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재건축사사무소_ 김주경, 최교식


까마귀 오 烏, 깃 우 羽, 재계할 재 齋

김주경
1972년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학 학사, 석사를 마치고, ㈜경영위치건축사사무소에서 7년간 재직했다. 2007년 3월 최교식 소장과 함께 오우재건축사사무소를 오픈했다.

최교식
1975년 출생. 서울대학교 건축학 학사, 석사를 마치고, ㈜에이텍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6년간 재직했다. 2013년부터 이화여대 겸임교수로 있다.

오우재 건축사사무소는 2007년부터 주택, 리모델링, 도시계획 및 연구용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완도 청산도 가고 싶은 섬 시범사업으로 2012농어촌건축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청산도에 느린섬 여행학교 Project에 참여했다.

www.oujae.com



오우재의 건축

김주경(김): 한국의 젊은 건축가인터뷰를 진행하기에 앞서서, 많은 젊은 건축가들 중에서도 오우재를 어떻게 생각하였기에 선택하였는지 궁금해요.

박창현(박): 처음에는 적정범위라고 설정한 연령순을 기준으로 한국의 젊은 건축가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건축에 대한 발언을 하였거나 자신들의 작업을 미디어를 통해서 오픈 하였던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고 싶었습니다. 오우재에서 작업했던 몇몇 건물들을 직접 다녀오기도 했었고, 제 주변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궁금했습니다.


김: 솔직히 저희가 대외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을 많이 싫어해요. 2013년에 「젊은 건축가상」을 받으면서 노출이 되었고, 사람들이 찾아볼 것을 의식하여 작년에서야 홈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이전부터 도메인을 사둔 것이 있었지만, 계속 공사만 하고 있었어요. 우리의 성격 때문이기도 합니다. 최소장님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자신들이 몰입하여서 재미있게 한 것들을 스스로가 확인할 때 가장 흐뭇하고 좋습니다. 단, 그것들이 욕을 먹어야 하는 수준이 되어서는 안되겠죠. 적어도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까지 건축을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이 아니면 안되었거나 꼭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면 건축을 못했을 것 같아요. 저희는 건축을 대하는 자세가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건축” 내지는 “도시의 풍경을 변화시키는 건축” 등과 같은 담론적인 접근들을 경계합니다. 물론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겠지만 그렇게 접근을 하면 건축이 너무나 재미가 없어요. 뭐랄까, 건축의 정파는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박: 다른 건축가와는 좀 다르게 정파라는 의식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파라는 단어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오우재에서 생각하는 건축의 정파는 어떤 것인가요?


김: 저는 개인적으로, 건축하는 사람들 간의 모임에서도 건축에 대한 얘기를 절대로 하지 않아요. 대신에, 놀러 갔다 온 이야기나 최근 시사에 대한 이야기 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잡스러운 이야기들을 즐겨 합니다. 그런 제가 우연찮게 선배들의 모임에 딱 한 번 갔었는데, 한자리에서 건축에 대한 이야기만 몇 시간 동안을 하시더라고요. 지치실 만도 한데 지치시지 않는 것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제가 하고 있는 것들이 “정파”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알고 보니 “사파”라는 생각이 드는 때였어요. 이러한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건축의 정파”인가 보다 했지요. <웃음> 약간 어렸을 때는 이런 상황들을 야유했을 것 같은데, 지금의 생각으로는 제가 갖지 못한 것을 그들은 가지고 계셨던 것이라 생각해요. 뿐만 아니라, 저 정도로 좋아하는 것에 집중을 하면 “건축도 잘 할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통해서 약간의 반성을 했었어요. 그것이 2013년 일이었죠. 저희는 건축적인 것에 대해서 가볍게 시작을 했지만, 그것의 결과물이 진지하게 완성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정을 매우 중요시할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 과정을 대하는 자세는, 독립하기 전에 경험을 했던, 이전 사무소들의 영향이 큽니다. 건축적인 것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굉장히 진지한 사무소들 이였어요. 어쨌든, 저희들의 시작은 매우 가볍기 때문에 인터뷰의 질문이 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건축적인 컨셉을 묻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질문을 싫어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컨셉이 없었기 때문에 부끄럽기도 하고, 두 번째는 “그 컨셉을 알아서 뭐하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무언가에 몰입되어서 재미있어지는 것들이 건축에서 좋을 뿐입니다. 도면을 그리고, 집을 짓고,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티격태격 하고, 그러면서 집 하나씩 만들어 가는 것이 재미있어요. 그렇게 중요시된 과정들을 통해서 완성한 것들이 우리 마음에 들면 성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박: 혹시 그렇게 즐겁게 작업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었나요?


김: 많지요. <웃음>


청산도 프로젝트

박: 저는 예전에 공공공사가 주관한 몇 건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진행했던 프로그램으로 어촌에 있는 작은 마을의 복지회관이 있었습니다. 설계 납품까지는 좋았는데, 공기업 내부적으로 설계자가 감리를 못하게 되어 있어 건물의 결과에 대해 관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저가 낙찰을 받은 시공사에 의해 변경되는 일이 당연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오우재의 청산도 프로젝트 얘기를 듣고 나서 그곳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렇게 오우재에서 진행한 청산도에 있는 건물들은 전부 둘러보고 왔습니다.


김: 지인들이 청산도에 가신다고 하면, 누누이 얘기하는 것이 있어요. 잠자는 곳으로는 저희가 설계한 곳이 비교적 낫고요. 건물 보다는 수려한 자연을 많이 보시라고 합니다. <웃음>

박: 공공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을 듯합니다. 오우재에서 처음 청산도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김: 2010년 3월에 김용미(금성건축사사무소)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는데, 첫 말씀이 “주경이 요새 일 없나?”였어요. 그 당시 일이 없어서 손가락을 빨고 있었습니다. <웃음> 저희는 일을 가릴 때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었고, 금성건축으로 연락을 해왔었던 청산도 프로젝트에 대한 것을 선생님께서는 “우리 사무소의 규모에서는 쉽지 않은 일 같아서 소개시켜 주는 거니까 한번 해봐”하시더라고요. 저는 “네, 알겠습니다” 했지요. 그렇게 통화를 마친 뒤에 군청과 미팅약속을 잡고 나서 하루 전날에 내려갔었습니다. 청산도에 도착한 뒤에 현장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서 되돌아왔어요. 그 당시만 해도 버스는 없었는데, 택시는 딱 3대가 있었죠. 그렇지만 우리는 몰랐어요. <웃음>

박: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요? 차로 이동해도 한참 걸릴 정도로 거리가 꽤 있는 곳인데.


김: 한나절 걸렸던 것 같아요. 정말 한참을 걸어서 다녔죠. 그런데, 오히려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동과 서로 섬을 완전히 스캔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기 진짜 예쁘다”라는 것을 느끼고, 군청으로 갔어요. 계약을 할지 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먼 길 놀러 온 셈치고 가벼운 맘으로 들어갔는데, 담당자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 오셨군요.”하면서 부담스럽게 맞이해 주었어요. 그래서 무슨 일인지 들어봤더니……. 원래는 발주가 이미 나갔었는데, 설계된 것들이 심사에서 3번 정도가 부결되었던 거였어요.

박: 그렇게 부결된 안을 보셨나요? 그렇게 부결된 이유가 어떤 것 때문이었나요?


김: 계획안에 대한 수준이 낮았던 것 같아요. 청산도 선착장의 초입에 있는 「방문자센터」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계속해서 통과되지 않는 기존의 계획안에 화가 났었던 군청의 담당과장님이 새로운 사람을 추천해 줄 것을 컨설턴트에게 요구했었던 상황들이었죠. 그렇게 제가 그곳에 등장하게 된 거였어요. 그리고 뭔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었던, 담당자들은 지금 당장에 계약을 하자는 거였어요. 그렇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선뜻 계약할 수는 없는 것이 저희만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방문자센터」에 대한 계획안을 진행하는 조건으로, 발주예정 이였던 청산도의 「돌담체험시설」과 「향토역사문화전시관」 2건을 함께 계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방문자센터」를 먼저 시작하게 되었죠. 결과적으로 우리는 동시에 3건에 대한 계획안을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심의위원회는 「슬로우시티」와 「가고싶은섬」 두 가지를 통과해야만 하는 만만치 않은 진행들이었어요. 우리가 준비한 「방문자센터」 계획안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군청의 담당자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었어요. “이 건물을 제대로 지으려면, 우리가 감리를 무조건 해야 한다.”라고……. 일정 금액 이상의 건물은 분리발주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방문자센터에 대한 계약은 하도급 관계로 계약이 되면서 우리가 주 계약자가 아닌 상황이 되었어요. 그래서 제안을 했었고, 결국에는 감리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박: 그 당시에 청산도가 「슬로우시티」 사업으로 국가에서 지정되어 있었나요?


김: 처음으로 지정된 사업이었어요. 청산도, 증도, 담양, 장흥, 이렇게 4곳이 처음이었습니다.

박: 공공건축에서의 문제점을 미리 파악하고 그 부분을 가능하게 해 놓고 일을 시작하셨던 것이었군요. 혹시 방문자센터처럼, 「여행학교」도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김: 청산도에서 설계 감리를 하고 있었을 때 일입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여행학교」는 다른 사람에게 설계가 이미 끝났을 뿐만 아니라,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어요. 하루는 담당자의 부탁으로, 공사 중이었던, 여행학교현장을 방문했었습니다. 1층의 공사는 어느 정도 끝낸 상황이었고, 2층과 옥상 부분을 공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2층의 천정 슬라브가 심하게 부식된 상태임을 뒤늦게 확인하고 나서 저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었죠.

박: 네 저도 그곳에서 하루 숙박을 했었습니다. 기존에 2층이있던 건물인가요?


김: 맞아요. 기존에는 학교 건물이었고, 2층은 교실이었죠. 그곳을 숙박시설로 공사하고 있었어요. 저는 구조안전진단을 받고 나서 상태가 심각하면 철거를 해야 한다고 무덤덤하게 말했어요. 그러자 담당자가 좀 더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상태가 안 좋은 구조 부분들을 덜어낼 건 덜어내고 보강할 건 보강한 다음에 2층부분의 숙박시설은, 가벼운 경량 목구조를 사용해서, 방갈로 형식으로 만드는 것은 어떻겠냐고 가볍게 말했어요. 그리고 덧붙여서 한마디 했죠.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교실에 대한 추억들이 좋을 리가 없다고……. <웃음> 그렇게 제 말을 듣고 있었던 담당자가 대안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어요. 이유는 군수님한테 직접 보고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조안전진단의 결과가 나오는 날짜로 군수보고회의가 열렸었고, 저는 담당자와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예상했던 진단 결과가 나온 상태에서 제가 간략히 준비한 대안으로 설계가 변경되었지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웃음>어쨌든 그래서 「여행학교」를 시작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감리까지 맡겨주었어요. 「방문자센터」와 동일한 상황이었거든요.

박: 오우재에서 「여행학교」의 본 건물 뒷 편에 있는 작업장과 입구의 관리사무소도 설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산도 프로젝트에서 그렇게 여러 채를 할 수 있었던 동기가 있었나요?


김: 「여행학교 작업장」이 있는 곳은 예전부터 마을단위 기업이 관리하는 된장을 만드는 좁은 장소였어요. 프로그램에 맞는 넓은 작업장이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기존에 농협창고와 함께 사용하던 일부분을 하나로 합치는 방식으로 진행했던 겁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행학교 관리사」도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여행학교의 중간 계획까지는 없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운동장 부분이 예산 문제로 방치된 상태였는데, 방치된 운동장을 군수님이 직접 확인하고는 잔디를 심기로 결정했었죠. 그러면서 관리사무소를 지을 예산이 옮겨갔던 겁니다. 일단 그렇게 해서 잔디를 심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프로그램 상 관리사무소가 꼭 필요했던 거였어요. 이런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 청산도 프로젝트사업이 진행됐던 거였어요. 시범사업단의 조사에 따르면, 「슬로우시티」와 「가고싶은섬」 사업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가 청산도라고 하는데, 사실 청산도 프로젝트는 공무원 한 사람 덕분에 성공한 겁니다. 당시 담당자였던 주무관이 대단한 일을 한 거죠. 보통 지역발전 관련사업들을 들여다보면, 시설에 대한 발주를 시작으로 물리적인 여건을 조성한 다음에 저걸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문제점들이 발견되기 시작하죠. 그런데 청산도 프로젝트에서는 주무관이 예산을 확보한 상태에서 시설 발주를 늦추고, 소프트웨어를 먼저 발주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세웠어요. 그래서 주무관이 마을 주민들을 교육시키면서 관광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프로그램에 필요한 시설들을 역으로 제안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계획에 맞춰서 「방문자센터」를 짓고, 버려진 면사무소를 「향토역사문화전시관」으로 활성화하는 등의 순서로 이어졌던 겁니다.

박: 애초부터 없었던 프로그램을 먼저 만들고, 그 프로그램에 맞춰서 필요한 것들을 찾아냈다는 거군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인데, 노하우가 있었네요. 저 역시 프로그램이 없으면 건물을 아무리 잘 지어 놓아도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청산도는 적절한 장소마다 건물들이 잘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섬 전체적으로 많은 시너지가 나타났던 거군요. 청산도 프로젝트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좋은 모범사례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좋은 프로그램과 발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진행한 담당 주무관이 있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많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프로젝트의 한계

박: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농어촌 프로젝트를 다루는 시스템들은 많은 한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우재가 진행했던 다른 프로젝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최교식(최): 저희가 농어촌 일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것은 2008년도입니다. 영월군이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사업으로 시행했던 현상설계에서 당선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시작하게 되었죠. 결과적으로는, 중간 과정에서 많은 부분들이 바뀌면서 「살기 좋은 장릉마을 만들기」에 대한 내용들은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박: 농촌 마을의 마스터플랜을 제안했었던 것인가요? 그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최: 처음에는 계획안의 모든 부분들이 승인된 것처럼 시작되었지만, 공사가 진행되면서 전부 바뀌었어요. 마을회관인 「능말돌봄센터」의 설계만 하더라도, 현상설계를 제외하고, 4번을 수정했습니다. 처음에는 문화재 심의가 있는 지역인데 설계가 너무 현대적인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한옥으로 했더니, 예산에 부적합 하다는 이유로 또 부결됐어요. 그 비용을 맞추기 위해서 기와집이 아닌 너와집의 형식으로 수정했지만 또 부결되었죠. 그렇게 수정을 하면서 결국에는 콘크리트와 벽돌을 사용한 한옥을 흉내 내는 집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우리는 과정에 충실했었기 때문에 괜찮았던 프로젝트였어요. 그리고 「능말돌봄센터」는 농어촌 건축대전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웃음>

박: 제가 관공서와 함께 일을 하기 전에는 농어촌의 풍경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모르기도 했었던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도시의 성격에서 벗어난 지역들을 나중에 생각하게 되면서 관심이 생겼었고, 건축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시의 밀도와 형식이 다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시골에서는 느닷없이 고층의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과 같은 무분별한 방식들이 우리의 농어촌의 풍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보면서 농어촌을 무분별한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어떻게 할지 또는 규칙들을 만들어야 할지 등과 같은 고민들이 생겼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우재는 농어촌의 여러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어떤 생각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저 역시 외진 지역을 지나가다가 나 홀로 아파트가 서있는 것을 보면서 너무 이질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지역주민들은 이곳에서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를 흉물스럽다고 생각 했었는데, 요즘에는 “저기서는 따뜻한 물이 잘 나오나?” 등과 같은 기능과 편리함의 기준으로 아파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저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파트라는 것은 ‘욕망덩어리’다 보니까, 어디에서든 세워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박: 그러니까 지역의 분들이 생각하는 아파트는 형태나 형식이 아닌 기능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꼭 아파트 이어야 하는 것인지는 좀더 고민해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김: 아파트라는 상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아무리 아파트가 흉물스럽다고 할지라도, 아파트가 현실적으로 들어오게 된 인식 없이 부정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인식이 저는 명쾌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기존의 집들이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죠. 그 뿐만이 아니라, 집의 안전에 대한 것들도 그렇고, “도시에 갔더니 삐까번쩍한 집들이 있던데, 우리는 그런 곳에서 왜 못살아?” 와 같은 욕망이 함께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그런데, 그 발현되는 방식이 다른 것들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죠.


김: 방식이 다른 것들을 아파트가 지어진 이후에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아요.

박: 도시에서 했던 방식을 도시가 아닌 곳에서도 그대로 하는 지금의 상황은 이전에 어떠한 이야기나 논의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방식들은 그 지역의 컨텍스트Context와 맞지 않는데 말이죠.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 어쩌면 우리는 또 아파트가 익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의 방식을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을 제시하거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김: 저 역시도 대안에 대한 것을 끄집어 내는 것은 대환영입니다. 지금의 아파트와 같은 상황들을 연착시킬 수 있는 방법론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그 중 하나가 저가로 지을 수 있는 집을 많이 보급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박: 농식품부에서 매년 발표하는 ‘농어촌 표준주택’과 같은 건가요?


김: 사실 표준주택이 저가방식은 아닙니다. 표준화된 평면을 모든 것에 적용하기 때문에 저가 방식이 나올 수가 없어요.

박: 어쨌든 설계와 시공에 대한 비용을 줄이고자 ‘표준주택’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요?


김: 우리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에는 ‘표준주택’도 있습니다. 농식품부에서 표준주택을 저가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기존의 표준주택이 저가방식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각각의 전문 분야의 사람들로 구성된 20인의 자문위원들을 전부 만족시킬 수 있는 공통의 해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박: 전문분야의 그 많은 자문위원들은 언제부터 개입되는지요?


김: 모든 단계의 설계 과정들은 심의를 거치는데, 그때마다 자문을 받습니다. 매우 무서운 프로젝트죠. <웃음> 그래서 처음 시도할 때에는 주변 사람들이 말렸었습니다.

박: 모두가 만족하는 모든 것을 적용하면서 설계를 하기에는 너무 어렵겠네요. <웃음>


김: 그래서 이번에 나온 내용이 표준주택이 아닌 적정주택입니다. 말만 적정주택이지, 저가주택이라고 말하면 어감이 좋지 않아서요.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을 하니까 20명 중에 15명 정도의 의견들은 적정한 범위 안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웃음>

박: 그렇군요. 적정한 범위를 벗어난 이야기들이 나오면 비용이 많이 들어서라는 조건이 생기니까요. <웃음> 그런데 ‘농어촌표준주택’ 프로젝트는 왜 시도하게 되었나요?


김: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어요. 어쨌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결과가 우리나라 농어촌 표준주택으로 바꿔질 것 같지는 않아요. 오히려 저희가 바라보는 시선은 지역에서 ‘건축가 없는 건축’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애써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의 농어촌이나 해안마을에서 10년 내지는 20년 정도된 슬레이트 또는 기와 지붕 그리고 그 지붕 위에 원색의 색으로 마감해 놓은 것과 같은 모습들을 보면서, 화려하거나 산만한 것을 떠나서, “이것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풍경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지금은 그런 곳에서는 다른 재료를 사용해서 새로 지은 집들이 더 보기 싫은 것 같아요.


박: 예전에 제가 돌산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의 환경 개선에 대한 프로젝트를 한번 참여했었습니다.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마을을 답사하면서 든 생각이 “이 마을은 분위기 있고 괜찮네. 청소만 잘 하면 되겠다.” 였었습니다. <웃음> 마을에 방치된 쓰레기가 너무 많은데, 그것만 정리해도 자기 색깔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그것은 저만의 생각이었고, 제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프로젝트가 됐어요.


김: 저희도 역사 문화 마을 가꾸기 사업에서 자문위원으로 참여를 했었는데, 그때 당시에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 마을에 문화재로 지정된 한옥이 한 채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농가 주택들이었어요. 농사를 짓는 마을에서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쓰레기 처리잖아요. 그래서 집집마다 농업쓰레기 처리함을 만들어 주면, 방치되는 쓰레기를 예방할 수 있겠다고 생각되어서 예산을 계획해 뒀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을에서 쓰레기통만 디자인이 잘 되어 있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그 예산으로 멀쩡한 기존의 시멘트 담장들을 철거하고 싸리울을 만들면 좋아질 것 같다면서 계획을 변경하는 것이었어요. 민속촌처럼이요……. 결국에는 마을주민들이 싫어해서 계획이 무산됐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도시계획가 라든지, 건축가 라든지, 행정가 라든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농어촌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늘 거만한 것 같아요. “이것을 바꿔주면 좋아질 거야!”라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박: 우리나라에서 그런 프로젝트들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한계의 원인이 한편으로는 획일적인 계획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즉 몇몇 소수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것들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독점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전문가 자신들이 볼 수 있는 시야는 한정되어 있는데 말이죠.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도시와 농촌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김: 그와 비슷한 이유로 망가진 사례가 저는 청산도 항구 마을의 야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둣가에 면한 가게들이 기존에 사용하던 판류형 간판을 전부 다 바꿨는데, 서울에서 보이는 스카시 간판들이었어요. 청산도는 예전부터 라이트 라이프Light-Life가없어요. 그렇지만 가게들은 초저녁이나 구름 낀 날에 어둑어둑해지면 간판조명을 켜둡니다. 그러면 가로등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가 되죠. 부둣가에 면한 네모난 간판들이 줄지어서 불이 켜져 있으면 그만한 풍경이 따로 없었어요. 그런데 작년에 그걸 깔끔하게 갈아버린 거죠. 안타까웠어요. 저는 서울에 스카시 간판들이 줄지어 있는 청계천의 야경을 보면 숨이 막히거든요.
최: 저는 서울이 다 그래요. <웃음>

김: 저도 서울이 다 그래요! 그런데 이렇게 분개하다 가도 드는 생각은 “이것도 10년이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입니다. <웃음> 예전에 정석 박사님이 과격하게 하셨던 말씀이 있는데, “서울시가 10년동안 아무 일도 안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10년 이후에 상황을 보고 나서 조치를 취하자.” 였어요. 그렇게 해야지만 서울시가 잘 되는 꼴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받아들여지지는 않죠. 시에서는 뭔가를 무조건해야 되나 봐요.

최: 풍경을 바꾸거나 도시의 모습을 바꾸려면, 결국에는 프로그래밍과 정책인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잘 기능을 해주면 집들은 조금씩 바뀌어 나가겠죠. 물론 그 전에 소프트웨어를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어렵다면 정부에서는 계속 아파트를 독려하겠죠.


박: 행정 자체가 계속 물리적인 뭔가를 만들고 나서 고민을 하는 상황이 나타나는데, 그것부터 항상 문제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앞서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를 했었지만, 그것들이 동네마다 전부 다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누가 어떻게 찾아내는 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김: 그런 방식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또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들을 꼭 해야만 한다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물리적인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죠. 결국 지역 주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타까워합니다. 저는 그런 태도가 가장 안타까운 것 같아요. 주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무엇이든 하면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흔히들 그냥 하죠.


개인과 공공성

박: 어쩌면 그곳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동기나 기회들을 상실했거나 박탈당했던 것은 아닐까요? 지역발전에 관련된 어떤 사업성을 떠나서, 개개인 스스로 욕구하는 것들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자발적인 방식이라기보다 수동적이고 관공서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이 어렵게 진행되는 모습도 보입니다.


김: 그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공 건축물이 아닌 일반적인 건축물들은 보통 한 사람의 소유이다 보니까, 그 사람 한 명과 소통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소통의 대상이 마을 단위로 커지게 되면서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제가 생각하는 원칙 중의 하나가 “개인의 것이 있을 때, 공공이 있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것이 없으면 공공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

박: 그런데, 그것은 도시와 도시가 아닌 지역과는 조금 다르지 않나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지역의 마을들 같은 경우에는 친인척 관계의 부락으로 형성된 마을들이 많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공동체적인 관심의 것들이 만들어지지는 않을까요?


김: 예전에 제가 씨족 마을과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안성지역의 해주 오씨 마을입니다. 동족촌이기 때문에 해주 오씨가 아닌 사람들은 며느리 말고는 없어요. 다시 말해서 며느리들은 해주 오씨가 아무도 없죠. 그곳에서 제가5개월 동안에 마을 주민들과 관계를 맺어가면서 찾아낸 것이 있어요. 실제로 그 마을을 가꾸는 사람들은 해주 오씨가 아닌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일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해주 오씨 마을은 동족촌이기 때문에,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설정으로 진행을 했었어요. 왜냐하면, 해주 오씨 문중하고만 얘기를 잘 하면 마을 주민들이 문중의 의견을 기준으로 따라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던 문중의 상임 이사이자 마을의 이장님 조차도 문중을 설득하지 못하면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어요.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을 회의를 관찰해 봤죠. 문중 위원회, 추진 위원회, 부녀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부녀회만이 발언을 안 하는 거였어요. 이것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부녀회장님만 따로 찾아 뵀어요. 저만 듣겠다는 조건으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었는데, 지금껏 말 못하고 담아뒀던 것들을 막 꺼내시는 거였어요. 그렇게 의견 조율에 대한 부분들을 거꾸로 맞췄어요. 그리고 나서 비 해주 오씨들끼리 그룹을 지어 줬더니,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더라고요. 저는 상징적인 공동체가 마을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끝났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개개인의 영역들이 존재해야 공공의 커뮤니티가 생긴다는 겁니다. 이것을 박인석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프라이버시 없는 커뮤니티는 없다.” 입니다. 다시 말해서 극단적인 커뮤니티는 공산당인 거죠. 그래서 공동체를 앞세운 것들은 마을 소통에 있어서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박: 건축적으로 오우재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성향은 많은 부분에서 활짝 열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한국에서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시스템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거죠. 혹시, 오우재가 프로젝트들을 경험하면서, 시스템적인 부분에서, “이것만은 조금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었던 적은 없었나요?


최: 조금 애매한 생각들이지만, 어떤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서 또 다른 시스템이 나타나잖아요. 결국에는 시스템의 뭔가를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바꾸거나 고치면서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들은 정치적인 것과 행정적인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정치 또는 행정에서 그 시스템을 다룰 수 있는 건축에 대한 지식들이 풍부 하거나 전문가들의 의견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직위를 줄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적으로 행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런 능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정고시와 같은 시험으로 사람을 뽑고 나서 직위를 주는 방식 말고요.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저희가 완도에서 만났었던 그 공무원처럼 특출 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무언가가 잘 되기는 쉽지 않다는 거죠.

박: 지금의 시스템에서 완도의 청산도 프로젝트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던 것 같아요. 그런 좋은 사례가 있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좋은 사례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2014년 8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