 결국 사람에 따라 선악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선한 의도로 만들어도 악할 수 있고, 반대도 가능하고… 근데 이 공용공간을 이렇게 넓게 주면 이것이 사태를 좋게 만들 거라는, 칼의 예로 말하자면 이 칼은 좋게만 쓰일 것이라는 그런 가정 혹은 믿음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김영철 ㅣ 제가 그 비유를 들었던 이유는, 이 공간으로 그 논리를 다시 전개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박 소장님이 이 공간을 설계하고 계획하고 의도했으니까 이것에 관해서 얘기를 해 보자면, 형태를 부정하고 싶다고 했어요. 일단 그 부분부터. 이 공간을 디자인할 때 제가 보는 형태는, 이 매질을 질료의 상태들이 아니라 공기로 환원해서, 이 공기라는 한 덩어리로 환원을 하면 모양새가 생기잖아요. 이 모양새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겠느냐고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 모양이 매우 정교해요. 그래서 이제 제가 질문하는 거예요. 형태에 관심 없다고 하지만 이 무형의 형태, 모순인 거 같은데, 그래서 제가 공기라는 비유를 들었죠, 이 형태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죠. 형태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해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질문해야 하는 거는, 그러면 이 무형의 덩어리로서의 무엇을 형태라고 부를 수도 있거나, 아니면 공간이라고 대부분 생각을 할 텐데, 이 공간이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 가치를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해야 하고, 그것에 대한 의미 부여의 방식의 논리가 드러나야 하는 거죠. 그런 고민을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김현석 ㅣ 제가 하나 질문해도 될까요? 박창현 소장의〈신화리 주택〉을 제가 보지는 못했어요. 두 분이 건축주라고 하셨는데 연배가 어떻게 되시죠?



이종건 ㅣ 삼십대고 그 전에 아파트에 사셨어요.



김현석 ㅣ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우리나라 주거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거주의 방식(의 기억)을 오랜 세월 동안 잃어버렸다는 점. 그러다보니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자기가 정말 원하는 집이 뭔지 모르죠. 그래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거죠. 자기가 사는 집이 아니라 꿈꾸는 집을 짓는데, 문제가 뭐냐면, 건축가도 비슷한 입장이라는 거죠. 우리는 집을 많이 지어보지 않았어요. 일본처럼 지진이 많은 나라는 개인주택을 많이 짓지만, 우리나라는 대부분 지금 세대가 다 아파트로 주거가 바뀌면서; 그러다 보니 건축가도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게 함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면 박창현 소장님도 뭔가 집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려고 하는데, 과연 집이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는 거죠. 나도 그런 집에 살아보지 않았는데 이 사람들 보고 그런 집에 한번 살아 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제대로 하는 건가. 근데 이제 건축의 역사를 돌아다보면, 사실 주택이라는 게 건축가가 다뤄야 할 영역으로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되었죠. 그러다보니 주택이란 일상의 사람들의 지혜가 모여서 지어졌는데, 유독 모더니즘에 와서 집을 건축적으로 어떻게 좀 해 보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제 교수님이 그 질문을 주셨을 때, 두 번째 질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왜 어려웠냐면, 제가 살고 싶은 집은 제가 설계하고 싶은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고 싶은 집은 이미지 속 어디, 그러니까 유럽의 농가에서 느꼈던 그 느낌이에요. 내가 거기다 굳이 덧붙이지 않고 그 집을 지어서 살고 싶은데, 그것이 의뢰 프로젝트로 다가오면 제가 그렇게 설계하지 않을 거란 거죠. 어떻게 보면 제 입장이 모순인 거죠. 제가 살고 싶은 집이 따로 있고, 제가 설계해 줘야 하는 집이 따로 있는 거죠. 건축가들이 이거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과연 내가 이게 좋은 삶이라고 제한하는 주택 형식이 정말 그게 좋은 건지. 이거는 내가 이렇게 애쓰지 않아도 차츰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렇게 나갈 수 있는 건지. 내가 굳이 이걸 혁명적으로 뭔가를 제안해서 그 인간의 삶이 좋아질 것인지 등 대한 것을 한번 좀 반성하면서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김영철 ㅣ 말씀을 들으면서 떠오른 생각인데, 우리가 부정否定한 조선 시대의 주거형식. 반가라고 했을 때 사대부집이죠. 한국 건축을 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안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데, 집을 구성할 때 기본적인 요소가 있죠. 안채가 있어야 하고 사랑채, 행랑채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왜 이 안채하고 사랑채를 분리를 시켜놨는지, 또 분리하면 채가 여럿이고 따로 해 놓으면 되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 반드시 두 개가 맞물려 있어요. 연경당 가보면 깜짝 놀라는 게, 문이 하나 있는데 공간이 두 개지만 그 문만 열면 하나가 돼요. 밤에는 그 문으로 다니는 거죠. 다시 말하면 그게 하나로 되어 있어요. 그 얘기를 왜 하냐면, 우리 조선 시대의, 거창하게 말하면 세계는, 아니면 집이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했을 때, 그 사람들한테는 유교의 전통에 따르는, 그러니까 성리학의 논리인 거죠. 세상이라는 것이 하나의 전체인데, 집이라는 그래서 담장으로 이루어진 그 내부는 하나의 세계인데, 음의 영역과 양의 영역이 따로 있고 이렇게 태극기처럼 되어 있고 나머지는 여러 가지 현상 간에 기능들이 독립되어 있고, 또 사당에서 모든 걸 다 주관하는 이런 생각. 다시 말하면 조선 시대의 집은 이 성리학의 원리로 지어낼 수밖에 없어요. 파란색, 빨간색 아니면 남녀 이렇게 되어 있는 이 구조, 분리되어있고 분리된 것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도식에 그대로 있고, 이거를 뭐 어떻게 하든 뭐 크든 작든 이 방식이 몇 백 년 동안 있었다는 거죠.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집을 지을 때 우리는 아까 박 소장님이 말씀하셨듯 지금 LDK 이 기능을 충족하면 집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그냥 먹고 자고 배부르고 따뜻하면 된다, 이 기능을 충족하면 집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종건 ㅣ 오늘날은 조선 시대가 아니잖아요. 오늘날의 삶의 습속이 있을 거 아니에요. 조선 시대는 이렇게 살았는데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산다, 그럼 이게 뭐냐 이렇게 할 수는 없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그것과 전적으로 다르죠. 그러한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받쳐주는 게 집이고. 그러면 집이란 무엇인가. 그 이상 뭔가 요구하는지 안 하는지. 그것이 이제 건축가가 답을 해야 하거나 고민을 해야 하는 지점이고..



김영철 ㅣ 제가 이번 주제원고로 쓰려고 하는 제목은 ‘집.. 불과 돼지’예요. 긴 역사를 보니 서양 사람들이 지어야 한다고 했을 때는 불을 지어야 해요. 우리는 돼지를 지어야 해요. 그런데 제가 사전을 찾아봤는데, 한자를 교육하는 사람들도 제주도에 아래에 돼지우리가 있고 인분으로 해서 키워서 잡아먹는다는, 이로 인해서 이렇게 돼지를 두는 것이 집의 기원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리고 어쩌다 한번은 이 돼지 시豕에 집 가家의 지붕 구조죠. 이 형상 아래 담겨 있는 것이 돼지 시자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상고시대에는 신성의 상징이었대요. 신성이라고 하는 이것이 보존되도록 하는 구조가 가옥인데, 만약에 그것이 아니고 기능이거나 모양만 지칭하면 당堂자가 되거나 실室자가 되거나 여러 가지 기능들의 분류가 있죠. 그래도 집 가家자 만큼은 이 돼지 시자인데 이것이 신성한 미래인 거죠.



이종건 ㅣ 그것도 어려운 것이, 마르크스에 따르면 현대성은 성스러움뿐 아니라 모든 것을 대기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겁니다. 현대세계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의 핵심자리를 차지하면서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변질되고, 성스러움 또한 사라진다는 말인데.. 과거에는 당연히 모든 게 성스러움이었겠죠, 그런데 현대화 과정 속에서 성스러움이 희발되거나 기껏해야 상품의 잔여물로 남거나 변질 혹은 탈색된 상황에서, 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무엇을 지어야 할지는 어렵고도 난처한 과제인데..



김영철 ㅣ 저는 그래서, 그 돼지나 불이 하나의 은유나 과거의 전통적인 개념이었다고 한다면, 지성사가 발전하면서 이 보이지 않는 상대는 뭐냐 하면, 그 말들이 어떻게 번역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그 번역어를 가지고 어떻게 구현할까 하는 것이, 제가 판단하는 인류 역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불은 아주 이상하게도 문화라는 말로 번역이 돼요. 혹은 빛이라고 하거나 이렇게 해서 가능성이 있다거나, 아니면 어떤 경우에는 이 문화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영역은, 예를 들면 가치이거나 신성이거나 이런 작업이 돼야 한다, 이렇게 논리를 잡거나, 아니면 그렇게까지 하지 못하거나, 이제 이런 구도가 직결되거나 흩어지거나 이런 구도라는 생각이 들어요.



윤웅원 ㅣ 저는 소장님한테 궁금한 게 하나 있었어요. <문호리 주택> 있잖아요. 두 집이에요?



박창현 ㅣ 아니요.



윤웅원 ㅣ 저는 박창현 소장 작업 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건물이 〈문호리 주택〉이거든요. 디테일이나 이런 거는 거친 게 더 좋기도 하고 그 형식으로 더 발전시킬 줄 알았는데…



박창현 ㅣ 그 형식은 어떤 형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윤웅원 ㅣ 예를 들자면 박 소장님의 어느 건물은 전체의 공간을 구축하는 게 세련되게 정리가 되는 것이 있고, 어떤 거는 한 부분은 되게 좋은데 한 부분은 안 맞는 것이 있어요. 일반인들은 대개 파편적인 사고를 하거든요. 근데 저는 건축이라는 게 대부분 상업적인 질서를 상업적이지 않은 구조로 만드는 건데, 그 집은 좋은 공간들이 다 모였는데도 흔들리지 않거든요. 어떤 집은 좋은 것들이 다 모여 있는데 그 구조가 종속된다거나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는 느낌이 좀 덜한 프로젝트가 있고, 그게 감각적으로 좋은 거를 가진 사람이 그것을 단층으로 흩어놨을 때는 전체 질서가 부딪히지 않거든요. 다른 거를 같이 붙여놓고 시각적으로 어떤 내부가 보이고 처마 밑 이런 것들이 다 합쳐져도, 그게 그냥 총체적인 질서로서 완성이 되는데, 그거랑 분리된 주택이 있잖아요. 그렇게 뭔가 분리된 형식일 때는 그게 서로 부딪쳐도 문제가 안 되는데, 사실은 이 집도 정면 파사드는 완성도가 정리됐는데, 근생 주택이라는 게 단일한 질서가 되기 어려워서 그런지, 그거는 또 측면이나 후면에서는 딱 안 맞더군요. 완전 다른 세계의 질서로 넘어갔다는 느낌이.. 이게 잘 안 잡히는 게 있는데.. 하여튼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는, <문호리 주택>같이 완벽하게 자기가 자기 질서 안에 들어가든가, 아니면 그 질서가 상관없는 방식으로 가든가 둘 중 하나라는 것이에요. 제가 문호리와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매우 인상적인데 ,하여튼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는, 부분적이거나 어떤 감각적인 그거가 되게 좋은 게 있는데, 그거를 전체로 만들어 자기 질서로 넘어가는 거가 어긋나는 것들이.. 안 돼 있는 게 있고 그게 되는 게 있고. 근데 그래서 사실 제 질문은 제일 좋아하는 건물이 뭐냐고 묻고 싶었어요. 하신 것들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에 대한, 그러니까 본인이 하는 작법에 대한 자각이 있는지..



박창현 ㅣ 문호리를 만든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어요. 전 그 당시만 하더라도 공간을 만들 거다. 아니면 로직으로 탄탄하게 만들어 내는 거, 그것이 완성도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그 당시는 그거에 대한 시간을 더 투자했어요. 근데 지금은 반대로 이제 어떤 부분에서 우리가 더 힘을 줄지 말지에 대한 밸런스를 계속 찾고 있는 과정이에요.



이종건 ㅣ 우리나라의 젊은 건축가들이 건축 영역을 넓힌다면서 다른 데로 옮기는 둥 한단 말이죠. 깊어진 상태로 계속 넓어질 수는 없고, 모든 걸 하려고 하면 다 제대로 깊이 있게는 못하게 되는 것이 이치이고. 건축가가 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건축을 잘 하기 위해 영역을 넓힌다는 것을,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건축가들이 하지 않은 일들을 하면서 그걸 마치 자랑처럼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한 소위 건축 외연의 작업들이 과연 건축을 더 낫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까요?



박준호 ㅣ 문훈 소장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사람의 건축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은 자신은 형태밖에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굉장히 신선했어요. 말도 신선했고. 그 사람도 다들 아시겠지만 명함부터 시작해서 특색이 확실하게 보여요. 결과물을 제쳐두고라도 그 자세가 마음에 들고. 만들어 놓고 그 생각도 마음에 들고. 굉장히 독창적으로 보여요. 그 이외에 많은 사람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메뉴가 100가지나 되는 식당처럼 이런 식으로 해서 정말 국수 한 가지만 가지고 정말 맛집이 되는 이런 느낌이 아니라, 그게 다만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건축계 문제인 거 같기도 하고, 그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어요. 요즘에 와서 그런 것도 있고, 도리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신선해 보여요.

아까 그 일본 건축에서 잠깐 이야기하셨는데 사실 일본 건축을 깊이 있게 몰라요. 근데 일본을 자주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21세기 들어와서 걔들이 한 ‘슈퍼노멀’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거를 보러 가고 그랬는데, 그게 굉장히 일본적이고 지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런데도 요즘 건축가들이 그것을 많이 흉내 내려고 해요. 지금 내 입장에서는. 아까 박 소장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동일한 부분이 있는데, 이제 열어놓고 그들이 알아서 하라는 부분. 일본의 잘은 모르지만, 그 ‘엔가와’라고 더블스킨이 있던 그것이 가운데는 다 열리고 껍데기만 딱 규정을 지어놨어요. 그것도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그게 지금의 21세기로 와서 슈퍼플랫 개념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좀 크게 본 건데 디테일하게는 못 들어갔고. 깊이가 없어서. 근데 그게 우리 21세기 건축에서 굉장히 좋은 걸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종건 ㅣ 마지막 질문을 하자면, 방금 이야기를 이어서, 나는 트로트 가수가 되고 싶다는 건 조용필처럼 부르고 싶다는 것처럼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영역을 개척한다는 이야기가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좀 들면서, 박 소장한테 가고 싶은 방향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박창현 ㅣ 제가 이야기를 하면 또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좀 조심스러운데, 개인적으로 건축이라고 하는 영역과 그거에 대한 대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상의 폼form 안에 가둬져 있는 게 옳은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의 영역들, 그 이후나 그 바깥쪽에서 뭔가 들어올 수 있는 것들은 없는지도 궁금한데, 제 관점은 사실은 이타미 준 선생님 방식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요. 옛날의 어떤 사상이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저한테 그게 계속 오랫동안 가지고 있고, 그게 이제 저랑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보니 이제 저런 종류의 일들이 계속 저희 결과물로 드러나고, 그래서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기능이 없는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고자 저희가 준비도 하고 있고, 고민도 하고 있고, 그게 사실은 역할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역할에 대한 부분들을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던져놓고 한번 보고 싶기는 해요. 그리고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고, 그래서 그거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이종건 ㅣ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기에 과연 그 바깥의 뭘 상상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오해도 많고. 건축 영역 속의 작은 부분, 지나치게 말하자면 조형예술가가 되고 싶은 건지, 건축이라는 의미를 통해 조형적인, 큰 건물에 해당하는 조형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미술가의 안목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박창현 ㅣ 그런 뜻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아니고요. 기능적으로 보고 어떤 조건에 맞춘 결과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제 관점은 예술적 영역으로 연결될 수 있는 접점을 계속 찾고 싶은데, 아까 얘기했던 이타미 준 선생님도 예술 이야기하셨고, 조형적 부분들은 좀 다르긴 하지만, 저는 이제 또 다른 방식으로 찾고 싶었어요.



김효영 ㅣ 사실 그런 측면에서 궁금한 거는, 소장님 작업을 봤을 때 드러나고 직접적으로 느끼는 거랑 소장님이 하고 싶다고 설명하실 때의 뉘앙스에 괴리가 느껴지는 것같이 보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공공적, 윤리적인 방향에 건축을 하고 싶다고 얘기를 하시는데, 저 디테일이나 이런 거에 집착하시는 그 모습이 말해주는 것은, 사실 그걸 윤리적이지 않다고 얘기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차이가 좀 느껴지는 건 사실인 거 같아요. 거기에서 그거 두 개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떻게 보면 지금 이타미 준 얘기하시면서 어떤 방향으로는 공동 집단의 얘기가 아니라 건축과 개인에 대한 얘기로 느껴지거든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공공에 대한 방향이 아닌 느낌이 좀 들어요.



이종건 ㅣ 우리나라 건축가들은 대부분 환경에 대해 생각을 안 해요. 환경에 대한 윤리와 책임, 지역 경제에 대한 공헌 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작업인데 또 공적인 이야기도 하고, 이런 문제들이 계속 충돌하는 것 같아요.



박영태 ㅣ 그런데 공공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공공적이고 윤리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보는 게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보거든요. 오히려 예술적이고 감각적으로 접근해서 다른 걸 만들어 내야 하는데, 공공적이고 윤리적이고 디테일을 얘기하니, 예술을 얘기하니, 이렇게 해 버리면 답이 없다고 봐요.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 잘못 볼 수도 있는 부분이고 틀리게 본 부분일 수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충분히 가능성을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효영 ㅣ 비판이라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되게 유니크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측면에서 본인은 그 접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거든요.



이종건 ㅣ 윤리적인 문제를, 예술가가 예술적으로 풀 수는 있으나, 혹은 철학가가 철학적으로 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현실윤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특정한 사회적 삶의 문제를 우리자신이 몸 둔 영역 속에서 대결할 수밖에 없는 거죠.



박성용 ㅣ 저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까 교수님이 우리나라 건축가들 형태에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한다는 거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드는 생각이 그런 거랑 비슷한 거 같아요. 고등학교 때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이 “나는 공부 별로 안 해”였어요. 그래서 형태에 관심이 많은 건축가가 형태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형태에 엄청나게 집착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건축가가 자신이 엄청나게 관심 있는 것과 대외적으로 이렇게 표출해야 하는, 어필하는 메시지 사이에 괴리가 있어요.



김현석 ㅣ 건축가는 한 가지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문제를 하나 풀고 다른 문제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드렸던 거는, 사람을 다루려면 물질을 다루는 것보다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죠.



현명석 ㅣ 궁금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아까 주택이라고 하는 것이 실험의 대상이 되는 것이 과연 맞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오히려 저는 주택이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극단적일 수 있는데, 집이 어느 정도 기능을 하면 사람이 거기에 적응해서 산다고 생각해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근데 집이라는 것이 실험하면 안 된다는 것은 집을 너무 강박적으로 다루는 게 아닌가. 오히려 집이라는 것은 굉장히 프라이빗한 공간이기 때문에, 거기 사는 사람이 아까 말씀하신 대로 그 주어지면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바꿔서 살 수가 있잖아요. 적응 가능한 개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집이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집과 다른 공적인 건물들은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측면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그거를 다르게 생각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어요.



박창현 ㅣ 저는 그 이야기에 관전히 공감하고요. 저희한테 의뢰 들어오는 클라이언트의 성향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원해서 오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패션디자이너 등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에요. 왜냐. 그 사람들은 아파트가 싫고 새로운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욕구가 엄청나게 크거든요. 저희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이거는 어떻게 해서 지어졌어. 이거는 어떤 스토리가 있어, 이거는 어떤 특징과 장점이 있어.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대부분 그거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요.



현명석 ㅣ 저는 이번호 주제가 집이라고 주어졌을 때,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궁금했어요. 나만 이상한가? 왜 다들 집은 실험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의아했어요. 근데 제가 생각하는 실험에 대한 것이 왜 문제냐면, 지금 케이스처럼 그 짓고자 하는 사람이 자기가 실험을 하고 싶은 경우는 그게 맞을 수도 있어요. 자기가 도전적인 삶을 살고 싶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건축가가 실험을 할 때 그 실험결과에 대해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이렇게 하면 이게 좋을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주택은 어차피 굉장히 프라이빗한 공간이잖아요.



박영태 ㅣ 박창현 소장님, 확신을 가졌어요? 그 가변성 안에서 나름의 고정점과 누빔점을 만들어가면서 자기네들이 매뉴얼을 만들어서 거주하는 법을 어떻게든 성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못 가져요, 그거는. 저는 한편으로는 주제에 대해 엄청나게 고민했어요. 아까 김현석 소장님도 고민해서 결국은 유럽식 농가였는데, 지금의 내가 비평가로서, 건축가로서, 어떤 집을 지을 때 뭐가 가장 중요한 거에 대한 생각을 엄청나게 했을 거거든요. 결국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건강성, 긍정성에 입각한 기억으로 회고해 버린 건데, 그거에 대한 자각 윤리에 대한 생각을 엄청나게 했어요. 나는 뭘까. 내가 집을 짓는다면 사실 집이 필요 없는데.. 똑같았어요. 내가 내 집을 지을 생각은 없고, 누군가 지어준다면 거기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런데도 내가 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 나라는 개인, 학교 선생, 혼자 사는 등 그거에 대한 경제적 기반을 다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럴 때 집에 대한 가치를 담은 답을 얻 어 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각자 커스터마이징한 삶이 있을 거고, 사연이 있을 거고, 에피소드가 있을 거고, 정념과 이성이 다 있을 텐데, 결론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런 부분에서 저는 모르겠어요, 과정과 실제로 집을, 삶을 살아가는 그 과정에서 현지화 된 건축적인 이슈를 놓고 볼 때, 현대인들이 박 소장님 나름의 그 프로그램이 있는 최소한의 주방과 이런 것들이 고정점이 있다고 봤어요. 그 안에서 나름의 삶에 대한 것들을 모색하겠지. 답이 나오든 안 나오든. 실험에 대해 어떤 의미를 두고 의의를 두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 차원에서 저런 시도와 이러저러한 것들에 대한 거를, 인간과 관계, 건축과 관계로 두어서 다 의미 없다고 한다면.



이종건 ㅣ 사실 실험이라는 말은 정확한 용어가 아니에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그냥 살아보는 건데, 결과가 좋으면 그렇게 살아보자고 짓는 거예요. 그거는 실험도 아니고. 때마다 지혜를 모아가며 살아가는 것이죠. 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건축가가 지어주는 디자인이라는 게 그렇죠. 그런데 내 집은 그게 아닐 거란 말이죠. 나는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하는 게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김현석 ㅣ 극단적인 거 같아요. 건축가는 정말 자신을 실험에 던지는 사람도 있고, 아예 던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는 거 같아요. 르코르뷔지에가 마지막에 조그만 자기 집에서 살았잖아요. 자기가 살고 싶은 집은 그런 걸 수도 있고.



이종건 ㅣ 르코르뷔지에의 카바농은 살림집이라고 할 수 없죠. 썸머하우스에 부엌이 없는 그걸 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죠.



김호중 ㅣ 그걸 자기가 만들지 않고 건축가한테 맡기잖아요. 그러면 비유를 들고 싶은 게, 좋은 미용실에 가서 그냥 알아서 해달라고 하거든요. 이제 그러면 머리의 스타일에 대한 책임이 미용사한테 가는 거죠. 당연히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크레이터든 아니면 뭐 시골에 살던 사람이든, 어떤 건축가를 선택했을 때 그 건축가의 안목을 믿고 돈을 주고 일임하는 거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수준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박성용 ㅣ 저는 이 주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이것이 옳고 그른 거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건축가로서 그 방향으로 포지션을 잡았을 때, 이게 전략적으로 유리한지 않은지 우리가 판단해 볼 수 있는데, 저는 불리하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그 방향으로 가면 건축과 사회과학과의 경계를 넘어갈 수 있을 텐데, 그랬을 때 건축가들이 사회과학자들을 이길 수 있느냐? 저는 굉장히 불리하다고 생각해요.



박영태 ㅣ 그거랑 박창현 소장님이 하는 거랑 접근이 다른데요. 그 질료 덩어리가 아니고 대단히 형식과 형상과 감각과 박창현의 고유성을 갖고 덤비는 거기 때문에.



현명석 ㅣ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 박창현 소장의 양평 집에서 보이는 그런 섬세함 같은 것들이 사회과학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잖아요.



박성용 ㅣ  그런데 그것이 어차피 학문의 영역으로 가고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하는데, 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사회과학을 이길 수 없는 거죠.



김영철 ㅣ 저는 동의하지 않는데요. 왜냐하면, 아마도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그 프로젝트를 보면 아마 굉장한 관심을 두고 이런 조건으로는 어떤 사회라는 개념이 성립하거나 사회적 현상이 드러나는지.



이종건 ㅣ 이런 이야기인 거 같아요. 생태 심리학이건 어떤 심리학이건 굉장히 잘 알아요. 건축가가 이렇게 하면 어떤 감정을 가질 건가, 해보는 거예요. 심리학이 가르쳐 준 것을 가지고 와서 건축가가 해야 할 건축적인 승부를 거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거지요. 이제 인간의 행태를 건축 공간으로 이렇게 해보겠다면, 그게 정말로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했을 때 행태심리학을 이길 수 있는가. 입증을 해낼 수 있고. 그런데 모르겠다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김호중 ㅣ 방향이 다를 것 같아요. 각 개인이 무언가를 짓고 건축가가, 미술가가 뭔가 작품을 만들어요. 샘플링을 해서 하는 건 크리틱이고 미술사가가 되는 거예요. 건축가가 그런 작업의 실험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만들어 가는 것이, 아까 이야기했지만, 사회학자들이 보고 샘플로 해서 하거나 그게 오고 가면서 역사가 생기는 것이지, 건축가의 감각으로 이쪽에 관심을 가지고 그 언어를 행해본다는 게 가치가 없다는 것은 이상한 것 같아요.



김영철 ㅣ 저는 그 생각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이 건축이 주거 규칙을 선정해서 규정을 해놓는 일은, 결국은 누군가가 되더라도 삶을 위한 거거든요. 삶은 또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 뭔가가 아니잖아요. 그 자체로 고유한 무엇인데, 고유한 것으로 자체를 책임지는 게 건축이에요. 근데 사회학은 그것의 일부일 수밖에 없어요.



이종건 ㅣ 건축가가 책임진다는 것도 좀 어색하거나 이상한 표현인데..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어요. 책임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무거운 단어인 것 같고 건축이 무슨 책임을 져요.



김영철 ㅣ 건축가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 집이 지어지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나 관계하는 무엇은 그 구도에 맞물릴 수밖에 없어요. 이거는 숙명이에요. 그게 아니면 다른 집에 살게 되겠죠. 근데 그 집에 들어서는 사람들, 들어서는 물건조차도, 미리 선정해 놓은 삶의 구도에 중요하게 맞물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러면 그 안에 있는 그 사람이나 물건은 그 집의 무엇이어서 그대로 규정하는 것이 이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는데도 이렇게 기계적으로 되느냐? 아니에요.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고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나 이런 것들이 시시각각 나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고 그렇기 때문에 무한수라는 거죠. 그런데도 그 전체는 그 집의 지어놓은 틀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이종건 ㅣ 박창현 소장이든 누구든, 한 건축가의 작업은 전무후무한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해요. 항상 어떤 것의 선례들이 있어요. 선례들에서 어떤 가치를 읽어내고 어떻게 수정해서 밀고 나가느냐. 난 이것이 건축적인 정도라고 생각해요. 건축이라는 디시플린 안에, 건축 역사 속에 나타나는 어떤. 박 소장 작업의 선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플렉시블 스페이스’죠. 확정적이지 않은 공간이라는 개념이 이미 있단 말이에요. 많은 작업도 있고. 그렇다면 박 소장의 공간은 그러한 선례들과 무엇이 다른가? 또는 그것과 맞물려, 인간에 대한 전망의 무엇이 다른가? 왜 다른가? 어떤 지점이 다른가? 이것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냥 밀고 나가는 거고 정확한 방향도 없이. 또는 예술관도 없이 그냥 나가는 건데. 그런 식의 작업은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저런 방식이 있는데 후회할 수 있다는 거죠. 깊은 통찰이 없고 그것보다 크게 조망할 눈이 없으니까 실수를 할 공산이 커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깨달은 자가 늘 필요한 거죠. 삶이 무엇이냐 물으면 깨달은 자가 대답하죠. 석가모니의 대답을 우리는 틀렸다고 하지 않잖아요. 그런 통찰에 근거해 인간을 조망해야죠. 그것 없이 이렇게 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이상하다고밖에 할 수 없죠. 그래서 ‘플렉시블 스페이스’는 정말 삶을 플렉시블 하게 하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게 건축적으로 계속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하고, 그런 방식으로 생각을 한 켜 더 깊이해가며 하는 작업, 거기서 비롯되는 고민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계속 맴돌죠. 오래전 김주령이라는 건축가가 가정폭력이라는 주제로 경기대대학원 스튜디오를 맡아 진행한 적이 있는데, 기본적인 전제는 이거였어요. 공간을 어떻게 지으면 가정 폭력이 없어지거나 줄어든다. 그래서 제가 그건 말이 안 된다.그러한 문제는 공간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축적으로 가치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없다고 얘기했어요. 예를 들자면, 벽의 변화로 가정 폭력이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는 없다. 인간이란 그렇게 건물 혹은 건축의 형식에 구속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집을 실험하지 말자는 말은 그런 뜻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없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을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의 삶을 잘 모르겠거든, 검증된 것에서 조심스럽게 약간 더 들어가자. 집을 이리저리 뒤집는 거는 부질없다, 이게 아돌프 로스의 교훈 아니에요? 나는 이 지점에서 건축적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오늘날은 아돌프 로스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선각자의 통찰이나 선례도 없이 계속 한다면, 그건 헛바퀴 도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그렇게 헛돌면 우리가 배우는 게 없어요.



안상수 ㅣ 저는 여기 있는 건물이 중심이 분명한 원과 같은 형식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양평 집은 중심이 두 개인 타원과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타원이 입체적으로 여러 개의 타원으로 만들어져서 겹쳐지거나 비누 거품이 겹쳐져 있는 형태로 가변성을 갖고 있고, 두 개의 중심점도 이동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그게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애를 써도 좀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게, 지금 거기 뒤에 부지에 적용한다고 잔디를 심거나 했는데, 지난 3월에 해 놓고 5월에 가서 보니 원래 자랐던 갈대가 잔디밭으로 들어와서, 잔디를 심었기 때문에 갈대를 쳤더라고요. 그런데 갈대는 뿌리가 밑을 파고들어서 계속 들어올 거란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것처럼, 라이프스타일은 의도했던 대로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에요. 그래서 이제 그게 갈대하고 잔디의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고, 양평 집 같은 경우는, 이제 여기는 분명하게 프로그램을 명시했는데, 거기 같은 경우는 평면적으로 그 벽에 둘려있는 빈 곳에 사이즈를 표시하셨더라고요. 배치도에 그 도는 공간을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빈도로 좀 했으면 어땠겠냐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 장소에 대한 빈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벽이 가변적이잖아요. 그럼 가변성에 관해 설명하는 게, 사이즈로만 설명하는 게, 평면의 사이즈이기 때문에 입체 사이즈를 분명하게 지붕 구조라든가 이런 게 독특하기 때문에 입체적으로 보면 또 다를 텐데, 이걸 놓치지 않았나, 이게 설명이 덜 되지 않았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조경가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집에 배치를 잡을 때 분명히 차도에서 꺾어지면서 들어오는, 차가 들어오는 길이 분명하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보고 집의 배치를 한쪽은 막고 한쪽은 개방했잖아요. 그런데 그거는 의도적으로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는 이동하는 관찰자의 동선상의 파사드가 계속 변하는 것을 충분히 생각하고 하신 거 같은데, 실내에 들어갔을 때는 거기서부터 완전히 멀어지잖아요. 그래서 소리에 대한 거를 이제 분명히 생각하셨을 텐데, 소리가, 바닥 실내로 들어와 바닥을 밟는 소리, 시멘트 바닥을 밟는 소리, 그다음에 자갈을 스치고 들어오는 차의 바퀴 소리, 애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위에 올라와서 쿵쾅거리는 소리 등에 대한 표현이 좀 됐으면 그 집에 대해서 좀 입체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을까? 자료를 쭉 보다 보면, 했던 작업에 비해 표현하는 게 이걸 읽는 사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예 설정을 다르다고 생각하고, 아예 언어를 다르게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표현했으면 좀 좋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들거든요. 좀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도 길을 잃어버리는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그리고 김영철 선생님의 집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저는 돼지 시豕자보다 ,그게 분명히 돼지 시자 같긴 한데,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집은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장소다. 그래서 자기가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죽는 순간이 없어져 버리니까, 그거를 좀 가볍게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종건 ㅣ 현대 건축은 지붕이 없는, 지붕을 잃어버린 건축인데, 아까 말한 이런 것들은 지붕이 아니죠. 지붕을 대체할 만한 것도 없어요. 지붕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도 없고. 지붕이 없다는 이야기는 곧 땅도 없다는 거죠. 땅이 있지만, 땅이 아니야. 그러다 보니까 아까 말한 사물이라 부르지만, thing과 object 이 둘은 다르거든요. 사물thing은 하늘과 땅과 신과 필멸성을 지시하지만, 오브제는 그게 없는 거야.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것, 그래서 오브제라고 부르죠. 그런데 다시 좀 급진적으로 뒤틀어서, 사물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사물을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손의 촉감이 있으면 그것이 사물인가? 인체적 감각을 좀 더 더해주면 그 감각이 좋은 감각인가? 옛날에는 손으로 만든 게 다 좋다 했지만, 그것도 다시 되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안상수 ㅣ 그리고 이 건물을 짓기 전에 목련 나무가 있었다고 했잖아요. 목련이 있어서 사람들이 잠깐 머물고 갔다고 했고, 그래서 목련의 이미지를 건물의 파사드로 가지고 왔다고 했잖아요. 저는 거기서 더 들어가서, 목련에 대해서 더 스터디한 다음 파사드에 사용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양평 집도 원시성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사실 굉장히 원시성이 살아있는 구조잖아요. 여기서 목련은 벌이 지구에 등장하기 이전에 꽃을 피웠던 대표적인 나무거든요. 그래서 목련은 딱정벌레가 꽃을 수정시키는 역할을 했거든요. 벌은 지금으로 치면 최첨단 컴퓨터 같은 꽃가루를 수정시키는 존재인데. 목련은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하기 전부터 있었던 식물이거든요. 그러니까 굉장히 원시적인 거여서 위에 화분에 식물들을 배치했잖아요. 이거는 완벽한 이미지거든요.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죽게 되는데, 그게 불 보듯 뻔하거든요. 그걸 그렇게 풀지 말고 목련이라는 원시성이 있는 식물을 이해해서 그에 유사한 것들, 목련이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딱 한 가지거든요. 딱정벌레가 여전히 진화했기 때문에. 딱정벌레가 진화하지 않았으면 수정이 안 돼서 없어졌을 거 아니에요. 그 원래 주택에 있었던 목련이 진화해서 이렇게 된 것처럼, 그 집이 진화되는 과정에 또 뭔가 요소가 있을 거 아니에요. 집주인도 있을 거고 건축가도 있을 거고. 그런 거를 좀 풀어서 식물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이 건축에 대해 탁월한 부분은 빛에 대한, 아주 예리한 칼을 빠르게 움직여서 빛을 쪼갤 때 어떻게 쪼갤 수 있는지 그걸 다 보여주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루버를 쓰는 방식이 되게 다양하고, 그걸 표현하기 위해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양을 부딪쳐서 들어오는. 그리고 외벽에서 봤을 때 전체적으로 통일된 색감하고, 내부에서 느꼈을 때 목재에 대한 촉감 같은 것을 충분히 살린 것 같고,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난간 위에다가 모종을 심어서, 루버인데 노골적으로 예리하게 들어오는 게 아니고 부드럽게 다시 한 번 쪼개버리는 방식으로 모종을 쓴 건, 굉장히 잘한 것 같아요.



이종건 ㅣ 토론에 열이 붙어서 그런지, 우리도 모르게 정해둔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오늘은 아쉽지만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다음의 또 다른 기회가 오면 그때 다시 묵혔던 얘기를 다시 꺼내 보기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의 건축가 박창현 소장, 그리고 그의 근작답사와 대담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총총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