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oa건축사사무소_ 서재원


dialogue

박창현(박): 이야기가 좀 무거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건축에서의 윤리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려 합니다. 어디서부터 어디 까지를 윤리의 폭으로 한정 지어야 할지는 좀 모호하긴 하지만, 사회적인 윤리, 건축적인 윤리 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사회적 윤리라고 하면 설계비의 이슈라든지 혹은 사회에서 건축가가 지켜야 할 내용과 범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건축적 윤리라고 한다면 설계의 과정에서 어디까지 의식하고 설계를 할 것인지의 범위와 폭과 관련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물론 여기에는 경제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포함이 되어 있을 것이고, 설계비와 관련 지어지는 업역에 대한 범위도 포함될 수 있겠죠.


서재원(서): 저는 그것을 그렇게 정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 분류도 충분히 수긍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첫 번째 것은 사회적으로 한국 건축계가 앞으로 어떻게 시스템을 구축해 나갈 것이냐는 측면에서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설계비를 어떻게 받고, 또 어떻게 그만큼의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건 어찌 보면 건축가 개개인의 삶과 태도와 관련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달린 문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건축이 얼마나 윤리적이냐, 이를 건축물을 설계하는 행위가 제3자에게 제공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간적, 사회적, 혹은 경제적 배려와 그것들의 파급 효과 등의 많은 부분을 어느 정도 고려하는가 하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이 윤리적인지 아닌지 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윤리를 보는 관점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그 잣대가 굉장히 세다는 점입니다. 무언가를 판단할 때 윤리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경향이 큰 것이죠. 그래서 한국에서 생각하는 윤리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왜 그렇게 윤리적인 것을 판단하려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박: 건축에서의 윤리와 관련된 이슈가 지금 세대 내에서는 조금씩 이야기되고 의식하자는 발언들이 나오기 시작하긴 하지만, 반대로 실질적으로 학교에서 건축과 윤리에 관한 수업이라든지 그에 대해 최소한의 고민할 기회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교과 과정에 그 부분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사회에 나와서 실제로 설계를 하면서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건축 자체가 미술과는 다르게 ‘공공재’라는 점을 빼놓고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누구나 볼 수 있는 위치에 그것들이 지어짐과 동시에 사용자의 관점에서는 물론이며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공공재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니, 윤리라는 잣대가 필요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게다가 사회 내에서 작동하면 더 그렇겠죠. 물론 그것의 범위와 밀도에 대해서는 더 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건축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상 윤리적인 관점을 피할 수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 네 그렇죠.

박: 그래서 윤리적인 잣대의 과도함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건축 작업을 할 때 윤리적 관점에서 작업을 했던 순간이나 시도가 있었는지를 한번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무도 누군가에게 윤리적인 관점을 가지고 설계를 하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죠. 만약 학교의 건축법과 관련된 수업에서 윤리에 관한 언급을 한다고 하더라도, 법에 관련된 윤리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법규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개인은 그것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고, 결국은 법을 만드는 사람의 윤리에 포함되는 것이 아닐까요?


서: 그렇죠. 법을 만드는 사람의 취지에 윤리의 개념이 들어있다 하더라도, 사실 윤리가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죠.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윤리는 초등학교에서의 윤리책을 통해서나 배운 내용이고, 그 이후의 것들은 어찌 보면 common sense인 것 같습니다. 이때 그 common sense에서의 분쟁이 일어나는 부분을 법에서 규정하고 공공적인 규제를 하는 것이죠. 이는 최소한의 분쟁을 막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방어적인 입장을 띄면서 너무 과도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건축법을 다루는 수업시간에도 간혹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 외에는 딱히 윤리에 대한 중요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수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설계 수업시간에 크리틱에서는 윤리적 관점을 가질 때가 상당히 많다는 점입니다. 가령 어떤 학생이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설계를 해 왔을 때 어떤 선생님은, 물론 윤리적이지 않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더라도, 사용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것이 돈을 감당하고 만들 가치가 있는가, 불편하지는 않겠는가, 혹은 그 동네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등의 잣대를 대입하기도 합니다. 학생 본인은 ‘내가 볼 때는 불편하지 않고, 불편하다 하더라도 사용자가 앞으로 거기에 살면서 느낄 다른 감정들을 더 많이 생각하였다’라고 하더라도 선생님은 그것이 학생의 주관적인 생각이라며 동의를 하지 않곤 하죠. 이런 측면에서의 크리틱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런 잣대들에는 기본적으로 윤리적 관점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한국에서 보편적으로(commonly)가지고 있는 관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설계를 할 때 윤리를 생각하며 진행하냐고 한다면, 사실 엄청나게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죠. 저도 건물 자체의 결과는 태생적으로 공공성을 가지며 그것을 윤리적 관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건축을 만들어내는 건축가가 한 명의 작가라는 입장에서 설계라는 프로세스가 그렇게 윤리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박: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어떤 것에 대해서 배려하건, 의식하건, 혹은 그에 대해 존중할 수 있는 자세가 바탕에 깔려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가 강화되면서 점점 개인화가 이루어지고, 극도로 주관적인 입장에서 모든 것들이 이야기되곤 합니다. 주변에 대한 맥락이라든지 옆 집, 옆 사람들, 그런 것들이 말이죠. 그러다 보니 법적으로 무언가를 해결해 나가려고 하는데... 사실은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에 대한 의식과 배려들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자기 스스로에게 할 수 있죠.


서: 네 필요하죠.

박: 물론 그 정도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그 부분 자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인지하고 그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 네. 그런데 여기서 건축가 본인이 그 결과를 윤리적으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면...저는 거기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 윤리적인 것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어떤 게임의 한 factor로 보는 것이지 그 자체를 결과로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두는 건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박: 사실 건물 설계를 하면서 그 건물이 완성된 후 그 건물이 윤리적인가 아닌가를 판단하지는 않는 것이고,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어렵기는 하겠죠. 반대로, 계획을 할 때에 설계자가 ‘게임’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들을 개입시켜 설계에 영향을 미쳤는지가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게임’이라 하면 누군가는 그러한 조건들을 모두 무시할 수도 있지 않나요? 물론 게임의 룰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 룰 안에 주변의 상황과 같은 이슈들을 개입시킬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설계자가 할 수 있는 것인데, 저는 게임의 룰 안에 그 부분(윤리적 관점의 의식이나 의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결과물에도 윤리적인 생각 혹은 입장이 이미 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어렵겠지만요. 결국에 그것은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입장의 차이인 것 같은데, 저는 그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결과를 가지고 윤리적이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봐요. 과정에서 윤리적 의도를 가진 것의 결과물이 실제로 그러하지 않거나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서: 네. 그런 점도 무시할 수는 없죠. 우리가 보편적으로(commonly)이야기하는 관점에서, 주변에 혼자서만 엄청나게 튀는 집이 지어졌다고 하면, 저 또한 이를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고, 이때는 저도 그 common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건축물은 홀로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컨텍스트 안에 놓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나 노력이 보인다면 괜찮다고 할 수는 있죠. 그런 것이 아예 없다면 문제가 되겠지만요. 윤리를 게임에서의 factor로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따른다’고 말하죠. 하지만 저는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도 설계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윤리는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건축에서 쉽게 하나의 예를 든다면 context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컨텍스트를 이야기하는 것도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 때 그것을 따를 것인지, 혹은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컨텍스트를 만들 것인지의 측면에서 저는 후자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건축이 물론 공공성을 띄기는 하지만 공공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대단한 무언가를 한다는 입장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입니다. 이 때의 ‘누군가’는 불특정 다수죠. 창작 욕구가 있는데 제3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 가령, 나는 이 곳에 사과(apple)를 놓고 싶은데 이 곳은 사과가 아닌 바나나가 나는 곳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가장 비슷한 파인애플(pineapple)을 가져다 놓아야 하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건축가의 입장이죠. 제가 볼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factor가 존재하고 그것에 의해 건축이 조종되기도 하지만, 건축가는 여전히 여느 예술과 마찬가지로 답이 없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결정을 하고 결정적인 공간을 만들어낼 때에는 건축가의 주관이 엄청나게 개입되기 때문에 그것이 대단히 공공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건축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죠. 물론 거기에는 공공적인 생각들이 있지만 그것을 최종 목표로 두고 작업하는 것, 그 건물이 얼마나 공공성을 띄고 윤리적일 것인지를 두고 작업하는 것은 오히려 오만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물론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것의 목표가 윤리적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 작업하지는 않겠죠. 그렇다면 최소한의 윤리라고 하는 것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개입되어 왔는지, 그렇다면 그것들을 얼마만큼 개입시켜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고, 하고 있겠지만, 다른 이야기들을 계속 하다 보면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어쩌면 직접적인 조건들에 의해서 항상 뒤로 밀리는 것들이 앞서 이야기한 주변의 맥락이나 배려와 같은 것들이 아닐까 싶네요. 건물 안에서의 내용도 마찬가지겠죠. 그 부분들이 계속 소외되거나 없어지기도 하니까요.


서: 그럼 소장님은 자본주의에 의해 밀리곤 하는 그런 윤리적이고 컨텍스트적인 것들이 조금 더 앞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박: 앞으로 나와야 한다기보다는 그것들이 지금 우의 작업들, 한국의 상황들에 남아있는가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 저는 그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컨텍스트나 윤리 이야기는 그만 했으면 합니다. 그것은 외부의 조건이지, 내가 만든 내부의 조건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컨텍스트, 경제성, 자재 등의 외부 조건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너의 이야기를 해라’ 라는 생각, 내가 이것을 왜 만들었고, 여기에는 무엇들이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고 그것이 건축가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과를 놓겠다’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박: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지에 상관없이 말인가요?


서: 아니요.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박: 그럼 이제 건축에 있어서 ‘작가성’과 ‘비작가성’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 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성’과 ‘비작가성’을 이야기했는데요. 일본에서는 이전 버블 시대에 작가성이 너무 대두되다 보니 법과도 연계가 되어서 과잉의, 큰 제스처의 어떤 것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고, 그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건축가는 ‘특이한’ 것, 실생활과는 유리된 것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커져서 그에 반하는 비작가성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였죠. 자기의 속성이나 성격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작가들, 주변의 조건이나 컨텍스트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결과물에 넣어 설계를 해보겠다고 이야기하는 팀(미칸쿠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들이 크다고 봅니다. 다만 이는 그 당시 일본의 경제 사회적인 여러 상황과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의 상황은 어떠할까요?


서: 작가성의 결과 중 하나로 일본의 포스트모던을 생각하자면, 일본에서는 한때 그런 움직임이 많이 있었죠. 당시 일본의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할 때 생각나는 것은 형태와 재료, 특히 형태에 있어서 과도한 제스처가 있었습니다. 작가성의 결과라고 하였을 때는 형태도 있고 평면, 재료, 디테일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때의 일본에서는 그것들 중 한 두 가지를 주로 이야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럴 여력이 없죠. 그럼에도 건축가들은 그러한 것들을 많이 하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건축은 사회의 반영이며, 다른 사람의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기에 주관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주관의 표현인데, 그것을 큰 의미가 아닌 조금 다른 측면에서의 작가성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평면을 그릴 때 마징가제트 얼굴과도 같은 특이한 것들을 계속 넣는다든지(그것을 형태로 만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혹은 스탠리 타이거맨의 ‘핫도그 하우스‘와 같은 것들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고, 그 또한 작가성이지 않을까요? 작가성과 비작가성은 적절한 타협이 필요합니다. 일상적인 것과 만나는 부분에서 고도의 조율작업과 굉장한 intention이 필요하죠. 이런 점에서 다세대주택 프로젝트들을 저는 좋아합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프로젝트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의미가 아닌 일상성과의 접점 측면에서 작가성을 생각해 본다면 대단히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이것이 작가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작가성이라는 단어 사용의 범위가 어느 정도까지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작가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것과 일부는 맞물리기도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주거만 하더라도 오랫동안 획일적인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까요. 일반인들 또한 그에 대한 변화의 욕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저의 사무실에도 그러한 것들을 요구하며 의뢰해 오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획일적이지 않고 새로운 거주방식에 대한 욕구가 이미 사회에 많이 팽배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결국 작가성에 대한 비판의 원인은 건축가의 과도함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본의 경우 균형이 깨져서 지탄을 받은 것이지, 그 자체가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비판에 앞서서 한편으로 그것은 시대의 요구이기는 하니까요.


서: 그런데 저는 4.3그룹 이후의 우리 세대, 혹은 더 젊은 한국 건축가들에게서 작가성이라 할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 그 부분은 조금 더 들여다보고, 더 기다려볼 필요는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서: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더 이상은 물러설 때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왜 건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하는 것이며, ‘정리’가 아직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정리는 언제 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한국성, 한국 사람들의 성향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박: 그런데 누가 혼자 튀거나 잘나서 그런 것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통하기는 어려울 것 같기는 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미술이면 혼자 어떤 것을 하든 어떤 관심을 받든 상관이 없을 수 있겠지만, 건축은 어떤 관점에서는 서비스이고 그것이 사회와도 밀접하게 맞물려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토대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영향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는 있는 것이고요. 방향이나 강도, 관점이 다를 뿐이지 그것들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조금 정리되어서 펼쳐지기까지는 다들 아직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좀 아쉬운 것 같습니다. 정리할 기회는 필요하지만 그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는 않으니까요. 다른 인터뷰에서도 계속 던지던 질문이었지만 명확한 대답을 거의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것들은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드러낼 준비가 안 된 것들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반면 인터뷰했던 외국의 건축가들은 작은 것들부터 정리를 잘 해서 이슈화 시키고 그것들을 재생산해내는 과정을 많이 거치기도 하고, 그러한 영역들이 많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가 아직까지 그에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서: 소장님은 한국의 건축 잡지들을 자주 보시나요?

박: 몇몇 잡지들을 빼고는 자주 보지는 않는 것 같네요. 그게 2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서: 그렇군요. 저도 자주 보는 편은 아닙니다.

박: 그것들 말고도 볼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많아서 이지 않을까요?


서: 그렇다면 왜 한국 것들을, 한국의 작업들을 안보는 것일까요? 학교에서의 크리틱을 생각해 보더라도 학생들이 다른 이들의 최종 발표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죠. 결국 특별히 관심이 가는 주제이거나, 특정 사람의 결과물이기에 궁금해서 이거나 등의 이유로 보는 것이지, 모두의 것에 대해 궁금해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 논의를 건축계로 옮겨본다면, 각자가 서로에게서 더 이상 유효한 담론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관심이 없어지고 지친 것이고, 그래서 한국잡지를 많이 안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오히려 외국 잡지를 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서 저의 그 기계적인 답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니 이러한 이유들이 떠올랐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건축가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는 디지털과 종이매체에 관한 문제로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다른 이들의 개별적인 작업들에 대한 관심의 부족이 더 큰 이유라고 봅니다. 내용이 없어서 라기보다는 어찌 보면 뻔 한 것들, 어떤 프로젝트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들이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박: 네, 사실 저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만 보고 있긴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일부는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결국 자신의 성향이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건축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죠?


서: 네 맞습니다. 물론 윤리적 관점도 있어야 하겠죠. 자신만이 옳다는 관점이 아닌. 그러한 솔직한 이야기들이 더 대중화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박: 공감합니다. 또한 이야기의 폭이 더 넓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건축가들의 각자의 관점이 어떤 면에서는 너무 겹친다고 생각됩니다. 미디어에서 쉽게 생산된 이미지들을 보고 재생산되면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 사회적인 환경 때문이기도 할 테고요. 그리고 생각을 더 깊게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사진이나 도면보다 글이 더 중요하지만 사람들은 더욱더 글을 안 읽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격’들이 더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서: 좀 더 ‘변태적’인 이야기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틀린 이야기이더라도 말이죠. 가령 어떤 철제 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디테일이 어떻다 어떤 재료가 좋다는 이야기보다는 거기에 의도된 의미 같은 다른 것들, 그리고 문 이외에 다른 것 들과의 연관관계 등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고요. 뻔 한 이야기에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하면 당연히 호기심이 가지 않을까요? 작가라는 관점에서 건축가는 누구나 하고 싶은 것들이 속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박: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욕심이나 에고를 가지고 자신의 것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고 그에 저도 공감을 합니다. 다시 윤리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 때 기본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돈과 시간입니다. 개인이 고민하는 시간과 돈은 계약 시 설계비와 연관되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공사비와 연관되는 것인데, 그 과정들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들을 위해 수반되는 노력이 필요할까요? 적은 설계비를 받았을 경우에도 불구하고요?


서: 네 저는 그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작가성을 드러내는 방법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하는 프로젝트에서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은 부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다른 부분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형태적인 측면에서, 쓸모가 없는 가벽 하나를 만드는 것이라도 거기에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가 있다면, 그 또한 자신의 생각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박: 누군가는 저에게 이렇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왜 설계비나 시공비 혹은 건물의 실제 조건상에서의 제한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런 것들을 설계에 투입하려 노력하는 것인가, 오히려 설계비를 더 받거나 공사금액에 맞춘 디테일이나 내용으로 풀어주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저는 물론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하고 싶은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부분에서는 힘든 것도 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결과나 변화를 위해 조금 참아가면서 하는 것도 있죠.


서: 그렇죠. 참아가면서 하는 것이죠...

박: 사실 그런 관점에서 나 스스로가 윤리적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요.


서: 네 그런 태도는 윤리적 관점에서 충분히 생각해 볼만 한 것 같아요. 프로젝트의 종류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설계비에는 한계가 있고, 거기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시도하는 것은 건축주의 입장에서는 돈의 문제이고, 그것을 원하고 찾아오는 건축주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죠.

박: 그렇다면 다시 ‘한국성’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앞서 한국인들의 성향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도 했는데요. 한국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어느 관점이 한국성이 보이는 지점이라고 생각하시는가요? 결국은 한국이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변별성이 아닐까요?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보자면, 작가가 개인의 작가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작가들은 한국성을 드러내야 하고, 미국은 미국성을, 일본은 일본성을 드러내는 것이죠. 한국에서도 한국 사람들이라는 개체의 경향성이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한국‘성’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은 정리된 어떤 학문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한국은 상황 자체가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성’이라는 말로 이론화하는 것은 아직까지 모든 세대가 어려워했던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너무나 다방면적이고 분열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개체의 성향이 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찾고 싶다고는 생각합니다.

박: 지금의 시점에서 그러한 질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4.3그룹 때만 하더라도 한국성과 전통에 관련된 담론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 나갔는데, 그 당시 그 사람들은 그것을 왜 찾으려 하였으며, 그 이후 지금은 그러한 질문들이 얼마나 나오고 있을까요?


서: 거의 없지 않을까요?

박: 제가 외국의 몇몇 건축가들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전시를 위해 자신의 것들을 연대별로 나누어 한데 묶어서 이야기해 내기는 하지만, 작업을 할 때 일본성이라는 것을 만들려고 하거나, 그것을 의식하고 작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였습니다. 포르투갈에 가서 그들에게 그들만의 색이라고 보여 지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들은 포르투갈의 건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굳이 따져서 이야기하자면 자신들의 결과물은 유럽(EU)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든 로마에서든 그 영역 안에서의 경계는 없기 때문에 로컬리즘이라는 범위에서의 의식은 지금으로서는 거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국성이라는 단어를 지금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 글쎄요...이미 가진 자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아닐 지도요...어쨌든 권력의 문제를 떠나서 한국사람들의 의식구조와 태도는 유럽은 물론 중국, 일본과도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이전 세대가 한국의 전통에서 내재된 미를 찾아내려고 하였다면 저는 근현대 한국에서 보여지는 조울증적 현상들이 건축과 어떠한 관계로 나타나는 지에 관심을 좀 더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박: 그렇군요. 각자가 해석하는 한국성에 대한 관점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에너지가 표출되는 지점이 묘하게 한국성과 연결되는 부분도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됩니다. 서재원 소장님과 2014년에 이야기하고 5년 만에 다시 이야기하면서 많은 부분 공감하고 느낍니다. 앞으로 5년 후에 다시 만나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2019년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