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아키텍톤_ 우지현, 차상훈, 최영준
대구에 대한 시선
박창현(박): 일본의 경우
동경이나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뿐만 아니라 일본의 다양한 지역 건축가들도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역 건축가들이 동경이나 오사카로 가서 활동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일들이
거의 의식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국은 아직까지 활발하게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구라는 지역에서 건축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지역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로서 이 지역의 상황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듣고 싶습니다.
최영준(최): 오래 전부터 어떤 도시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했었습니다. 대구를 선택한 이유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대구를 사랑해서입니다. 저희 세 사람은 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대구에서 학교를 나왔습니다. 저랑 우지현 소장님은 같은 학교, 그리고 차상훈 소장님은 공업고등학교를 나와서 전문대학을 나왔고요. 대부분의 시간을 대구에서 보냈기 때문에, 대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합니다. 하지만 한 도시에 뿌리를 내리는, 그 중요한 선택을 그렇게 단순히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와 우지현 소장은 서울에서 실무 경험을, 공부는 네덜란드에서, 심지어 우지현 소장은 네덜란드 OMA에서 실무를 2년 더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에서 사무실을 하는 이유는, 저희 나름의 전략적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건물이 땅 위에 지어지는 것은 불변입니다. 건물을 짓는 비용은 결국 토지 가격과 건축비의 합산인데, 독특한 공법의 건축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건축비는 결국 비슷합니다. 결국 토지 가격이 가장 중요한데, 서울과 지역의 가격이 10배 이상 차이가 나요. 그래서 우리는 지역이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희는 주변의 컨텍스트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건축 설계를 하기 때문에 건물이 지어지는 도시 그 자체, 도시 안의 작은 마을, 그 속의 작은 골목길 같은 주변 환경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희가 30년 가까이 생활해오며 이해하고 있는 이 지역이 가장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박: 실제로 두 분의 경우 외국에서 생활을 하고 다시 귀국한 상황인데, 반대로 여기 대구에 그 자리 계속 있었던 경우는 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익숙하기
때문에 다른 곳과 이 곳의 어떤 부분이 다른지에 대해 찾아내기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차상훈 소장님은
계속 대구에 계셨기에 기간이 얼마나 됐든 외국에 있다가 다시 대구에 돌아오신 최영준, 우지현 소장님과는
다른 시선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차상훈(차): 저는 실무를 대구에서 한지 13년 정도, 다른 두 분보다 먼저 졸업을 하고 군에 다녀와서 취업을 했습니다. 이런 제가 느끼는 점은 회사에 오는 일들의 스타일이나 방법들이 너무 똑같고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10년 넘도록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접했던 일과 나중에 접했던 일들이 주거에서는 원룸과 아파트, 그 속에 다른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음에도 계속 반복적인 일들 만을 했었죠. 해외에 다녀온 친구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크게 변한 것은 결국 아파트 높이만 높아진 것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 7년 정도 타지 생활을 한 후 객관적인 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자의 시선을 조금 견지하기도 한 것 같아요. 저희가 귀국한 2011년도의 상황이 경제적으로 다들 어렵다는 거예요. 서울을 단시간에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다 보니 고급 기술의 소비 행태를 가진 분들은 서울을 많이 가시더라고요. 더욱이 건축에 관련된 좋은 일들에 대해서는 소비자가 서울을 찾아가 버리니까 더 심했어요. 심지어 소비자들은 지역에 있고 서울의 건축가를 불러오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죠. 저희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그런 것들에 대해 잘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들 때문에 대구에 계셨던 분들이 어렵다 어렵다 하셨어요. 하지만 저희는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실제로 와서 부딪혀 보니 그 틈에서 오히려 기회와 가능성들을 많이 찾았습니다. 이 사무실의 위치와 건물을 정한 이유도 어려운 경기 속 임대가 되지 않아 비어 있는, 그래서 임대료가 월 25만원의 저렴한 가격에 5년 장기계약을 했습니다. 그런 건물들이 대구 도심에 굉장히 많았어요. 그렇게 생긴 기회비용을 이 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는데 과감히 비용을 지출했고, 이런 것들이 저희의 선순환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첫 출발이 되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주변 상황이 어려웠다는 것이죠. 그리고 좋은 정보라든지, 교류, 공론의 장이 일어났을 때, 교통수단의 발전, 그리고 통신수단의 발전으로 그런 것에 참여하기가 더욱 수월해진 거죠. 서울에 있어야 된다고 하는 장점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좋은 여건이라고 생각이 돼요.
우지현(우): 저도 마찬가지로 타지 생활을 계기로 객관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시선에서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 서울과 외국에서 실무를 하면서 꼭 한국과 외국, 나의 고향과 그렇지 않은 곳, 이런 것을 떠나서, 건축가는 결국 본인의 것을 창조하려고 하고 창조된 것이 남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세계 어디서나. 귀국해서 봤을 때, 밀도가 높은 서울에서는 더욱 그런 식으로 작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대구는 템포도 늦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완결되지 못한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천천히 자신만의 건축을 찾아가면서 깊숙이, 오롯이 건축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장소이기도 한 것 같아요. 서울과 같은 경쟁이 심한, 밀도가 높은 곳에서 작업을 시작했다면,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없었을 것 같아요.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여기가 지역이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점은 저희가 여기서 몇 십 년 살았고, 그래서 저희 지역에서 알고 있었던 사람들, 특히 시공 관련하여, 작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시간은 조금 더딜지라도 완성도를 만드는 단계에서는 저희한테는 훨씬 더 유리했던 조건인 것 같아요. 장소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박: 지금 이야기하신 것들, 전반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것들 중 하나인데, 서울에 있는 젊은 친구들을 인터뷰하다 보니 느꼈던 것이 '초조함' 이었어요. 경쟁
때문에. 그리고 경제적으로 힘들다 보니 빨리 안정적으로 되어야겠다는 마음의 초조함이 실제 인터뷰에서도, 그리고 작업에서도 나타났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은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빨리빨리 뭔가를 해내야지' 라는 생각은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거기에 따른 문제들이 생기고, 갈등도 생길 수 있죠. 그와는 반대로 현재 이 지역의 물리적인 상황과 시간, 확보할 수
있는 상황과 장점을 충분히 잘 읽고 진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 말씀하신 상황에 대해 지역은 굉장히 자유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종건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생존주의 건축에 굉장히 공감합니다. 경쟁이 치열하다기 보다는, 사람이 많은 곳에 계시는 분들은 자기를 드러내는데 굉장히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세계의 건축 거장들에게 볼 수 있다시피, 초기의 작업들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수도권 건축가들은 자기를 드러내는데 시간을 많이 들이는 것이, 너무나 눈에 많이 보였습니다. 잡지로 노출시키려는 노력들뿐만 아니라 SNS상 활동들. 놀라워요. '저분들이 그런 시간이 다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죠. 실제 설계하고 직접 시공하고 실시간으로 사진을 찍으며 기록으로 남기는, 그런 시간들이 충분할까요? 좌담, 모임, 건축계 활동 다 하시면서... 그리고 이 지역의 또 다른 장점은. 가만히 있어도 잘 드러날 수 있거든요. (웃음)
박: 인터뷰 전에 프로젝트들을 한 번씩 다 봤는데, 보고 느낀 점은, 굉장히 시간을 들여서 섬세한 결과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섬세하고 세세하게 작업 진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우: 섬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이 많으니까(웃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할애할 좋은 기회를 이 지역에서 사무실을 오픈 함으로써 얻은 거죠. 설계기간이 다른 사무실보다 길다는 점을 저희는 자부하기도 합니다. (웃음)
박: 그런 부분은 장점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수도권에서는, 시간을 충분히 들여 설계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의해 이렇게 됐다고 이야기하면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지금 이야기하셨던 시간과 작업을 잘 연계해서 이끌어 나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건축 환경
박: ‘오피스아키텍톤’에서는
최근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구의 다른 분들 역시 리노베이션 작업이 많은가요? 아니면 ‘오피스아키텍톤’ 만의
상황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최: 대구에서 리노베이션 작업의 기회는 많이 없습니다. 심지어 대구의 리노베이션 작업 조차도 서울에서 와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만의 상황이라 생각되어지기도 하네요.
우: 그 이유는 수도권과 지역의 열 배 넘는 땅값의 차이가 있어 굳이 안 고치세요. 부수고 다시 지으시거든요. 그에 따른 시간, 자본의 손실이 적거든요. 그리고 또 서울만큼 신축 작업이 진행되지도 않고요.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의 개수가 적기도 하고, 거기다 굳이 리노베이션을 택하지 않는 분들이 많죠.
박: 지금 작업하셨던 것들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인가요? 북성로와 그 주변은 오래된 건물들이 많고, 중구는 그런 것들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 것들과 이 사무실의 위치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리노베이션 작업들이 이 동네의 특수한 환경인 것으로 한정될 수 있나요?
최: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동네건축가를 지향하지는 않고요. (웃음) 한국에서는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곳이 부산이라고 생각하는데, 부산은 역사가 100년 정도밖에 안됐거든요. 대구는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서울과 평양과 함께 견주는 고도시입니다. 역사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이기도 하고, 한국전쟁에서 피해를 안 받은 도시이다 보니 건축 자산이 많을 수밖에 없는 도시예요. 또 저희 사무실 같은 건물도 그렇습니다만 일제 강점기 건물인데, 일제 강점기 시절 가장 번화했던 도시이기도 하죠. 그 당시만 해도 대구는 글로벌 도시의 반열에 올라 있었습니다. 한 예로 대구의학전문학교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만들었던 3개의 근대 의과대학 중 하나이고요. 저 학교를 졸업하면 일본 식민지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의사 면허를 줬어요. 그러다 보니 이 학교의 입학 시험을 칠 때 당시 대구 도시 인구가 3만이 조금 넘었는데, 시험을 치러오는 학생만 만 명이 넘었으니까. 굉장히 세계화된 도시였어요. 저희가 생각하는 대구는 낙후된 도시, 침체되어가는 도시가 아니라, 오랜 시간의 켜가 녹아져 있는 고도시라 생각하고, 물리적인 건축 자산뿐만 아니라, 비물리적 수준도 분명히 높다고 생각해요. 지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건축사 수가 부산보다 대구가 더 많거든요. 일이 많다는 거예요. 클라이언트도 굉장히 많고. 서울 강남에 땅부자들의 절반이 대구경북 출신이라는 말이 있어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상당히 많은 기업들이 대구에서 서울로 진출했어요. 이름만 대면 아는 회사들의 고향이 대부분 대구인 것들이 많죠. 삼성 역시 그렇고요. 지금도 자존심을 가지고 기술 개발에 힘쓰는 회사 중에 대구에 근거지를 두는 회사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총체적인 건축 자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리노베이션이라는 것도 껍데기만 바꾸는 게 아니라면, 물리적인 것들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 물리적인 요소도 많이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자산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자산도 상당한 대구는 그래서 굉장히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하고요. 한 예로 단위행정구역에 가장 한옥이 많은 도시가 서울이 아닌 대구인 걸 들 수 있죠. 이렇듯 대구는 경제적으로 저 평가되어 있는 가치가 숨어있다는 점에서 저희 나름의 전략으로 저희가 이 지역에 사무실을 오픈 한 이유도 있습니다. 이와 연관되어 저희가 취하고 있는 다른 전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네요. 현재 보편적인 디자인이 광범위하게 대한민국을 강제하고 있습니다. KCC라는 회사가 인테리어까지 한다고 했을 때 대중들은 건축가들보다 기업을 더 선호하는 추세입니다. 보편적인 디자인의 유행이 광범위하게 전국을 다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현재 건축디자인이라는 것도 너무 보편적, “보편적”은 좋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편중되어 있어요. 여기서 차이를 가져야 가치를 부여받는 것이 건축을 포함하는 고급예술의 속성인데, 그래서 취하는 전략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잖아요. 이런 추세, 새로운 것들이 너무 많이 만들어지는 사회에서라면, 오히려 옛것을 그냥 들추어 내는 것이 굉장한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오피스아키텍톤 사무소' 프로젝트를 통해 더욱 피부로 와 닿았습니다. 한 예로 이 건물의 정면 파사드는 저희가 디자인 한 것이 아닙니다. 군사 정권의 근대화시기에 다들 옛 인습을 타파하고 모든 것을 근대화하는 것이 보편적 사회 분위기일 때, 이 건물과 같은 '박공 지붕은 구시대 적이고 평지붕이 근대화의 상징이다' 라는 인식 때문에 건물의 정면 파사드를 사각형으로 높이고 대형간판으로 박공지붕을 가렸었죠. 저희가 한 것은 그저 근대화 시기에 평지붕으로 보여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덧대어진 파사드와 간판을 떼어낸 것뿐이에요. 80년 전의 입면 상황을 그저 드러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물론 의도하고 시작한 것이지만 공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언론이나 학자들이 다 찾아왔던 것이 저를 굉장히 놀라게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주변에 5개의 작업을 받았죠. 최근 일본인 방문센터를 하고 있고요.
박: 그 다섯 개의 작업들은 다 개인 클라이언트인가요?
최: 개인 클라이언트인데 지자체로부터 여러 형식으로 지원금을 받는 클라이언트입니다.
박: 제가 생각하기에는 리노베이션과 관련해서, 지자체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잖아요. 행정적으로, 정책적으로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 그들과 저희는 정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리노베이션을 통해 건물의 가치가 오래 가려면, 근본적인 뼈대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런 것들에 대해 비용도 써야 하는데, 지원금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지자체장의 정치적 행위의 수단이라, 이것이 홍보적인 효과가 있어야 하고 치적으로 남아야 하는 까닭으로, 미디어에 노출이 되었을 때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야 해요. 그러다 보니 지원금을 외부 노출 부위에만 지원해 주는 거죠.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리노베이션이 외관 위주의 작업으로 가요. 저희가 말하는, 파사드를 덜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덧 씌우는 거죠. 다른 지역의 경우, 구룡포나 인천도 근대골목 사업을 하는데, 콘크리트 라멘 구조의 현대식 건물에 목조장식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어요. 기와의 물매가 거의 뭐 82도의 장식에 가까운 리노베이션이었습니다. 저는 충격 받았어요. 대구의 경우, 그런 방식보다는 진화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홍보나 치적으로써의 리노베이션이라는, 근본적 가치관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저희가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비주얼적인 언론, 영상이나 신문과 같은 언론에 노출되는 것 역시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우: 대구 중구에서 리노베이션 사업을 추구하고 있어서 얼핏 보면 저희와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작업을 참여하기도 했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구청에서는 단순한 복원이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사업을 많이 해요. 파사드, 창을 교체할 때 들어가는 새로운 목재에 옛 느낌을 내기 위해 칠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죠.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라든가 전체 진행 방향이라든지 확연히 저희와 다릅니다. 저희는 복원이 아니라 다음 한세기를 지속할 수 있는 영속성을 현대의 기술과 접목시켜 미래 지향적일 수 있는 전략을 추구합니다. 노스텔지어, 복원과는 다른 길이죠. 이미 건축 기술이 선진화 되어있고 발전되었는데 굳이 우리가 이 시점에서, 새로 고치는 단계에서 왜 옛날의 목창호와 단열도 안 되는 기와를 쓰는 방법을 그대로 차용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죠.
박: 오피스 아키텍톤에서 하는 작업과 대구 중구에서 하는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고, 하지만 내용과 방향이 다른 상황에, 서로에
대한 불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 첫 번째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법률적 다툼입니다. 지자체장의 정치적인 행위에 속한 사업이잖아요. 그러니까 현실과의 괴리가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250만의 대도시에 건축행위를 하려면 굉장히 많은 법적 제한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특히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대한 것들입니다. 거기에 얽힌 이해관계, 주거환경개선지구, 조합설립준비위원회에 대한 것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부동산 자본과 결탁되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중구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어 공동화가 진행되어 있어 인구 유입이 필요해요. 여기에 저희가 주택 대수선 인허가를 받으려고 하니까 주거환경개선 정비예정구역으로 묶여 있으니 이 건물을 고치고 싶으면 조합설립준비위원회에 가서 허락을 구해오라는 거예요. 이건 어느 법령에도 없는 내용이거든요. 지자체에서는 근대 골목길 사업 등 도시재생을 추구하면서, 총체적인 도시 재개발을 원하는 위원회에 가서 허락을 구하고 오라니. 너무나 상반되는 가치이므로 사회적 협의가 이루어져야 하잖아요? 그리고 대학 교수로 구성된 수많은 도시, 건축관련 위원회가 이런 문제들을 바꾸는데 노력을 들이고 담론을 생성해야 하는데, 그분들 조차도 이런 사업을 전시적으로 하고 계시고, 제도적 개선 노력을 전혀 안하고 계시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지자체에서 지원받는 사업만 진행이 되지, 일반사람이 내 돈 들여 하는 건 잘 안 되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법적 제한, 그리고 이런 현실적 이유들 때문에. 저희가 하는 것은 이런 문제에 부딪혔을 때, 크게 이슈화 시키는 거죠. 저희끼리 공무원이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니는 거죠.
최: 리노베이션에 관심을 가지는 일반 대중들도 있고, 건축가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은 결국 퀄리티입니다. 문제들이 해결되었을 때 결국 질 좋은 건축을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요. 하지만 지자체와의 다툼을 이슈화 시키는 것 만이 아니라, 건축가로서 행정업무의 코디네이터로 참여하기도 하고 직간접적으로 행정과 건축에 관계를 하고 있습니다.
우: 저희가 어쨌든 건축가라는 전문인이니까 제가 배운 전문적 기술과 지식에 반하거나 그 기준을 두고 봤을 때, 잘못된 것은 이야기하는 편이고 그래서 긴장관계라고 하는 것이 형성이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큰 틀에서의 방향은 찬성하고 참여합니다. 잘못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전문가로서의 조언이나 답을 합니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싫어하시는 거죠. 좋은 게 좋다는 말로. 한국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에요. 좋은 게 좋다는 말, 그리고 사람이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냐는 말. 그건 융통성이 아니라 기준이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기준이 있으면 기준에 적합하게 작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차: 하지만 최근 지자체도 저희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초기의 많은 부딪힘과 비교했을 때, 감사를 받더라도, 지적을 받더라도, 법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완화해 주겠다' 라는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숨통을 틔워주고 있는 부분이 조금씩 생기고 있습니다. 지자체에서도 무조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융통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부터 법률을 정비하고 있다고 계속 말로만 하셨지만, 퀄리티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좋게 받아들여 집니다.
박: 변화가 있다는 자체가 큰 변화인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제도적인 문제, 형식적인 문제들이 안 맞거나
틀어질 수 있는 상황이 자주 있습니다. 그런 부분이 있을 때, 우리들이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후배 건축가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냐에 대한 갈림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터뷰하면서도 사회적 책무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의식에 대한 것들을 자주 질문 했었죠. 사실은 지금은
힘들다 할지라도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미래의 후배들에게 좋은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리노베이션 작업
박: 최근에 목조건물 리노베이션만 몇 개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최: 리노베이션 일에는 건축가의 여러 가지 역할이 녹아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역할, 기술 직능인의 역할, 교육 등 여러 입장이 있는데, 저희는 리노베이션을 사회 참여로의 역할로 보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마을 만들기, 도시 재생 그런 관점은 저희가 의식은 하지만 주된 화두는 아니고, 저희가 리노베이션에 담는 가치는 영속성입니다. 모든 건축가들이 그렇잖아요. 자기 건물이 영원했으면 하는 욕망이 있잖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건물 조차도 황폐화된 사례를 많이 보거든요. 예를 들어 알바로 시자가 저소득층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모던한 방식의, 하얀색 외벽을 가진 집합주거 건물을 만들었는데 30~40년 지나서 가보면 슬럼화 되어 있고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면 매우 허망합니다. 하지만 목조건물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기능을 적합하게 담으려고 노력한 건물은 그 기능이 바뀌었을 때, 그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교도소로 사용되던 공간이 학교로 바뀌기 힘든 것처럼. 하지만 목조건물은 거기에 대해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더 목재라는 재료가 단단하지 않고 불에 타기 쉽고 영원할 것 같지 않은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내부 프로그램이 굉장히 자주 바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더 영속성을 가질 것 같습니다. 향수 어린 시절로 목조건물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취향의 차이에 의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이런 취향을 가진 계층이 분명히 존재하시죠. 그런 분들처럼 목조 건물을 그저 옛 추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선택해서 갖는 가치에 대해 생각 합니다. 목조 건물의 리노베이션에 저희는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박: 목조 건물에 대한 생각을 넘어선, 오피스아키텍톤이 가지고 있는 리노베이션의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올해
공간 잡지에서 리노베이션과 관련된 테마 기획으로 '도심지 안의 빈 땅이나 빈 집, 빈 건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에 대해 서울, 북경, 동경이나 오사카, 동북아시아의
세 도시가 진행하는 방향에 대한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구들이 줄고 사회적인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의 타개책으로 불도저식 아파트 일변도의 재개발, 리노베이션의 방법, 도시재생이라는 방법 등 여러 방법들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오피스아키텍톤이
가지고 있는, 리노베이션 작업의 가치와, 작업 시 기존에
있던 건물의 여러 요소 중 가져갈 것 혹은 없앨 것에 대한 판단 기준, 기능과 부합하는 새로운 요소들을
넣는 상황에서의 기준들을 묻고 싶네요.
최: 저희 사무실이 리노베이션의 이미지가 너무 씌워지면 안 되는데...(웃음) 저희는 리노베이션 설계 기간을 3개월로 잡습니다. 1달에서 1달 반, 건물을 재해석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뒤에 첫 미팅을 잡습니다. 현재 건물의 해석된 것들을 미팅 내용으로 하고요. 그 재해석은 건축물에 한해서가 아니라, 필지에 대한 총체적인, 역사적인 것들까지로 이루어집니다. 구청의 폐쇄지적도까지 보면서 건물의 80년, 100년의 긴 역사를 찾아보게 되다 보면, 건물이 앉혀져 있는 마을, 동네 골목길, 도시적 변화를 읽을 수 있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회는 많이 없었지만 신축을 할 때에도, 필요한 컨텍스트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과거의 기록, 현재의 변화에 대한 기록을 굉장히 중요시 여깁니다. 저희가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오래된 건물을 지목해서 모든 것을 정밀한 도면화 작업을 합니다. 그런 작업들은, 젊은 건축가들에게 있어 성숙한 단계까지 가는 과정의, 건축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단단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옥에 27년 정도를 살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건물이 건물다워야 하는데, 가치만을 추구하다 보면 본연의 것들을 침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희가 리노베이션 작업을 할 때는 전형적인 주거 환경, 즉 아파트, 다세대 주택보다 주거 퀄리티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과감하게 하는 편이죠. 예를 들어, 흙으로 채워져 있는 부분과 회벽마감을 제거하고 단열재를 채우고 흰색 철판으로 마감을 하거나 또는 단열과 방화성능을 가진 유리를 끼운다든지 하는 방식 같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주거 건물에서 최소한의 기능은 담보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테리어 설계와 시공, 리모델링의 설계와 시공이 신축보다 각광받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것입니다. 특히 임대 수익이 굉장히 많이 발생하는 도심지의 경우 그 시간이 금전적으로 환원이 되니까 사람이 거기에 강박관념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저희는 오랜 시간을 갖고 작업을 하다 보면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디자인들이 중간중간 많이 발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실 2층에 내부의 흙벽을 감싸기 위해 씌워진 벽지가 누적된 시간만큼이나 7겹이 덧대 있었는데, 두 세 겹의 최근 벽지 안에는 연대를 추정할 수 없는 벽지들이 있었어요. 그런 것들도 타이트한 설계기간과 공사기간이 주어졌다면,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을 의식했다면, 놓치거나 버려졌을 건데 저희는 시간의 여유들이 있었기에 작업 중에 그런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남겨보는 시도들을 했었어요. 대중들은 그런 것에 감사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더라고요.
우: 그와 맥을 같이 하는 이야기인데, 저희 같은 경우, 1차 철거, 2차 철거, 3차 철거와 같이 부분적으로 진행을 합니다. 그러면서 꼼꼼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고 건물을 이해하려는 작업을 동시에 합니다. 우리는 '신구를 합치는 전략을 쓰겠다', 혹은 '우리는 새로운 재료를 과감하게 믹스하는 전략을 쓰겠다' 라기 보다는 건물을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건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 숨겨진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 저희의 큰 전략이에요. 여러 단계에 걸친 철거 작업도 역시 그런 가치들을 파악하기 위해서이죠. 건물을 해체하지 않으면 그런 숨겨진 가치들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저희의 전략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건물을 해석하는 시간을 오래 갖는 것, 그것이 저희의 강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박: 오래된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장점들이 다 다르게
나타나게 되나요? 오피스 아키텍톤에서 철거 중 건져낸 보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 방금 말씀드린 벽지. 그리고 얼마 전 리노베이션을 마친 1960년에 지어진 일본인 방문센터라는 건물은 콘크리트 건물에 타일이 붙여져 있는 근대 건물이었거든요. 1962년에 박정희 군사정권이 수입 금지한 일본산 외장 타일을 폴리싱하여 보존하기도 했고, 그 건물에서 발견한 건 1층 부분에 방공호입니다. 원래는 시멘트로 막혀 있어서 몰랐는데 시간을 가지면서 실측을 하고 철거를 하는 과정에서 그 부분이 이상하게 미장이 되어있었어요. 한번 떼 내어 봤죠. 그렇게 해서 발견이 된 부분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1층 공간을 방공호를 따라 바닥을 다운시켰어요. 그 건물의 새로운 기능이 북카페인데, 이 필지가 예전 일제의 세장형 필지이다 보니 옆 테이블과의 간섭이 너무 심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방공호 공간을 살려 단 차이를 통한 공간 구분을 시킬 수 있었던 전략을 세울 수 있었죠. 그리고 또 하나는 1960년대 지어진 도심형 한옥이라는 것을 리노베이션을 했습니다. 실측을 하다 보니 바닥이 너무 두꺼운 겁니다. 옛날방식의 구들 난방이 바닥에 깔려 있고, 그 위에 보일러 형식의 난방이 쌓여 있었어요. 어쩐지 바닥이 높더라고요. (웃음) 난방 방식의 변화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다 걷어서 바닥을 많이 다운시켰어요. 층고가 매우 높아졌죠. 이 높은 층고를 활용해서 13평의 작은 집을 18평의 복층 집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저 바닥 위에 보일러 시공을 다시 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올 수 없었겠죠. 이를 경험한 저희는 정말 신중히 철거를 진행하게 됩니다. 건축가가 자기의 건축적 포지션이 있고 언어가 있고 재료와 방식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노베이션 만큼은 그 건물이 내포하고 있는 가치와 실제가 건축가에게 좋은 영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최: 철거, 시공비를 떨어뜨리기 위해 공사를 몸소 뛰는 것이 아니라, 책상에서 옐로페이퍼로 설계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철거하면서 고민하는 것이 더 나으니까 철거를 직접 합니다. 저번에는 집 한 채를 직접 철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도저히 힘들어서 못 하겠더라고요. (웃음)
우: 저희와 마음이 잘 맞는 철거업자 분들까지도 ‘이건 왜 남겨야 되지?’라고 물어보시는 경우가 많아요. 옆에 보이시는 저 뜯어진 벽지도 철거업자 분들이 뜯어 놓으신 것을 가져다 놓은 거예요. 이걸 보고 우리 세 소장들이 보면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치 옛 집의 기억을 수집하는 것 같아요 저희는.
박: 거의 고고학자의 자세로 건물을 대하는 기분이 드는데요? (웃음) 만약 그 건물에 살았던 사람에게 의뢰를 받았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역사와 기억을 되돌려주는 것 같아요. 그게
대구이니까, 북성로이니까 실제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 부분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봤을 때, 어떤 정책적인, 도시적인 기억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추억까지 다시 찾아주는 것 같네요.
최: 실제로 리서치 과정에서 그렸던 도면(warm eye’s view)을 액자로 만들어서 집주인에게 드립니다. 조감도 형식의 도면이 아닌 충감도 형식의 도면은 리노베이션 이전에 기록 도면으로 저희가 항상 그리는 도면입니다. 건물의 외피보다는 실내 공간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이 건물이 갖는 오랜 시간과 기억의 흔적을 드러내기에 참으로 좋은 도면입니다. 집주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철거와 기록의 과정들은 그저 무용담이 아니라 현대적 건축과정, 즉 컴퓨터 베이스의 구축과정에서 경험할 수 없는 전통적으로 해왔던 건축의 실현화 과정과 맞닿아 있는, 더 나아가 철거의 과정에서도 건축적 과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이런 과정들이 저희에게 있어 더 큰일을 하기 위한 과도기, 배움의 방식, 경험의 방식을 위해 너무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예전에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친구들이 있었어요. 사무실을 오픈 하고 신축을 너무 하고 싶은데, 한 건도 안 들어와서 5, 6년을 인테리어만 한 경우가 있어요. 근데 인테리어를 하면서
현장을 가게 되고, 현장에서 막 일을 하다 보니 디테일과 재료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고 하며, 그 기간 동안 엄청나게 많은 공부, 수련이 되었다고 이야기 했었어요. 그런 것들이 모여 결국 다른 친구들이 가질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분명히 나중에, 지금보다 훨씬 좋은 값어치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기대도 많이 되고요. 원하는 것은 분명히 시간이
지나면 가질 것이고 그런 것들을 맡게 되었을 때 잘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에서의 유학, 그리고 실무
박: 지금 현재 진행하고 있는 것과 유학과의 관계가 있습니까? 지금 현재 상황에서 유학을 다녀온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일본의
경우 최근 유학을 잘 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의 현재 젊은 건축가들은 유학을 정말 많이
떠났던 세대이거든요. 최근에는 뜸하긴 하지만요.
최: 1990년대에 ‘건축과 환경’ 매거진에 건축가 섹션이 다년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승효상 건축가를 포함해서 김승회 건축가 등. 저희 세대가 그런 잡지를 보며 대학 때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건축가라는 브랜드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세대입니다. 여럿이 연대해서 사무실을 여는 경우는 흔치 않았고, 그 당시에는 대형 설계 사무소와 아틀리에 작업이 딱 봐도 다를 정도로 격차가 컸었어요.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그런 것들을 봤던 세대인 데다가, 2000년 전후 서울건축학교, 건국대, 경기대, 한양대 건축전문대학원이 생겨나고, 건축학 인증이라는 것이 새로이 부상하면서, 박사학위 중심의 교수진에서 새로운 튜터진이 새로 나타났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필요했던 튜터들이 유학을 다녀온 일없는 젊은 건축가들로 채워졌었거든요. 심지어는 지역의 대학에서도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건축가들을 모셔왔었죠. 그런 상황에서 유학파 건축가에 대한 환상이 클 수밖에 없었죠. 그 분들은 굉장히 쉽게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각종 행사들, 워크샵들에서 그 젊은 당시의 지적 공백을 위안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혜택들이 좋아 보였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유학 간 이유에 순수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지역 대학에서만 건축을 공부한 그 불리함을 바꾸기 위한 타개책이기도 했습니다. 지방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는 저희들에게 서울건축학교에서 매년 여름마다 해온 워크샵은 그러한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학교에서는 받지 못한 스튜디오식 설계 수업의 일부를 경험할 수 있었고, 가장 큰 의미는 설령 지적으로 충만하지는 못했겠지만 건축가들이 모여 공론의 장을 만들고 토론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분위기는 졸업하고 건축사 자격 획득을 목표로 안주하는 삶이 아닌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게 했어요. 네덜란드를 선택한 이유는 비주류의 나라 중에는 가장 도시, 건축의 퀄리티가 괜찮다고 생각한 나라였어요. 그리고 토지 가치가 굉장히 비쌀 수밖에 없는 토지 조성 환경을 가진 나라, 그래서 건축 과정이 매우 조심스러웠던 나라, 그리고 사회적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 속의 조율자로서의 건축가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죠. 건전한 이유와 불건전한 이유가 섞인 채로 유학을 갔죠. 한국의 결혼식, 돌잔치, 부모님, 가족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건축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좋은 환경이었어요. 공론장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다양하고 심도 있는 건축 담론, 유럽 각지에서도 모이는 이벤트들이 많아 교육 과정 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상황, 대구의 상황과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시선으로 볼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돌아왔던 2000년대 후반이 우리나라가 굉장히 급변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기존의 선배들이 유학 후 누렸던 혜택들이 주어지지 않는 척박한 환경이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힘든 상황에 결과적으로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힘든 환경 속에서 유학파 출신들이 오랜 수련을 통해서 높은 수준의 디테일들을 한국도 비로소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네요. 제가 네덜란드에서 실무경험을 오래 하지 않아서 좀더 긴 기간 실무를 한 우지현 소장님이 하실 말씀이 더 많으실 것 같습니다.
우: 저는 졸업 후 실무를 ‘OMA’에서 2년간 했습니다. 지금도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비교를 해보자면 지금 저희는 건축에 몰두하기에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거기서 실무를 하며 느꼈던 것은 ‘나중에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실 직원들이 혹은 내가 건축에만 몰두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 정도로 작업에 몰두하기에 최적화된 사무실이었어요. 물리적인 환경도 그렇지만, 클라이언트, 사용하는 재료나 자세, 협업하는 팀들, 사소하게는 점심을 뭘 먹어야 할까 하는 고민조차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건축설계만 할 수 있게 만든 사무실이었어요. 그곳의 유명세도 물론 있지만, 건축 사무실이 이 정도는 돼야겠다 라는 나름의 기준이 섰던 것 같아요. 그 사무실에서 했던 여러 의미 있고 즐거웠던 프로젝트들, 새로운 것들, 외국 건축가들과의 협업, 그리고 제 뒤에 붙는 타이틀 같은 장점들보다 제가 얻은 가장 큰 경험은 건축하기 최고인 환경에서 일을 해봤구나 하는 것이 가장 큰 것 같아요.
최: 유학에 대한 경험들에 대한 저의 생각은 계속 바뀌겠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네덜란드의 상황과 학교의 특수함이긴 한데,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수와 활동하는 건축가가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 가장 저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학생수 2천명, 교직원 1천명. 너무나 많은 토론회와 이벤트, 그리고 체계화된 건축가협회, 수많은 담론의 장들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어요. 한국에만 있었으면, 건물을 단지 잘 만들기 위한 부담감이 컸을 것 같아요. 건물을 잘 짓고,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일을 많이 하는 훈련을 통해 점점 더 퀄리티 있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근데 유학 가서 한국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상황과 담론의 장 속에 풍덩 빠져보고 남았던 큰 교훈은 건축행위라는 것이 그저 건물을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의 연장선에 놓여져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저의 작은 프로젝트들로 하여금, 그것들이 쌓여서 큰 틀에서 봤을 때 세상이 한 발짝 앞으로 나가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런 의미 망 속에서 건축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들을 유학 가 있는 동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귀국 후 사무실을 어디에 잡을까, 어떤 일을 할까에 대한 생각이,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긴 건축가의 여정에서 어떻게 해야 의미가 되겠다 라는 것을 유학 중에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저에게 가장 컸습니다. 리노베이션 역시 이런 의미 속에 있는 것이고요.
오피스 아키텍톤이 나가고자 하는 길
박: 최근 첫 신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신데, 이 작업에 대한 화두, 관심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최: 저희가 계속 목조건물의 이미지로 덧입혀지는 것이 싫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어쩌면 저희는 모더니스트입니다. 건축가들이 흔히 하는 포지셔닝, 즉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건축가의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모던의 세상을 이루는 것이 꿈입니다. 그 비전이 폐기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저희 사무실의 위치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버스 대중교통이 다닌 길이거든요. 서울보다 앞섰죠. 1920년대, 한강 이남의 최초의 가로등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고요. 여기가 경상도의 근대화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가장 모던한 거리였고, 해방 후에는 공구골목으로 성장하여 대한민국의 공구 시장을 지배했던 곳입니다. 그런 배경으로 이 곳에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수많은 모던의 가치 중에 저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산업과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에게 잉여 시간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거든요. 그런 시간들을 통해 삶의 퀄리티를 높이고 사색하는 사람의 삶을 저희가 설계하는 건축환경으로 이룩하고 싶습니다. 모던의 여러 가치 중에 이런 가치를 가장 사랑합니다. 저희는 건축행위를 할 때 그런 관점에서 많이 보기 때문에 사람과 시간의 틀 안에서 사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만들어 줄까 하는 것입니다. 기능이 충족된 기밀한 집을 짓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사무실에서 진행하는 신축 프로젝트는 주변 맥락이 없다시피 한 전원에 기존 건축주의 집이 있고 이번에 멀리서 찾아오는 동생네들을 위한 작은 집과 카페 그리고 연회장의 프로그램을 갖는 프로젝트입니다. 신축 건물의 건축 개념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집이 있고, 그 안에서의 조망을 새로이 짓는 건물로 가리지 않는 것, 그래서 새로운 건물이 오브제적인 아름다움은 없더라도 옆 건물과의 관계에서는 탁월한, 이렇게 기존의 집을 의식해서 설계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공간이 비어 있지만, 그 공간이 결국 거주자와 방문자의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공간이 되는 설계를 진행 중입니다. 기존의 집을 포함한 4개의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건물 4동이 집합하여 공유하는 공동의 마당이 주요한 목표입니다. 사실 지금 작업이 3, 4주 진행된 단계라 풍요로운 계획은 아직 미비하네요. (웃음)
박: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무실의 모습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네요. (웃음) 싫어서 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장소에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일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현재는 사무실 여건 상 한 프로젝트에 세명의 소장과 전 직원이 다 붙어서 진행하는데, 나중에 여건이 되면 각자 하나씩, 혹은 듀엣으로.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박: 여러 다양한 이야기 나눌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지역에서 꾸준하게 작업하고 있는 모습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또한 기대되는 첫 신축 건물에
대한 기대도 하게 됩니다. 앞으로 더 좋은 모습으로 오피스아키텍톤의 행보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지현
우지현은 1980년 경상북도 하양 출생으로 계명대학교와 한양대학교
건축대학원에서 건축을 그리고 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에서 도시건축을 전공하였으며, 2007년 이후
정림건축을 거쳐 로테르담 OMA에서 실무를 경험하였다.
차상훈
차상훈은 1977년 대구 출생으로 대구공업고등학교와 호산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였으며, 2000년부터 13년 동안 대구 지역
안에서 건축실무의 기회를 가졌다.
최영준
최영준은 1977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학교와 네덜란드 델프트공과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였으며, 2008년 김영준도시건축에서 실무 경험 중 제6회
김중업 건축상을 수상하여 파리 LACATON & VASSAL ARCHITECTES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는 기회를 가졌다.
오피스아키텍톤은 오늘날 범람하는 디자인의 수사(rhetoric) 속에서
정확한 공간설계로 차별화하여 건축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무소이며, 실천된 프로젝트로는 유행에 따른 내부
인테리어 디자인을 넘어 오래된 건물의 원형과 장식을 재해석하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들이 있다.
지금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건축가들과 이야기를 나눴었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의 지역에서 꾸준하게 작업해 오고 있는 건축가를 만나기 위해 부산과 대구를 들렸습니다. 이번 대구에서
인상적인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는 ‘오피스아키텍톤’과 함께
지역에서 작업한다는 것에 대한 내용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보았습니다.
대구에 대한 시선
박창현(박): 일본의 경우
동경이나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뿐만 아니라 일본의 다양한 지역 건축가들도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역 건축가들이 동경이나 오사카로 가서 활동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일들이
거의 의식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국은 아직까지 활발하게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구라는 지역에서 건축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지역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로서 이 지역의 상황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듣고 싶습니다.
최영준(최): 오래 전부터 어떤 도시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했었습니다. 대구를 선택한 이유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대구를 사랑해서입니다. 저희 세 사람은 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대구에서 학교를 나왔습니다. 저랑 우지현 소장님은 같은 학교, 그리고 차상훈 소장님은 공업고등학교를 나와서 전문대학을 나왔고요. 대부분의 시간을 대구에서 보냈기 때문에, 대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합니다. 하지만 한 도시에 뿌리를 내리는, 그 중요한 선택을 그렇게 단순히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와 우지현 소장은 서울에서 실무 경험을, 공부는 네덜란드에서, 심지어 우지현 소장은 네덜란드 OMA에서 실무를 2년 더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에서 사무실을 하는 이유는, 저희 나름의 전략적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건물이 땅 위에 지어지는 것은 불변입니다. 건물을 짓는 비용은 결국 토지 가격과 건축비의 합산인데, 독특한 공법의 건축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건축비는 결국 비슷합니다. 결국 토지 가격이 가장 중요한데, 서울과 지역의 가격이 10배 이상 차이가 나요. 그래서 우리는 지역이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희는 주변의 컨텍스트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건축 설계를 하기 때문에 건물이 지어지는 도시 그 자체, 도시 안의 작은 마을, 그 속의 작은 골목길 같은 주변 환경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희가 30년 가까이 생활해오며 이해하고 있는 이 지역이 가장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박: 실제로 두 분의 경우 외국에서 생활을 하고 다시 귀국한 상황인데, 반대로 여기 대구에 그 자리 계속 있었던 경우는 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익숙하기
때문에 다른 곳과 이 곳의 어떤 부분이 다른지에 대해 찾아내기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차상훈 소장님은
계속 대구에 계셨기에 기간이 얼마나 됐든 외국에 있다가 다시 대구에 돌아오신 최영준, 우지현 소장님과는
다른 시선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차상훈(차): 저는 실무를 대구에서 한지 13년 정도, 다른 두 분보다 먼저 졸업을 하고 군에 다녀와서 취업을 했습니다. 이런 제가 느끼는 점은 회사에 오는 일들의 스타일이나 방법들이 너무 똑같고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10년 넘도록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접했던 일과 나중에 접했던 일들이 주거에서는 원룸과 아파트, 그 속에 다른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음에도 계속 반복적인 일들 만을 했었죠. 해외에 다녀온 친구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크게 변한 것은 결국 아파트 높이만 높아진 것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 7년 정도 타지 생활을 한 후 객관적인 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자의 시선을 조금 견지하기도 한 것 같아요. 저희가 귀국한 2011년도의 상황이 경제적으로 다들 어렵다는 거예요. 서울을 단시간에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발달하다 보니 고급 기술의 소비 행태를 가진 분들은 서울을 많이 가시더라고요. 더욱이 건축에 관련된 좋은 일들에 대해서는 소비자가 서울을 찾아가 버리니까 더 심했어요. 심지어 소비자들은 지역에 있고 서울의 건축가를 불러오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죠. 저희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그런 것들에 대해 잘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들 때문에 대구에 계셨던 분들이 어렵다 어렵다 하셨어요. 하지만 저희는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실제로 와서 부딪혀 보니 그 틈에서 오히려 기회와 가능성들을 많이 찾았습니다. 이 사무실의 위치와 건물을 정한 이유도 어려운 경기 속 임대가 되지 않아 비어 있는, 그래서 임대료가 월 25만원의 저렴한 가격에 5년 장기계약을 했습니다. 그런 건물들이 대구 도심에 굉장히 많았어요. 그렇게 생긴 기회비용을 이 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는데 과감히 비용을 지출했고, 이런 것들이 저희의 선순환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첫 출발이 되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주변 상황이 어려웠다는 것이죠. 그리고 좋은 정보라든지, 교류, 공론의 장이 일어났을 때, 교통수단의 발전, 그리고 통신수단의 발전으로 그런 것에 참여하기가 더욱 수월해진 거죠. 서울에 있어야 된다고 하는 장점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좋은 여건이라고 생각이 돼요.
우지현(우): 저도 마찬가지로 타지 생활을 계기로 객관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시선에서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 서울과 외국에서 실무를 하면서 꼭 한국과 외국, 나의 고향과 그렇지 않은 곳, 이런 것을 떠나서, 건축가는 결국 본인의 것을 창조하려고 하고 창조된 것이 남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세계 어디서나. 귀국해서 봤을 때, 밀도가 높은 서울에서는 더욱 그런 식으로 작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대구는 템포도 늦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완결되지 못한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천천히 자신만의 건축을 찾아가면서 깊숙이, 오롯이 건축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장소이기도 한 것 같아요. 서울과 같은 경쟁이 심한, 밀도가 높은 곳에서 작업을 시작했다면,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없었을 것 같아요.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여기가 지역이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점은 저희가 여기서 몇 십 년 살았고, 그래서 저희 지역에서 알고 있었던 사람들, 특히 시공 관련하여, 작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시간은 조금 더딜지라도 완성도를 만드는 단계에서는 저희한테는 훨씬 더 유리했던 조건인 것 같아요. 장소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박: 지금 이야기하신 것들, 전반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것들 중 하나인데, 서울에 있는 젊은 친구들을 인터뷰하다 보니 느꼈던 것이 '초조함' 이었어요. 경쟁
때문에. 그리고 경제적으로 힘들다 보니 빨리 안정적으로 되어야겠다는 마음의 초조함이 실제 인터뷰에서도, 그리고 작업에서도 나타났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은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빨리빨리 뭔가를 해내야지' 라는 생각은 사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거기에 따른 문제들이 생기고, 갈등도 생길 수 있죠. 그와는 반대로 현재 이 지역의 물리적인 상황과 시간, 확보할 수
있는 상황과 장점을 충분히 잘 읽고 진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 말씀하신 상황에 대해 지역은 굉장히 자유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종건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생존주의 건축에 굉장히 공감합니다. 경쟁이 치열하다기 보다는, 사람이 많은 곳에 계시는 분들은 자기를 드러내는데 굉장히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세계의 건축 거장들에게 볼 수 있다시피, 초기의 작업들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수도권 건축가들은 자기를 드러내는데 시간을 많이 들이는 것이, 너무나 눈에 많이 보였습니다. 잡지로 노출시키려는 노력들뿐만 아니라 SNS상 활동들. 놀라워요. '저분들이 그런 시간이 다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죠. 실제 설계하고 직접 시공하고 실시간으로 사진을 찍으며 기록으로 남기는, 그런 시간들이 충분할까요? 좌담, 모임, 건축계 활동 다 하시면서... 그리고 이 지역의 또 다른 장점은. 가만히 있어도 잘 드러날 수 있거든요. (웃음)
박: 인터뷰 전에 프로젝트들을 한 번씩 다 봤는데, 보고 느낀 점은, 굉장히 시간을 들여서 섬세한 결과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섬세하고 세세하게 작업 진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우: 섬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간이 많으니까(웃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할애할 좋은 기회를 이 지역에서 사무실을 오픈 함으로써 얻은 거죠. 설계기간이 다른 사무실보다 길다는 점을 저희는 자부하기도 합니다. (웃음)
박: 그런 부분은 장점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수도권에서는, 시간을 충분히 들여 설계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의해 이렇게 됐다고 이야기하면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지금 이야기하셨던 시간과 작업을 잘 연계해서 이끌어 나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건축 환경
박: ‘오피스아키텍톤’에서는
최근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구의 다른 분들 역시 리노베이션 작업이 많은가요? 아니면 ‘오피스아키텍톤’ 만의
상황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최: 대구에서 리노베이션 작업의 기회는 많이 없습니다. 심지어 대구의 리노베이션 작업 조차도 서울에서 와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만의 상황이라 생각되어지기도 하네요.
우: 그 이유는 수도권과 지역의 열 배 넘는 땅값의 차이가 있어 굳이 안 고치세요. 부수고 다시 지으시거든요. 그에 따른 시간, 자본의 손실이 적거든요. 그리고 또 서울만큼 신축 작업이 진행되지도 않고요.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의 개수가 적기도 하고, 거기다 굳이 리노베이션을 택하지 않는 분들이 많죠.
박: 지금 작업하셨던 것들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인가요? 북성로와 그 주변은 오래된 건물들이 많고, 중구는 그런 것들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 것들과 이 사무실의 위치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실제로 리노베이션 작업들이 이 동네의 특수한 환경인 것으로 한정될 수 있나요?
최: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동네건축가를 지향하지는 않고요. (웃음) 한국에서는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곳이 부산이라고 생각하는데, 부산은 역사가 100년 정도밖에 안됐거든요. 대구는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서울과 평양과 함께 견주는 고도시입니다. 역사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이기도 하고, 한국전쟁에서 피해를 안 받은 도시이다 보니 건축 자산이 많을 수밖에 없는 도시예요. 또 저희 사무실 같은 건물도 그렇습니다만 일제 강점기 건물인데, 일제 강점기 시절 가장 번화했던 도시이기도 하죠. 그 당시만 해도 대구는 글로벌 도시의 반열에 올라 있었습니다. 한 예로 대구의학전문학교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만들었던 3개의 근대 의과대학 중 하나이고요. 저 학교를 졸업하면 일본 식민지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의사 면허를 줬어요. 그러다 보니 이 학교의 입학 시험을 칠 때 당시 대구 도시 인구가 3만이 조금 넘었는데, 시험을 치러오는 학생만 만 명이 넘었으니까. 굉장히 세계화된 도시였어요. 저희가 생각하는 대구는 낙후된 도시, 침체되어가는 도시가 아니라, 오랜 시간의 켜가 녹아져 있는 고도시라 생각하고, 물리적인 건축 자산뿐만 아니라, 비물리적 수준도 분명히 높다고 생각해요. 지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설명을 드리자면, 건축사 수가 부산보다 대구가 더 많거든요. 일이 많다는 거예요. 클라이언트도 굉장히 많고. 서울 강남에 땅부자들의 절반이 대구경북 출신이라는 말이 있어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상당히 많은 기업들이 대구에서 서울로 진출했어요. 이름만 대면 아는 회사들의 고향이 대부분 대구인 것들이 많죠. 삼성 역시 그렇고요. 지금도 자존심을 가지고 기술 개발에 힘쓰는 회사 중에 대구에 근거지를 두는 회사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총체적인 건축 자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리노베이션이라는 것도 껍데기만 바꾸는 게 아니라면, 물리적인 것들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 물리적인 요소도 많이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자산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자산도 상당한 대구는 그래서 굉장히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하고요. 한 예로 단위행정구역에 가장 한옥이 많은 도시가 서울이 아닌 대구인 걸 들 수 있죠. 이렇듯 대구는 경제적으로 저 평가되어 있는 가치가 숨어있다는 점에서 저희 나름의 전략으로 저희가 이 지역에 사무실을 오픈 한 이유도 있습니다. 이와 연관되어 저희가 취하고 있는 다른 전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네요. 현재 보편적인 디자인이 광범위하게 대한민국을 강제하고 있습니다. KCC라는 회사가 인테리어까지 한다고 했을 때 대중들은 건축가들보다 기업을 더 선호하는 추세입니다. 보편적인 디자인의 유행이 광범위하게 전국을 다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현재 건축디자인이라는 것도 너무 보편적, “보편적”은 좋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편중되어 있어요. 여기서 차이를 가져야 가치를 부여받는 것이 건축을 포함하는 고급예술의 속성인데, 그래서 취하는 전략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잖아요. 이런 추세, 새로운 것들이 너무 많이 만들어지는 사회에서라면, 오히려 옛것을 그냥 들추어 내는 것이 굉장한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오피스아키텍톤 사무소' 프로젝트를 통해 더욱 피부로 와 닿았습니다. 한 예로 이 건물의 정면 파사드는 저희가 디자인 한 것이 아닙니다. 군사 정권의 근대화시기에 다들 옛 인습을 타파하고 모든 것을 근대화하는 것이 보편적 사회 분위기일 때, 이 건물과 같은 '박공 지붕은 구시대 적이고 평지붕이 근대화의 상징이다' 라는 인식 때문에 건물의 정면 파사드를 사각형으로 높이고 대형간판으로 박공지붕을 가렸었죠. 저희가 한 것은 그저 근대화 시기에 평지붕으로 보여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덧대어진 파사드와 간판을 떼어낸 것뿐이에요. 80년 전의 입면 상황을 그저 드러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물론 의도하고 시작한 것이지만 공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언론이나 학자들이 다 찾아왔던 것이 저를 굉장히 놀라게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주변에 5개의 작업을 받았죠. 최근 일본인 방문센터를 하고 있고요.
박: 그 다섯 개의 작업들은 다 개인 클라이언트인가요?
최: 개인 클라이언트인데 지자체로부터 여러 형식으로 지원금을 받는 클라이언트입니다.
박: 제가 생각하기에는 리노베이션과 관련해서, 지자체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잖아요. 행정적으로, 정책적으로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 그들과 저희는 정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리노베이션을 통해 건물의 가치가 오래 가려면, 근본적인 뼈대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런 것들에 대해 비용도 써야 하는데, 지원금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지자체장의 정치적 행위의 수단이라, 이것이 홍보적인 효과가 있어야 하고 치적으로 남아야 하는 까닭으로, 미디어에 노출이 되었을 때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야 해요. 그러다 보니 지원금을 외부 노출 부위에만 지원해 주는 거죠.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리노베이션이 외관 위주의 작업으로 가요. 저희가 말하는, 파사드를 덜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덧 씌우는 거죠. 다른 지역의 경우, 구룡포나 인천도 근대골목 사업을 하는데, 콘크리트 라멘 구조의 현대식 건물에 목조장식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어요. 기와의 물매가 거의 뭐 82도의 장식에 가까운 리노베이션이었습니다. 저는 충격 받았어요. 대구의 경우, 그런 방식보다는 진화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홍보나 치적으로써의 리노베이션이라는, 근본적 가치관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저희가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비주얼적인 언론, 영상이나 신문과 같은 언론에 노출되는 것 역시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우: 대구 중구에서 리노베이션 사업을 추구하고 있어서 얼핏 보면 저희와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작업을 참여하기도 했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구청에서는 단순한 복원이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사업을 많이 해요. 파사드, 창을 교체할 때 들어가는 새로운 목재에 옛 느낌을 내기 위해 칠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죠.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라든가 전체 진행 방향이라든지 확연히 저희와 다릅니다. 저희는 복원이 아니라 다음 한세기를 지속할 수 있는 영속성을 현대의 기술과 접목시켜 미래 지향적일 수 있는 전략을 추구합니다. 노스텔지어, 복원과는 다른 길이죠. 이미 건축 기술이 선진화 되어있고 발전되었는데 굳이 우리가 이 시점에서, 새로 고치는 단계에서 왜 옛날의 목창호와 단열도 안 되는 기와를 쓰는 방법을 그대로 차용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죠.
박: 오피스 아키텍톤에서 하는 작업과 대구 중구에서 하는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고, 하지만 내용과 방향이 다른 상황에, 서로에
대한 불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 첫 번째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법률적 다툼입니다. 지자체장의 정치적인 행위에 속한 사업이잖아요. 그러니까 현실과의 괴리가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250만의 대도시에 건축행위를 하려면 굉장히 많은 법적 제한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특히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대한 것들입니다. 거기에 얽힌 이해관계, 주거환경개선지구, 조합설립준비위원회에 대한 것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부동산 자본과 결탁되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중구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어 공동화가 진행되어 있어 인구 유입이 필요해요. 여기에 저희가 주택 대수선 인허가를 받으려고 하니까 주거환경개선 정비예정구역으로 묶여 있으니 이 건물을 고치고 싶으면 조합설립준비위원회에 가서 허락을 구해오라는 거예요. 이건 어느 법령에도 없는 내용이거든요. 지자체에서는 근대 골목길 사업 등 도시재생을 추구하면서, 총체적인 도시 재개발을 원하는 위원회에 가서 허락을 구하고 오라니. 너무나 상반되는 가치이므로 사회적 협의가 이루어져야 하잖아요? 그리고 대학 교수로 구성된 수많은 도시, 건축관련 위원회가 이런 문제들을 바꾸는데 노력을 들이고 담론을 생성해야 하는데, 그분들 조차도 이런 사업을 전시적으로 하고 계시고, 제도적 개선 노력을 전혀 안하고 계시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지자체에서 지원받는 사업만 진행이 되지, 일반사람이 내 돈 들여 하는 건 잘 안 되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법적 제한, 그리고 이런 현실적 이유들 때문에. 저희가 하는 것은 이런 문제에 부딪혔을 때, 크게 이슈화 시키는 거죠. 저희끼리 공무원이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니는 거죠.
박: 중점적인 내용을 좀더 공론화시키고 이슈화 시킬 수 있는 환경은
구비 되어있나요?
최: 리노베이션에 관심을 가지는 일반 대중들도 있고, 건축가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은 결국 퀄리티입니다. 문제들이 해결되었을 때 결국 질 좋은 건축을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요. 하지만 지자체와의 다툼을 이슈화 시키는 것 만이 아니라, 건축가로서 행정업무의 코디네이터로 참여하기도 하고 직간접적으로 행정과 건축에 관계를 하고 있습니다.
우: 저희가 어쨌든 건축가라는 전문인이니까 제가 배운 전문적 기술과 지식에 반하거나 그 기준을 두고 봤을 때, 잘못된 것은 이야기하는 편이고 그래서 긴장관계라고 하는 것이 형성이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큰 틀에서의 방향은 찬성하고 참여합니다. 잘못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전문가로서의 조언이나 답을 합니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싫어하시는 거죠. 좋은 게 좋다는 말로. 한국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에요. 좋은 게 좋다는 말, 그리고 사람이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냐는 말. 그건 융통성이 아니라 기준이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기준이 있으면 기준에 적합하게 작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차: 하지만 최근 지자체도 저희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초기의 많은 부딪힘과 비교했을 때, 감사를 받더라도, 지적을 받더라도, 법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완화해 주겠다' 라는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숨통을 틔워주고 있는 부분이 조금씩 생기고 있습니다. 지자체에서도 무조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융통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부터 법률을 정비하고 있다고 계속 말로만 하셨지만, 퀄리티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좋게 받아들여 집니다.
박: 변화가 있다는 자체가 큰 변화인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 제도적인 문제, 형식적인 문제들이 안 맞거나
틀어질 수 있는 상황이 자주 있습니다. 그런 부분이 있을 때, 우리들이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후배 건축가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냐에 대한 갈림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터뷰하면서도 사회적 책무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의식에 대한 것들을 자주 질문 했었죠. 사실은 지금은
힘들다 할지라도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미래의 후배들에게 좋은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리노베이션 작업
박: 최근에 목조건물 리노베이션만 몇 개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최: 리노베이션 일에는 건축가의 여러 가지 역할이 녹아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역할, 기술 직능인의 역할, 교육 등 여러 입장이 있는데, 저희는 리노베이션을 사회 참여로의 역할로 보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마을 만들기, 도시 재생 그런 관점은 저희가 의식은 하지만 주된 화두는 아니고, 저희가 리노베이션에 담는 가치는 영속성입니다. 모든 건축가들이 그렇잖아요. 자기 건물이 영원했으면 하는 욕망이 있잖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건물 조차도 황폐화된 사례를 많이 보거든요. 예를 들어 알바로 시자가 저소득층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모던한 방식의, 하얀색 외벽을 가진 집합주거 건물을 만들었는데 30~40년 지나서 가보면 슬럼화 되어 있고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면 매우 허망합니다. 하지만 목조건물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기능을 적합하게 담으려고 노력한 건물은 그 기능이 바뀌었을 때, 그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교도소로 사용되던 공간이 학교로 바뀌기 힘든 것처럼. 하지만 목조건물은 거기에 대해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더 목재라는 재료가 단단하지 않고 불에 타기 쉽고 영원할 것 같지 않은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내부 프로그램이 굉장히 자주 바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더 영속성을 가질 것 같습니다. 향수 어린 시절로 목조건물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취향의 차이에 의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이런 취향을 가진 계층이 분명히 존재하시죠. 그런 분들처럼 목조 건물을 그저 옛 추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선택해서 갖는 가치에 대해 생각 합니다. 목조 건물의 리노베이션에 저희는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박: 목조 건물에 대한 생각을 넘어선, 오피스아키텍톤이 가지고 있는 리노베이션의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올해
공간 잡지에서 리노베이션과 관련된 테마 기획으로 '도심지 안의 빈 땅이나 빈 집, 빈 건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에 대해 서울, 북경, 동경이나 오사카, 동북아시아의
세 도시가 진행하는 방향에 대한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구들이 줄고 사회적인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의 타개책으로 불도저식 아파트 일변도의 재개발, 리노베이션의 방법, 도시재생이라는 방법 등 여러 방법들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오피스아키텍톤이
가지고 있는, 리노베이션 작업의 가치와, 작업 시 기존에
있던 건물의 여러 요소 중 가져갈 것 혹은 없앨 것에 대한 판단 기준, 기능과 부합하는 새로운 요소들을
넣는 상황에서의 기준들을 묻고 싶네요.
최: 저희 사무실이 리노베이션의 이미지가 너무 씌워지면 안 되는데...(웃음) 저희는 리노베이션 설계 기간을 3개월로 잡습니다. 1달에서 1달 반, 건물을 재해석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뒤에 첫 미팅을 잡습니다. 현재 건물의 해석된 것들을 미팅 내용으로 하고요. 그 재해석은 건축물에 한해서가 아니라, 필지에 대한 총체적인, 역사적인 것들까지로 이루어집니다. 구청의 폐쇄지적도까지 보면서 건물의 80년, 100년의 긴 역사를 찾아보게 되다 보면, 건물이 앉혀져 있는 마을, 동네 골목길, 도시적 변화를 읽을 수 있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회는 많이 없었지만 신축을 할 때에도, 필요한 컨텍스트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과거의 기록, 현재의 변화에 대한 기록을 굉장히 중요시 여깁니다. 저희가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오래된 건물을 지목해서 모든 것을 정밀한 도면화 작업을 합니다. 그런 작업들은, 젊은 건축가들에게 있어 성숙한 단계까지 가는 과정의, 건축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단단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옥에 27년 정도를 살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건물이 건물다워야 하는데, 가치만을 추구하다 보면 본연의 것들을 침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희가 리노베이션 작업을 할 때는 전형적인 주거 환경, 즉 아파트, 다세대 주택보다 주거 퀄리티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과감하게 하는 편이죠. 예를 들어, 흙으로 채워져 있는 부분과 회벽마감을 제거하고 단열재를 채우고 흰색 철판으로 마감을 하거나 또는 단열과 방화성능을 가진 유리를 끼운다든지 하는 방식 같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주거 건물에서 최소한의 기능은 담보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테리어 설계와 시공, 리모델링의 설계와 시공이 신축보다 각광받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것입니다. 특히 임대 수익이 굉장히 많이 발생하는 도심지의 경우 그 시간이 금전적으로 환원이 되니까 사람이 거기에 강박관념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저희는 오랜 시간을 갖고 작업을 하다 보면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디자인들이 중간중간 많이 발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실 2층에 내부의 흙벽을 감싸기 위해 씌워진 벽지가 누적된 시간만큼이나 7겹이 덧대 있었는데, 두 세 겹의 최근 벽지 안에는 연대를 추정할 수 없는 벽지들이 있었어요. 그런 것들도 타이트한 설계기간과 공사기간이 주어졌다면,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을 의식했다면, 놓치거나 버려졌을 건데 저희는 시간의 여유들이 있었기에 작업 중에 그런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남겨보는 시도들을 했었어요. 대중들은 그런 것에 감사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더라고요.
우: 그와 맥을 같이 하는 이야기인데, 저희 같은 경우, 1차 철거, 2차 철거, 3차 철거와 같이 부분적으로 진행을 합니다. 그러면서 꼼꼼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고 건물을 이해하려는 작업을 동시에 합니다. 우리는 '신구를 합치는 전략을 쓰겠다', 혹은 '우리는 새로운 재료를 과감하게 믹스하는 전략을 쓰겠다' 라기 보다는 건물을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건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 숨겨진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 저희의 큰 전략이에요. 여러 단계에 걸친 철거 작업도 역시 그런 가치들을 파악하기 위해서이죠. 건물을 해체하지 않으면 그런 숨겨진 가치들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저희의 전략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건물을 해석하는 시간을 오래 갖는 것, 그것이 저희의 강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박: 오래된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장점들이 다 다르게
나타나게 되나요? 오피스 아키텍톤에서 철거 중 건져낸 보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 방금 말씀드린 벽지. 그리고 얼마 전 리노베이션을 마친 1960년에 지어진 일본인 방문센터라는 건물은 콘크리트 건물에 타일이 붙여져 있는 근대 건물이었거든요. 1962년에 박정희 군사정권이 수입 금지한 일본산 외장 타일을 폴리싱하여 보존하기도 했고, 그 건물에서 발견한 건 1층 부분에 방공호입니다. 원래는 시멘트로 막혀 있어서 몰랐는데 시간을 가지면서 실측을 하고 철거를 하는 과정에서 그 부분이 이상하게 미장이 되어있었어요. 한번 떼 내어 봤죠. 그렇게 해서 발견이 된 부분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1층 공간을 방공호를 따라 바닥을 다운시켰어요. 그 건물의 새로운 기능이 북카페인데, 이 필지가 예전 일제의 세장형 필지이다 보니 옆 테이블과의 간섭이 너무 심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방공호 공간을 살려 단 차이를 통한 공간 구분을 시킬 수 있었던 전략을 세울 수 있었죠. 그리고 또 하나는 1960년대 지어진 도심형 한옥이라는 것을 리노베이션을 했습니다. 실측을 하다 보니 바닥이 너무 두꺼운 겁니다. 옛날방식의 구들 난방이 바닥에 깔려 있고, 그 위에 보일러 형식의 난방이 쌓여 있었어요. 어쩐지 바닥이 높더라고요. (웃음) 난방 방식의 변화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다 걷어서 바닥을 많이 다운시켰어요. 층고가 매우 높아졌죠. 이 높은 층고를 활용해서 13평의 작은 집을 18평의 복층 집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저 바닥 위에 보일러 시공을 다시 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올 수 없었겠죠. 이를 경험한 저희는 정말 신중히 철거를 진행하게 됩니다. 건축가가 자기의 건축적 포지션이 있고 언어가 있고 재료와 방식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노베이션 만큼은 그 건물이 내포하고 있는 가치와 실제가 건축가에게 좋은 영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최: 철거, 시공비를 떨어뜨리기 위해 공사를 몸소 뛰는 것이 아니라, 책상에서 옐로페이퍼로 설계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철거하면서 고민하는 것이 더 나으니까 철거를 직접 합니다. 저번에는 집 한 채를 직접 철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도저히 힘들어서 못 하겠더라고요. (웃음)
우: 저희와 마음이 잘 맞는 철거업자 분들까지도 ‘이건 왜 남겨야 되지?’라고 물어보시는 경우가 많아요. 옆에 보이시는 저 뜯어진 벽지도 철거업자 분들이 뜯어 놓으신 것을 가져다 놓은 거예요. 이걸 보고 우리 세 소장들이 보면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치 옛 집의 기억을 수집하는 것 같아요 저희는.
박: 거의 고고학자의 자세로 건물을 대하는 기분이 드는데요? (웃음) 만약 그 건물에 살았던 사람에게 의뢰를 받았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역사와 기억을 되돌려주는 것 같아요. 그게
대구이니까, 북성로이니까 실제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 부분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봤을 때, 어떤 정책적인, 도시적인 기억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추억까지 다시 찾아주는 것 같네요.
최: 실제로 리서치 과정에서 그렸던 도면(warm eye’s view)을 액자로 만들어서 집주인에게 드립니다. 조감도 형식의 도면이 아닌 충감도 형식의 도면은 리노베이션 이전에 기록 도면으로 저희가 항상 그리는 도면입니다. 건물의 외피보다는 실내 공간을 표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이 건물이 갖는 오랜 시간과 기억의 흔적을 드러내기에 참으로 좋은 도면입니다. 집주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철거와 기록의 과정들은 그저 무용담이 아니라 현대적 건축과정, 즉 컴퓨터 베이스의 구축과정에서 경험할 수 없는 전통적으로 해왔던 건축의 실현화 과정과 맞닿아 있는, 더 나아가 철거의 과정에서도 건축적 과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이런 과정들이 저희에게 있어 더 큰일을 하기 위한 과도기, 배움의 방식, 경험의 방식을 위해 너무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예전에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친구들이 있었어요. 사무실을 오픈 하고 신축을 너무 하고 싶은데, 한 건도 안 들어와서 5, 6년을 인테리어만 한 경우가 있어요. 근데 인테리어를 하면서
현장을 가게 되고, 현장에서 막 일을 하다 보니 디테일과 재료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고 하며, 그 기간 동안 엄청나게 많은 공부, 수련이 되었다고 이야기 했었어요. 그런 것들이 모여 결국 다른 친구들이 가질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분명히 나중에, 지금보다 훨씬 좋은 값어치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기대도 많이 되고요. 원하는 것은 분명히 시간이
지나면 가질 것이고 그런 것들을 맡게 되었을 때 잘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에서의 유학, 그리고 실무
박: 지금 현재 진행하고 있는 것과 유학과의 관계가 있습니까? 지금 현재 상황에서 유학을 다녀온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일본의
경우 최근 유학을 잘 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의 현재 젊은 건축가들은 유학을 정말 많이
떠났던 세대이거든요. 최근에는 뜸하긴 하지만요.
최: 1990년대에 ‘건축과 환경’ 매거진에 건축가 섹션이 다년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승효상 건축가를 포함해서 김승회 건축가 등. 저희 세대가 그런 잡지를 보며 대학 때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건축가라는 브랜드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세대입니다. 여럿이 연대해서 사무실을 여는 경우는 흔치 않았고, 그 당시에는 대형 설계 사무소와 아틀리에 작업이 딱 봐도 다를 정도로 격차가 컸었어요.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그런 것들을 봤던 세대인 데다가, 2000년 전후 서울건축학교, 건국대, 경기대, 한양대 건축전문대학원이 생겨나고, 건축학 인증이라는 것이 새로이 부상하면서, 박사학위 중심의 교수진에서 새로운 튜터진이 새로 나타났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필요했던 튜터들이 유학을 다녀온 일없는 젊은 건축가들로 채워졌었거든요. 심지어는 지역의 대학에서도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건축가들을 모셔왔었죠. 그런 상황에서 유학파 건축가에 대한 환상이 클 수밖에 없었죠. 그 분들은 굉장히 쉽게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각종 행사들, 워크샵들에서 그 젊은 당시의 지적 공백을 위안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혜택들이 좋아 보였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유학 간 이유에 순수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지역 대학에서만 건축을 공부한 그 불리함을 바꾸기 위한 타개책이기도 했습니다. 지방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는 저희들에게 서울건축학교에서 매년 여름마다 해온 워크샵은 그러한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학교에서는 받지 못한 스튜디오식 설계 수업의 일부를 경험할 수 있었고, 가장 큰 의미는 설령 지적으로 충만하지는 못했겠지만 건축가들이 모여 공론의 장을 만들고 토론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분위기는 졸업하고 건축사 자격 획득을 목표로 안주하는 삶이 아닌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게 했어요. 네덜란드를 선택한 이유는 비주류의 나라 중에는 가장 도시, 건축의 퀄리티가 괜찮다고 생각한 나라였어요. 그리고 토지 가치가 굉장히 비쌀 수밖에 없는 토지 조성 환경을 가진 나라, 그래서 건축 과정이 매우 조심스러웠던 나라, 그리고 사회적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 속의 조율자로서의 건축가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죠. 건전한 이유와 불건전한 이유가 섞인 채로 유학을 갔죠. 한국의 결혼식, 돌잔치, 부모님, 가족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건축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좋은 환경이었어요. 공론장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다양하고 심도 있는 건축 담론, 유럽 각지에서도 모이는 이벤트들이 많아 교육 과정 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상황, 대구의 상황과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시선으로 볼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돌아왔던 2000년대 후반이 우리나라가 굉장히 급변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기존의 선배들이 유학 후 누렸던 혜택들이 주어지지 않는 척박한 환경이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힘든 상황에 결과적으로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힘든 환경 속에서 유학파 출신들이 오랜 수련을 통해서 높은 수준의 디테일들을 한국도 비로소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네요. 제가 네덜란드에서 실무경험을 오래 하지 않아서 좀더 긴 기간 실무를 한 우지현 소장님이 하실 말씀이 더 많으실 것 같습니다.
우: 저는 졸업 후 실무를 ‘OMA’에서 2년간 했습니다. 지금도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비교를 해보자면 지금 저희는 건축에 몰두하기에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거기서 실무를 하며 느꼈던 것은 ‘나중에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실 직원들이 혹은 내가 건축에만 몰두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 정도로 작업에 몰두하기에 최적화된 사무실이었어요. 물리적인 환경도 그렇지만, 클라이언트, 사용하는 재료나 자세, 협업하는 팀들, 사소하게는 점심을 뭘 먹어야 할까 하는 고민조차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건축설계만 할 수 있게 만든 사무실이었어요. 그곳의 유명세도 물론 있지만, 건축 사무실이 이 정도는 돼야겠다 라는 나름의 기준이 섰던 것 같아요. 그 사무실에서 했던 여러 의미 있고 즐거웠던 프로젝트들, 새로운 것들, 외국 건축가들과의 협업, 그리고 제 뒤에 붙는 타이틀 같은 장점들보다 제가 얻은 가장 큰 경험은 건축하기 최고인 환경에서 일을 해봤구나 하는 것이 가장 큰 것 같아요.
최: 유학에 대한 경험들에 대한 저의 생각은 계속 바뀌겠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네덜란드의 상황과 학교의 특수함이긴 한데,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수와 활동하는 건축가가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 가장 저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학생수 2천명, 교직원 1천명. 너무나 많은 토론회와 이벤트, 그리고 체계화된 건축가협회, 수많은 담론의 장들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어요. 한국에만 있었으면, 건물을 단지 잘 만들기 위한 부담감이 컸을 것 같아요. 건물을 잘 짓고,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일을 많이 하는 훈련을 통해 점점 더 퀄리티 있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근데 유학 가서 한국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상황과 담론의 장 속에 풍덩 빠져보고 남았던 큰 교훈은 건축행위라는 것이 그저 건물을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의 연장선에 놓여져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저의 작은 프로젝트들로 하여금, 그것들이 쌓여서 큰 틀에서 봤을 때 세상이 한 발짝 앞으로 나가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런 의미 망 속에서 건축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들을 유학 가 있는 동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귀국 후 사무실을 어디에 잡을까, 어떤 일을 할까에 대한 생각이,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긴 건축가의 여정에서 어떻게 해야 의미가 되겠다 라는 것을 유학 중에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저에게 가장 컸습니다. 리노베이션 역시 이런 의미 속에 있는 것이고요.
오피스 아키텍톤이 나가고자 하는 길
박: 최근 첫 신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신데, 이 작업에 대한 화두, 관심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최: 저희가 계속 목조건물의 이미지로 덧입혀지는 것이 싫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어쩌면 저희는 모더니스트입니다. 건축가들이 흔히 하는 포지셔닝, 즉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건축가의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모던의 세상을 이루는 것이 꿈입니다. 그 비전이 폐기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저희 사무실의 위치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버스 대중교통이 다닌 길이거든요. 서울보다 앞섰죠. 1920년대, 한강 이남의 최초의 가로등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고요. 여기가 경상도의 근대화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가장 모던한 거리였고, 해방 후에는 공구골목으로 성장하여 대한민국의 공구 시장을 지배했던 곳입니다. 그런 배경으로 이 곳에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수많은 모던의 가치 중에 저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산업과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에게 잉여 시간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거든요. 그런 시간들을 통해 삶의 퀄리티를 높이고 사색하는 사람의 삶을 저희가 설계하는 건축환경으로 이룩하고 싶습니다. 모던의 여러 가치 중에 이런 가치를 가장 사랑합니다. 저희는 건축행위를 할 때 그런 관점에서 많이 보기 때문에 사람과 시간의 틀 안에서 사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만들어 줄까 하는 것입니다. 기능이 충족된 기밀한 집을 짓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사무실에서 진행하는 신축 프로젝트는 주변 맥락이 없다시피 한 전원에 기존 건축주의 집이 있고 이번에 멀리서 찾아오는 동생네들을 위한 작은 집과 카페 그리고 연회장의 프로그램을 갖는 프로젝트입니다. 신축 건물의 건축 개념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집이 있고, 그 안에서의 조망을 새로이 짓는 건물로 가리지 않는 것, 그래서 새로운 건물이 오브제적인 아름다움은 없더라도 옆 건물과의 관계에서는 탁월한, 이렇게 기존의 집을 의식해서 설계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공간이 비어 있지만, 그 공간이 결국 거주자와 방문자의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공간이 되는 설계를 진행 중입니다. 기존의 집을 포함한 4개의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건물 4동이 집합하여 공유하는 공동의 마당이 주요한 목표입니다. 사실 지금 작업이 3, 4주 진행된 단계라 풍요로운 계획은 아직 미비하네요. (웃음)
박: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무실의 모습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네요. (웃음) 싫어서 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장소에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일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현재는 사무실 여건 상 한 프로젝트에 세명의 소장과 전 직원이 다 붙어서 진행하는데, 나중에 여건이 되면 각자 하나씩, 혹은 듀엣으로.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