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oa건축사사무소_ 서재원


친밀한 낮설음, 논리의 감성을 구축해 나가는.

1974출생. 97년 단국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경기대 건축전문 대학원에 들어갔다. 2003년 대학원 졸업 후 JINA Architects에서 11년간 실무를 쌓았으며, SK플래닛 판교사옥과 외대 용인캠퍼스 신본관의 디자인을 총괄했다, 2013년에 aoa architects로 독립하였고, 2009년부터 단국대학교 건축학과에 출강 중이다.



STUDIO Teaching

박창현(박): 오랫동안 첫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일을 하면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으며 출강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재원(서): 언젠가부터 학생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 그랬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때는 큰 회사에 다니던 때라 제 작업이라 할 만한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깨어 있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건축 일을 하는 회사원’이 될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건축에 관한 저만의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쌓여 가면서 그것들을 실험 혹은 확인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학교를 생각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러던 차에 금융위기가 와 진행하던 프로젝트도 홀드가 되었고 거의 동시에 학교에서 우연한 기회가 왔습니다. 그날로 바로 달려가서 코디네이터 교수님을 뵙고 술 마시면서 이야기했죠. 잘 할 자신이 있으니 무조건 맡겨달라고……. 그렇게 학교와는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박: 회사를 다니면서부터 가르치는데 지금까지 몇 년째 가르치고 있나요?


서: 올해로 6년째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의미라면 글쎄요……. 사실 학교에 처음 나갈 때는 학생들에게 많은 영감도 얻고 그러길 바랬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런 측면은 거의 얻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학생들은 창의적이지도 않고, 창의적인 것은 둘째 치고 라도 너무 기본을 모른 채 튀려고만 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요즘 저는 어느 정도 훈육 displine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전 보자르 학교식의 마스터 클라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뭐든지 다 알아서 하라는 방임도 아니라고 봐요.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하여간 지금은 그 적절한 선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설계수업은 결국 제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확인해 보는 과정입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선생 본인이 결코 애매한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건 일종의 교수법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어요. 최소한 선생으로서의 자신만큼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명확히 정의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면 선생도 계속 수정해 나가면서 재정의 해야겠죠. 그런 과정은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아주 심지어 기본적인 질문을 매 학기 다시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건축이 무엇인지……공간이 무엇인지……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계속 생각을 정리하게 되죠. 재미있는 것은 저도 계속 바뀌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출강의 또 하나의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할 순 없습니다.

박: 유명한 건축가들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은 각자가 가진 철학 때문 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르치기 위해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고 그것이 생각의 정리와 연결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내용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나요?


서: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저의 건축 철학이나 개념으로 학생들을 계몽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학생들이 판단하는 것이죠. 설계 수업은 제가 평소 관심을 가지고 확인해보고 싶었던 부분을 실험합니다. 최근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건축 자체로부터 발생되는 건축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건축 그 자체에 집중한 건축입니다. 요즘 건축은 사회학, 인문학 등을 이야기하는 것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고 봅니다. 건축가는 사회학자 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인문학자, 심지어는 목사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건축가인 본인 조차도 정작 스스로가 건축가로 한정하여 정의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건축가가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짐을 스스로 과도하게 떠안고 힘들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이런 현상들에 대한 반감의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저는 건축을 사회적인 윤리보다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자아의 표출로 건축을 보고 있습니다. 일례로 이번 학기 작업은 서촌 공동주택 프로젝트였는데,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보다는 공동주택의 중심을 길게 가로지르는 공용계단의 위치에 따른 주거 배치가 만들어 내는 평면이나 유닛 내부의 계단이 건물 전체의 구조와 입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등의 건축의 실제적 문법 혹은 이상적인 형식에 대한 부분을 주로 실험하였습니다. 물론 사회적인 문제 등을 완전히 외면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레벨에서 사회성보다 주거 각층 복도에 놓인 자전거 보관대 하나가 더 사회적인 부분을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한 학기 내내 심각한 이야기만 하다가 정작 유닛 평면 없는 매스 배치 모델로 끝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죠. 최소한, 맞든 틀리든 공동주택 프로젝트면 주거 평면의 벽 하나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하튼 저는 지난 2-3년 전부터 건축이 가지는 구법과 형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런 것들을 학생들과 같이 실험하고 있습니다.

박: 저도 사실 사무실 일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분리해서 진행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두 일이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사무실에서 실험을 해야 하는 기본적인 구법의 스터디를 학생들과 직접 확인해보려 합니다. 기본적인 부분들, 건축의 어휘와 구법에 관한 것들을 1학년들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학적, 역사적, 철학적, 사회학적인 것 들로부터 오는 건축을 가르치는 사람 그리고 건축의 원론적인 구법과 어휘를 가르치는 사람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재원씨가 지금 관심 가지고 있는, 학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어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 듣고 싶습니다.


서: 한가지 예를 든다면 ‘기둥’이라는 요소 element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둥은 건축을 대표하는 메인 부재이죠. 건축을 가장 건축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소가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주두에 온갖 장식을 하고 한 시대를 대표했던 중요한 요소였는데, 현대로 오면서 기둥은 단지 중력을 전달하는 매개 역할로만 여겨지죠. 도리어 성가신 것이라 없애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중력에 반反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 기둥은 틀어지고 사라집니다. 모더니즘 이후에 기둥은 점점 얇아지고 기술의 발전이 이기나 중력이 이기나 경연하는 듯 뽐내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요즘 저는 오히려 건축을 가장 건축 답게 만드는 그 기둥에 대한 찬양으로 일종의 오마주homage를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면 패러디parody일 수도 있습니다. 기둥과 슬래브가 접합되는 형식에 대한 문제, 의도적으로 축열에서 어긋난 기둥과 공간의 스케일에 맞지 않는 기둥의 크기, 위치 등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계단도 있는데 계단은 원래 슬래브와 슬래브를 수직적으로 이어주는 매개지만 오히려 슬래브와 떨어져 있다거나 매달려 있는 상황, 계단이 오히려 공간의 한가운데서 구조의 역할뿐 아니라 공간을 구분하는 시스템으로서의 평면, 그런 것들에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러한 것들은 윤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학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겠죠.



기이함을 만드는 Element

박: 설명한 내용에서 사용된 단어들은 어쩔 수 없이 서구적인 어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건축이라는 단어 자체가 서구에서 왔고, 토대 자체가 서양의 건축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그런 서구의 틀 안에서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렘 쿨하스 가 말한 ‘요소element들을 누가 어떻게 정했느냐, 왜 그 단어를 써서 우리가 우리 것으로 해석해서 쓰는가?’ 그 시작점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대응할 수 있는 태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받아들이고 그 서양의 룰(툴 과 틀) 안에서 내 것을 이야기한다는 태도와 우리 것으로부터 끄집어내고 그 이야기를 한다는 태도로 나뉠 것 같습니다. 서재원씨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후자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서: 건축은 자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소element를 말씀하셨는데 요소들을 쪼개는 방법도 많습니다. 어디서부터 요소로 볼 것인가 하는 것도 본인의 주관적인 설정이죠. 물론 우리는 꼬르뷔제의 돔-이노 시스템 이후로 슬래브, 기둥, 계단 등으로 요소를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물성으로 요소를 나눌 수도 있고, 계단만도 더 세부적인 요소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도 렘이 보여준 요소도 생각보다 훨씬 세분화되고 다른 방법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이 모두 작가의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정해진 요소라는 것은 없죠. 제가 보고자 하는 부분은 요소를 어떻게 분류할 것이냐의 문제는 아니고, 요소 자체와 그 요소들을 엮는 일종의 문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 서양의 문법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가지고 작업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계단, 슬라브, 기둥 등의 요소가 꼭 서양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 부분은 이미 지역을 떠나서 너무나 보편적인 형식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앞서 말씀하신 우리 것으로부터 끄집어내는 태도, 예를 들면 한국적인 고유의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거나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은요.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모르겠지만요. 솔직히 말하면 아직 한국의 전통건축을 보면서 대단한 감동을 받고 우리 것이 정말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몸소 느낀 적도 거의 없고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 순전히 사적인 취향으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들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긴 합니다. 한국적 삶과 일본의 형식이 혼재된 적산가옥이라든가 한국의 문화와 서양의 형식이 혼재된 절충 양식의 근대 유산들, 그리고 요즘에는 60-70년대 지어진 집 장수들의 집들에 호기심이 있습니다.

박: 60-70년대의 한국의 집 장수들? 아주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집 장수들의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서: 딱히 집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소위 ‘디자인’이 안된 그때 당시의 건물들이 만들어낸 형태와 구조의 솔직함, 전혀 작가적이지 않은 태도에서 미학적으로 집착하지 않은 어설픈 디자인과 디테일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어색함에 관심이 갑니다. 슬라브는 두껍고 벽돌은 커튼월 방식이 아닌 슬래브 위에 얹히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다 보니 슬래브 단면은 노출되고 외부 캔틸리버 계단에는 둔탁한 보가 따라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도 디자인 요소는 좀 가미해야 할 것 같으니 만들어 낸 일명 뻐꾸기 창, 그런 것들이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당시에는 여러 상황들이 적당히 만들어낸 그냥 집일 텐데 사실 지금 보니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 거긴 하죠. 하지만 솔직히 요즘 지어지는 가식투성이의 숨막히는 조악한 디자인의 건물 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박: 맞아요! 그 당시에는 돈이 없고 싼 재료가 벽돌이었고, 게다가 인건비도 그다지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조적이 많이 사용되었지요. 그런데 그 당시의 재료로서의 벽돌은 그 당시의 이미지 때문에 전면 파사드에 돌을 사용하고 옆과 뒤의 보이지 않는 입면에는 어김없이 사용되어 숨기고 싶은 재료였습니다. 비단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보여지고 이탈리아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이분법적인 입면 재료 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었지요.


서: 그건 지금도 그래요. 재료의 문제를 떠나서 일반적인 디자인 수법인 거죠. 서울시청도 그렇고, 광화문 앞에 있는 트윈 트리도 그렇고. (웃음) 하여간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은 일종의 작가적 관점으로서의 비非작가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디자인’이 넘쳐나는 것에 일종의 반反감이 있어요. 보가 필요하면 보를 만들고, 기둥이 필요한 곳에 기둥을 세우고, 벽이 있어야 하는 곳에는 벽을 만드는 것이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의도적으로 보를 없애고, 무리하면서까지 기둥을 없애고 그러는데, 오히려 그런 것을 역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박: 앞에 말한 기둥은 시각적인 구현, 표현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말하는 한국의 70년대 건축은 기능위주의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스러움으로 접근은 좀 다르다고 느껴져 그 접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상반된 이야기와도 같아 보입니다.


서: 기둥에 대해 말한 부분은 질문이 교육에서 어떠한 것을 위주로 가르치냐는 질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건축적 문법의 변형을 기둥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박: 그렇다면 교육의 입장과 개인적인 작업의 입장이 다른 것 아닌가요?


서: 전혀 안 이어진다고 할 수는 없어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두 가지 모두는 기본적인 요소 혹은 문법에 충실합니다. 그리고 그런 문법을 약간씩 어기며 만들어내는 변형들, 혹은 자연스럽지만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무언가, 결국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느낌들이 있습니다. 작가적 태도와 과정으로 보면 두 가지가 상반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제가 흥미롭게 보는 부분은 결과적 상황 혹은 분위기? 그런 것입니다. 대단히 일상적이고 당연해 보이지만 뭔가 이상하고 어딘가 어색한 것? 그런 것이겠죠.

박: 당시의 한국 상황은 재료를 다루는 기술도, 구법의 다양성도 부족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상황인데 지금은 그때의 현실과는 전혀 다르지 않나요? 그 관심을 가지고 지금 어떻게 하려는 건지 궁금합니다.


서: 그것들을 그대로 따라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공간 한 가운데 박힌 거대한 사선 기둥이 애매한 상태를 만들어냈지만 그것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상태, 현실적이지도 그렇다고 비현실적이지도 않은 초현실적 상태라고 할까요? 이러한 것이 만들어 내는 다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 그런 기이한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한편으로 과장된 몸짓 혹은 불필요한 장식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건물이 가지는 잠재력을 끄집어내면서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은 될 수 있지만, 예전에 상황이라면 자연스럽게 나오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상태에서 그 잠재력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들을 어떻게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진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도, 주변의 컨텍스트일 수 있습니다. 여기 지난 가을 학기 학교에서 학생들이 했던 작업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시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광화문 미대사관의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였는데 이 학생의 작업은 호텔입니다. 기존 건물이 가진 모듈과 층고를 그대로 이용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호텔을 선정하고 건물의 장소성과 높이를 고려했을 때 옥상에 수영장을 증축하는 것으로 초기 개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하중의 수영장을 기존 건물에 태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수영장 구조와 원래 건물구조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하고 거대한 기둥으로 서있는 고가도로의 구조에서 영감을 얻어 마치 고가도로 구조가 건물 중앙에 삽입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구조적으로 요구되는 기둥 크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으나 의도적으로 기둥 주변으로 슬래브를 도려내고 세장비를 더 크게 하여 기둥 단면을 키운 후 다시 십자형으로 기둥을 변형한 것입니다. 사진에 보여지는 공간은 호텔 엘리베이터 홀 부분에 과도하게 큰 기둥이 박혀 있는 모습입니다. 결국 이러한 결과는 용도와 컨텍스트의 해석에 의해 촉발된 것입니다. 또 다른 학생의 작업은 광화문 광장에 거대한 그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건물의 일층을 기둥조차 없이 중앙 코어 만 남기고 비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1층 코어 벽은 비현실적으로 두꺼운 상태가 되고 2층 전부는 거의 한 층을 차지하는 보beam로 꽉 차게 되는데 단면에서 보면 보는 일종의 벽의 형식을 띄게 되나 바닥에서는 떠 있는, 마치 무거운 벽이 매달려 있는 애매한 상태를 자아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입면에서는 기존에 있던 콘크리트 루버를 이용해 외벽면이 점점 앞으로 나오면서 깊이감을 달리하고 상부로 올라가면서 오프닝의 형상과 배경을 뒤바꿔 거대한 창은 문의 크기로 변화되지만 실제로는 문이 아닌 애매한 상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기능

박: 보여준 사진이 흥미롭습니다. 이야기해준 것에서 많은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설계해왔던 것들이 기능 위주의 조합으로서의 결과치를 예상하거나 각론에 의해서 나오는 어떤 정형화, 메뉴얼화된 결과물이었죠. 그러다 보니 모든 건물들이 각론에 의해서 획일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기능에 대해서 새로운 무엇이 제시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의 탄탄한 것을 유지한다고 하지만, 그 각론의 틀도 어디선가 원본이 흘러 들어온 것이고 그것이 이제는 우리의 몸에 맞춰져 버렸는데 그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들과 기회가 상대적으로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구체적으로 잘 정돈된 체계 안에서 새로운 시도들이 관입 되거나 부딪힘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우리가 가진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는 기회의 징표로 보이기도 합니다.


서: 국내에서 일어나는 현상설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problem-solving이에요. 아직까지 그런 것들을 해왔는데,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인가? 학생들한테 그런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인가? 그런 의구심이 듭니다. 물론 건축가가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최종의 목표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컴퓨터예요. 데이터를 대입하고 얻는 값이 더 정확하죠. 그렇다면 건축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의문이 듭니다.

박: 여러 가지 방법의 것들이 있겠지만, 기존의 기능에 의한 건물에 사람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우리가 살아왔던 사회 자체가 그랬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한병철씨가 이야기한 규율 사회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전 시대의 모든 잣대와 판단이 맞나 틀렸나, 되냐 안되냐, 이분법적으로 갈라져 판단되었고 그것이 강요당하는 시대였습니다. 사용자의 매뉴얼 자체가 정답과 오답이 나눠져 있던 규율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런 사회를 살아 왔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정답을 요구하는 상황의 반영으로 건축 계획에서 나오는 메뉴얼 같은 결과물의 영역들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부분이 우리를 옥죄고 있었던 한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젊은 건축가들이 선배들이 가지고 있었던 체계, 각론 계획들을 재해석할 수 있는 기회라고 봅니다. 한국 기성 건축에서 흘렀던 무거운, 정의감에 차 있는 상태였다면, 지금은 훨씬 더 말랑말랑하고 캐쥬얼하게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제안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이것은 매 시대적인 상황입니다. 기존의 기능에 의해서 작동되는 건물들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할 수 있는 건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써왔던, 해왔던 대로는 건축가가 제시하는 제안이나 계획들은 시대의 흐름을 한편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적인 요구를 빨리 캐치 하고 제시해야 되죠. 그런데 지금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어 보입니다.


서: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건축이 재미없죠. 소장님께서 기능을 보는 태도와 제가 기능을 바라보는 태도가 약간 다르기는 한 같은데, 저는 기능을 이야기할 때 도넛과 머그컵의 관계에 빗대어 많이 이야기합니다. 도넛과 머그컵은 완전히 다르게 생겼지만 위상기하학적으로 보면 그 둘은 같은 차원의 도형이에요. 구멍이 한 개 존재한다는 속성만 유지된다면 도넛은 머그컵 말고도 어떤 도형으로도 변형 가능합니다. 기능이 일종의 관계의 속성이라고 본다면 형태와는 무관한 것일 수도 있다고 봐요. 보통 기능만 최적화하면 형태는 자연스럽게 발견될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열심히 기능적으로 설계를 하는데, 사실 기능이라는 말에 스며 있는 합리성을 설계 단계에서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어요. 요즘 학생들이 건축 재미없어 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미쳐 버리려고 하죠. 기껏해야 기능을 이야기해야 할 상대가 스튜디오 튜터인데, 사실 선생하고도 기능 가지고 대화가 안됩니다. 서로 생각하는 기능이 틀리니까. 그래서 본인 안이 기능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결국엔 객관적으로 보이는 다이어그램들을 또 만들어야 하죠. 그러다 보면 내가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겠죠. 그러다 보면 지치고 허무해지죠. 다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여전히 교육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를 맹신하고 있고, 그렇게 안 하면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처럼 되어 있어요. 솔직히 다들 어떤 프로젝트를 하든지 평소 한번 해보고 싶은 형태가 있고 어떻게든 거기에 기능을 때려 넣을 생각을 하기도 하잖아요. 당장 여기에 있는 이 스카치테이프 케이스에도 건축의 기능을 넣을 수 있어요. 기능에는 어느 정도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능도 답이 없다고 봐요. 기능 위주로 건축을 이야기하면 재미가 없죠. 기능을 크리틱 하는 자리에서는 생산적인 것이 나오기 힘들다고 봅니다. 학교가면 화가 많이 나요. (웃음)

박: 자기가 알고 있거나 경험했던 기존의 기능 또는 해석이 들어가 있는지 없는지만 보는, 일부를 가르치는 분들도 있는데 아쉽게 생각합니다.


서: 사실 크게 보면 아쉬울 것도 없어요. 저 포함해서 모두가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기능 또한 자신의 경험과 잣대에 의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수용의 폭이 문제겠죠. 이야기하다 보면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동선이 사람들마다 다 달라요.

박: 그렇다면 기능에 대한 이야기가 더 궁금해집니다. 일본의 후지모토 소우는 ‘건축에는 답도 없고 자신은 어떤 건축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들을 끄집어 내서 건축으로 표현하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그와 관련해서 형태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도구로서 건축을 이야기하지만 기능에서 새로운 부분들을 끄집어 내려는 의도가 많아 보입니다. 그 기능이라는 부분이 구체화되거나 딱딱하게 굳어진 프로그램이 아닌 훨씬 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방적인 프로그램으로 얘기하거나 관심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유연한 건축의 베이스라고 말합니다.


서: 형태적으로도 유연하지 않나요?

박: 형태적으로 유연한한 것은 아닙니다. 공간과 기능이 1:1로 대칭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이해되었습니다. 서재원씨가 생각하는 공간과 기능을 연결하는 방법이든 생각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앞서 요소들을 이야기하면서 벽, 기둥, 슬라브, 계단 같은 단어들을 썼습니다. 사실 저는 그게 정해진 단어에 의해서 구체화된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데 프로그램으로 얘기하자면 방, 도서관, 식당이라는 이름들이 지어지면서 더 구체적인 기능으로만 고착화되어진다는 느낌입니다. 훨씬 더 그 공간 안에서 가능성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프로그램이나 기능들을 더 개방적으로 열어 놓고 싶어 무슨 공간이라는 단어 자체를 신중하게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깊은 빛이 들어오는 곳, 천장이 낮지만 습한 곳 등과 같이 현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단어로 접근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곳의 가능성들은 현상적인 것과 관련되는 기능이 사용자에 의해서 구체화되지 않을까요?


서: 공간으로 예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저도 그런 비非결정성이라 해야 할까요? 그런 것의 가능성에 동의합니다. 다만 말씀하신 부분과는 약간은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 부분은, 제가 앞서 이야기 한 기둥, 계단, 보, 벽 등의 요소들은 어떠한 다른 요소들 보다도 명백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 보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공간의 특질에 크게 관여하지 않죠. 하지만 보의 형상이 아치로 되어 있다든가 기둥이 과도하게 많다든가, 아니면 벽이 어떠한 이유로 과도하게 두꺼워진다면 그 때는 무엇보다도 공간의 특질에 깊게 관여하게 되겠죠.

박: 그렇다면 프로그램에 속에서 기능에 의한 공간의 제시가 나오는지, 아니면 반대로 공간이 있으면 그 곳에 끼어들 수 있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서: 글쎄요……. 의도적이든 우연적이든 공간이 만들어 진후 그 특질에 맞게 기능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전자의 경우도 많습니다. 둘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박: 기존의 것들이 새로운 것들과 부딪혀서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조건들은 좋은 것 같습니다. 그것들이 실제로 프로그램으로 요구받는 것들에 의해서 새로운 기능이 생기지는 않나요?


서: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미리 감안하여 전략적으로 목표로 삼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기능들이 나와요. 처음부터 의도하고 작업하지 않습니다.

박: 새로운 요소element들이 개입되면서 기존 공간의 성격과 질서들이 바뀌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프로그램들과 새로운 공간의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는 것이 이분법적으로 섞이게 되는 것의 의도가 궁금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새로운 내용이나 평면을 끄집어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서: 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계속 이야기하다 보니 기능이라는 단어가 서로에게 약간 애매하게 쓰이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하여간 가장 현실적인 부분과 이상적인 것이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를 물어보시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 두 가지가 만나서 만들어내는 것이 딱 맞아 떨어지면 좋겠지만 오히려 잘 안 맞고 틀어진 상태가 좋을 수도 있어요. 그러한 과정이 결국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박: 앞서 보여주었던 예시로서의 호텔 내부에서 프로그램을 말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클라이언트와 직접적으로 작업하기 이전에 상황, 조건을 가지고 학교에서 풀어나가는 것들이 나중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서: 이미 그러한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결과가 좋진 않았지만 얼마 전 진행한 H Headquarters Project에서 학교에서의 실험들을 부분적으로나마 구체화했습니다. 어느 회사의 사옥 프로젝트였는데 기둥과 멀리언이라는 하나의 어휘를 가지고 프로그램과 대응하면서 전물 전체에 대해 어떻게 변형될지에 대한 테스트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전체 스팬드럴에 적용한 곡면은 프로그램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결과적으로 직선적이고 무거워 보이는 입면에 캐주얼 하고 가벼운 느낌을 만들어 내고자 했습니다. 측면에서 보여지는 곡면 벽과 그곳에 떨어지는 그림자가 마치 웨딩 레이스나 서커스단 천막 장식의 익살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뭔가 기이한 초현실적인 느낌도 있고요. 아주 모던한 단추가 달린 검은 정장 수트를 입고 난데없이 흰 고무신을 신었지만 너무 아름다운 그런 경우 있잖아요. 그런 부분이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디지털 건축의 교훈

박: 한국의 JINA Architects에서 보여 줬던 담당 작업과 개인적인 작업의 연속성을 보면, 구성적인 생각의 겹들을 구조화시키는 서구적인 그 안에서도 변화되는 모습을 끄집어내는 그러면서도 룰들을 자기 나름대로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디자인해 나가는 프로세스 자체가 고전적이면서 한편으로는 단단하고, 구축적인 방법 같은데 그 안에서도 재밌는 가능성은 현상에서의 새로운 개입을 부딪히게 만들어 새로운 상황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대학원 때 디지털 건축을 공부한 것으로 아는데 이전에 관심 가졌던 방식에서 어떤 이유로 변화했는지 궁금합니다. 우연한 계기가 있었는지?


서: 딱히 그렇진 않아요. 프로세스에 치여서 지쳤다고나 할까요? (웃음)

박: 대학원 때 보았던 디지털 건축의 분야는 허점을 가지거나 그 분야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서: 그렇습니다. 맹신하는 사람들도 있죠. 저는 프로세스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진 않지만, 한국학부의 교육적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편입니다. 논리의 구축, 생각의 구축을 하는 훈련이 될 수는 있을지 언정 건축물로 도면을 그려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것이 바탕이 된 뒤에 대학원에 가서 디지털 건축을 공부한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해 볼 필요는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해 보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학생들한테는 좋은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전위음악이나 현대무용이 계속 개척해 나가는 좋은 예술의 상황들이 있죠. 그런 프런티어 적인 면은 건축에서도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프로세스가 작가의 사고체계를 탄탄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미치게 만들죠.

박: 그렇다면 그것은 작위적인 것인가요?


서: 최초 시작점이 작위적이라 할 수 있지만 과정이 작위적이지는 않습니다.

박: 그 시작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작위적인 시작을 건축주를 어떻게 설득하는지도 의문이군요.


서: 그런 사람들은 건축주를 설득할 일이 없지 않나요? 자하 하디드 정도 되면 일이 많이 들어오니 설득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건축의 중요한 포인트는 게임의 룰을 정하고 그것을 엄격하게 지켜내는 과정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박: 저는 그 게임을 룰을 정하는 그 자체가 작위적이기 때문에 그 과정이 지켜지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것으로부터 시작을 하는 지 설득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시작이 작위적이면 결국엔 프로그래밍만 하는 상황이 되는데 그것은 결과물에 대한 회피가 되는 것이 아닌가요?


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잣대로 디지털 건축을 논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자체가 말이 되냐 아니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100%소설을 쓰더라도 자기 자신이 그 룰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키고 있느냐입니다. 딴 이야기 한참 하다가 갑자기 범인이 떡 하니 잡힐 수는 없어요. 이 사람이 범인이다라고 나오는데 이게 뭐야 하는 경우가 되면 안 되죠. 범인이 밝혀진 순간 앞의 이것저것들이 스쳐가면서 쭉 연결되고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돼야죠. 소설 자체의 주제가 말이 되냐 안되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개되는 플롯과 스토리가 얼마나 치밀하게 짜이고 사건의 하나하나가 얼마나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지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디지털 프로세스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 디자인의 프로세스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그리고 학생 때 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결과물로써 한국에서 현재 적용되고 있는 것이 형태적으로 특이한 입면을 나타나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화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입니다.


서: 저는 그 반대일 것 같은데요.

박: 그런 건축물이 어쨌든 지어지고 그 사무실들은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지 않나요?


서: 몇 개 안되지 않나요? (웃음) 그것은 그런 부분이 특화됐다고 인식되는 특정 사무실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의뢰하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보면 결국 단순 입면의 파라매트릭일 뿐입니다. 사실 그것은 진정한 디지털 건축과도 거리가 멀어요.

박: 정말 그것은 작위적이라 생각합니다만.


서: 작위적인 것을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사실 예쁜지 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 (웃음)


작업의 전환

박: 그렇다면 예전의 작업이 지금의 작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거나 얻은 교훈 같은 것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서: 근본적으로 저는 건축의 객관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작가가 긋는 최초의 선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오는 지가 궁금 했었고 그것을 찾기 위한 하나로 디지털 건축에 몰두한 이유도 있습니다. 기껏해야 한 작가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의성에 한계를 보면서 그것을 넘는 가능성으로 다이어그램을 맹신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건축가의 내면에서 작위적으로 긋는 선에 의구심을 가진 것이지요. 이러한 프로세스는 근본적으로 건축의 태생을 외부에 두기 때문에 매 상황, 컨텍스트context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객관적으로 만들고자 시도했었습니다. 마치 에로 사리넨처럼 한 사람이 한 프로젝트라고 보기 힘든 정도의 다양성을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건축은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고 건축가는 일종의 뿌려진 씨앗의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객관적 합리성도 있었지만 윤리적 사명도 깔려 있었던 것 같아요.

박: 그게 언제쯤 인가요?


서: 대학원 졸업하고 한참 실무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러니까 2006년쯤? 열심히 공부한 것을 열의에 불타 실무에서 확인해보고 싶은 욕망이 한참 있을 때였죠. 심지어는 설계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박: 그것은 대상을 설득하기 위함인가요?


서: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습니다. 사실 객관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 깨닫았어요. 그렇지만 당시에 그런 과정을 통해 남은 것은 논리적 사고와 엄밀한 프로세스예요. 그것은 지금의 사고와 작업에도 많은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봅니다. 주관적이지만 철저한 룰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면서 작업하려고 노력합니다. 예상치 않게 어떤 하나가 바뀌게 되면 전체에 적용하는 룰을 다시 수정하죠. 결국 설계는 객관화될 수 없고, 객관화 필요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건축은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금방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면 언젠간 폭발할 수밖에 없어요. (웃음)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만족하는 것이 최종목표가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살수 없듯이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건축을 할 수 없어요. 결국에 제가 그것을 극단적으로 겪어보면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요즘 학생들이 좋아하는 BIG건축도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작위적이죠. 저는 그것을 화살표 건축이라고 부릅니다. (웃음) 그것은 고도의 정치적인 건축이에요. 책 이름도 ‘yes is more’ 잖아요. 긍정주의로 다 받아들여 정말 진화한 다양한 종을 만드는 것 같지만 그냥 그들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거예요. 정말 그렇게 하면 정신병 걸려요.

박: 그것은 끝이 없는 떠도는 그 무엇과 같다는 느낌입니다.


서: 지쳤습니다. (웃음)


논리의 감성

박: 최근 작업의 포커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최근의 화두는 무엇입니까?


서: (웃음) 라이센스? 농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굉장히 이론적일수록 실질적인 것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개념적인 이상을 말하지만 기능이 다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를 다 놓치고 싶지 않은 상태이죠. 글쎄요……. 화두라 한다면 이미 오늘 다 말한 것 같은데……. 아주 최근으로 보면 건축의 자의성? 그런 것입니다.

박: 임의성과는 다른 것인가요?


서: 임의성은 그때마다 틀린 일시적이라는 느낌이 있어서 다를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는 자의성은 작위적인 것을 말합니다. 제임스 스털링을 좋아해요. 약간 변태적인 조형들이 높은 퀄리티로 통일된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CCA에서 출판된 아카이브 도록을 보면 계속 고민하며 변해가는 작가의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요즘엔 또 너무 감상적인 건축에는 약간 경계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요. 제가 말하는 감상적인 것이라는 것은 공간을 시적으로 설명하며 자기만족에 빠져 감정의 오버스러움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박: 그것이 본인이 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한 것이면 좋지 않을까요?


서: 그러면 좋지만 보통은 모두 건축가들에 의해서 말해지죠. 저는 건축가가 매우 실질적인 부분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수학적이고 논리적인데 결과는 감성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장수 집과 관련이 될 수 있을 것도 같고요. 아주 현실적인 것에서 나오는 감성적임을 하고 싶습니다.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말하진 않습니다.


인터뷰: 2014년 8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