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難草), 식물난민
개망초, 바랭이, 방가지똥, 달개비, 무릇, 양지꽃, 쇠뜨기, 애기똥풀, 괭이밥, 질경이, 민들레, 강아지풀, 개구리밥, 마름…
이제 이 풀들을 낱낱으로 호명하는 일은 드물어졌고, 그들 하나하나를
소환하여 안부를 묻지도 않는다. 개개의 이름이 소멸된 자리에서 잡초가 자랐고, 다시 그 자리에는 고층빌딩이 들어선다. 이 풀들이 어깨동무하고 뻗어나가던
자리에는 아스팔트가 깔렸다. 도시화에 밀려난 풀들은 바람에 자신의 척후를 보냈지만 생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어디든 그들을 환대할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길 떠난 척후는 난민이
되었고 도시에서 사라졌다. 그렇다. 눈길 닿는 곳에 그들은
없다. 우리가 난민을 애써 찾아보지 않듯 난초에 눈길을 줄 까닭은 없다. 하지만 여기 도시, 갈라진 아스팔트 틈, 이빨 빠진 보도블록 사이, 옹벽의 벌어진 틈, 잘 가꾸어진 화단의 응달에 그것들은 뿌리를 내렸고 아무도 환대하지 않지만 꽃을 피웠다.
‘난초(難草), 식물난민’은 난민과 같은 처지가 되어버린 풀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다. 난민이
그러하듯 정착지를 확인하고, 난초 하나하나에 이름을 돌려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더 전복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터뷰어: 이번 전시 작업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난민이 주제인데, 이것을 식물로 풀었다.
정성훈: 박창현 소장이 처음 같이 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간 난민에 대해 고민한 적도 없고, 아는 것도 지면이나 방송을
통한 것뿐이어서 과연 작업을 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준비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인데, 그래도 일단 시도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많이 헤맸다. 여러 기사와 자료들을 뒤적거려봐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건축과 협업해야 하기도 했고. 우리나라가 난민을 받아들이는 비율도 다른 OECD 국가와 비교해 매우 부족하지 않나. 그래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도시를 다니며 풀 사진을 찍어왔다. 그런데 그것이 난민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잡초가 ‘난초’가 되었다. 이 생각을 박창현·이수학
소장에게 제안했더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었다. 도시 안에서 어떻게 풀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을지, 풀이 인간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 좋겠다 싶었다. 도시 안에서 서로 다른 민족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양보하는 것 말이다.
박창현: 전시 부제는 ‘건축적
제안들’이었지만, 작품의 중심이 건축이 되어 물리적으로 무엇을
제안하기보다는, 그 반대의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시 안에서 잡초들이 퍼져나가는 방식이 실제로 난민이 우리 사회에서 정착하는 과정과 은유적으로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식물에 빗대어 난민의 시선을 보여주고 해결책을 이야기해보고자 했다.
정성훈: 작업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현실에서 실제 난민을 만나기도 어렵고 난민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조경에서도 사람들이 흔히 잡초라고 칭하지만, 그것들에는
낱낱이 이름이 있고 자연과 생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몰라서 그렇게 부를 뿐이다. 잡초라고 불리던 것들이 지닌 소중함을 일깨우고 무명으로 취급 받는 것들에 이름을 돌려주는 작업이, 우리가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주고, 난민에 대한 생각도
바꾸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뷰어: 아르코미술관이 있는 동숭동을 대상으로 했다.
박창현: 미술관 주변을 직접 현장 조사한 내용을, 지도 위에 또 다른 레이어로 겹치는 작업을 했다. 보도블록 틈, 아스팔트 사이의 잡초들을 사진으로 찍어 원래의 이름을 찾아줄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것들이 더 자연스럽게 도시에 스며들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 우리의 건축적 제안이다.
이수학: 전시장에 잡초를 그리기도 하고 그림이나 사진, 구조물을 계속해서 덧붙이는 방식으로 설치할 예정이다. 지금 명륜동이나
아르코미술관 주변을 조사 중인데, 통행이 너무 많아 잡초에게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사람이 오가는 빈도에 따라 풀들의 생태 영역도 차이가 날 것 같다. 삼선교
쪽으로만 가도 풀이 훨씬 많아진다.
인터뷰어: 이번 작업을 통해 난민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게 있는가.
정성훈: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천국으로의 70마일』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로 망명·이주를 하는 내용의 책이었다. 이 프로젝트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자국을 떠나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해보는 등 난민에 대한 관점에
변화가 있었다. 이외에도 베트남 난민이 대구의 한 수용소에 거의 30년
걸려 정착했다는 일화도 들었고, 난민수용소를 떠나게 되는 과정도 알게 되었다. 그들을 우리나라의 국민으로 인정해주는 경우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 한국이라는
나라가 왜 그렇게 배타적인지 생각해봤다. 북한에서 온 이들도 여기에 정착하는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들 또한 외국에 연고지가 없으면 이민이나 입국조차 어렵더라. 이를
통해 사회학·경제학·생물학적으로 난민의 범주를 넓게 보면서
나도 ‘설계 난민’일 수 있는데, 했다. (웃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였던 것 같다.
박창현: 전시를 준비하며 난민 기사를 많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이해의 폭도 좁을 수밖에 없었다.
뉴스에서는 폭동·테러 등과 연결 짓거나 잠재적 범죄자로서 인식하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밀어내야 하는 대상, 양립하고 공존하기 어려운 부류로 만든다는
느낌이다. 실제로 서구에서도 난민과 관련해서 많은 고민이 있는 것으로 안다. 단기적으로 캠프를 만들어 수용소와 같은 시설을 제공하는데, 이것은
장기적으로는 고립을 초래해 좋은 해결방안은 아닌 것 같다. 1960~7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흑인과
백인을 완전히 분리했는데, 지금 난민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리하고 이탈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난민문제를
어떻게 이해해나가야 할 것인가’가 이번 전시의 고민이고, 도시
속 식물들, 잡초들이 퍼져나가는 방식을 통해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했다.
이수학: 설계 일을 하다 보면, 외부에서
들어온 것 외에 자체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우리의 장소·부지·땅·사이트가 우리의
삶과 얼마나 완전하게 밀착되어 있는지를 절실히 느낀다. 그곳을 벗어나면 삶이 어떻게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우리 안에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지 않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조건들이 존재하고, 특히 여럿이 같이 살 때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 펼쳐지는 것 같다. 전혀 다른 삶, 전혀 다른 사회
구성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정주인으로서 너무 깊이 정착하고 있어 못 느끼나 싶었다. 난민 혹은 그와 같은
정주하지 못하는 삶이 예전보다 좀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인터뷰어 박성태, 오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