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ndão Costa Lima 인터뷰

브란다오 코스타 리마: 2007년 Amelia Brandang Costa와 Rodrigo da Costa Lima가 설립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들은 가구와 빌라 같은 아주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에서 공공 건물이나 도시 계획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른 범위의 프로젝트를 설계해 왔다.
2012년Silver on the 13th Clube de Criativos de Portugal, Lisbon, Portugal : Indexnewspaper / Selected for MoMA Art Library collection, New York, United States of America : Indexnewspaper / Selected for Booklet Library collection, To-kyo, Japan : Indexnewspaper / Honourable mention at the IX Ibero-American Biennial of Architecture and Urbanism : Indexnewspaper.

아멜리아 브란다오 코스타: 2004년 포르토에 있는 Lusófona University of Porto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Staatliche 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Stuttgart에서 공부했고 밀라노의 Domus Academy에서 MA 디자인상을 받았다. 2007년에 로드리고 다 코스타 리마와 함께 사무실을 열기 전에 주앙 페드로 세로디오, 이사벨 푸르타도, 헤르조그&드뭬른의 사무실에서 실무를 익혔다. 그리고 여러 작품과 글은 강연과 전시회를 통해 출판되고 발표되고 있으며 지금은 ‘인텍스 뉴스페이퍼 (http://indexnewspaper.info/)’와 ‘포르토 아카데미(http://portoacademy.info/)’의 창립자이자 감독을 맡고 있다.

로드리고 다 코스타 리마: 2003년 포르토에 있는 Lusófona University of Porto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2007년에 아밀리아 브란다오 코스타와 사무실을 열기 전에 주앙 페드로 세로디오, 이사벨 푸르타도, 헤르조그&드뭬른의 사무실에서 실무를 익혔다. 지금은 아밀리아 브란다오 코스타와 함께 ‘인텍스 뉴스페이퍼’와 ‘포르토 아카데미’의 창립자이자 감독을 맡고 있다.

박: 박창현 소장(인터뷰어)

아: 아멜리아 브란다오 코스타 소장(인터뷰어)

로: 로드리고 다 코스타 리마 소장(인터뷰이)

포르투, 도시에 대하여

박: 이곳에 도착 해 문화의 차이를 느끼게 되면서 도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생각됩니다. 아시아의 경우에는 각 도시들이 경제와 맞물려 급격하게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장을 먼저 경험한 일본도 그렇고 최근에 들어서는 한국도 저출산과 맞물려 인구 감소로 도심지 안에 빈집이 생겨나는 상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구 절벽과 함께 사회 문제가 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전반적으로 보여지는 상황입니다. 이곳 포르투의 구도심 중심부를 돌아다니다 보면 오랫동안 빈집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많이 보이는데 실제로 도시 변화에 대해서 건축가들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아: 여기서도 자본의 요소들이 도시 바깥쪽으로 나가면서 도심 공동화 현상이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도시 주변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포르투 도심에 있던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 나가고 도심은 비어졌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반대로 사람들이 도심으로 다시 돌아오길 원하고 도심으로 와서 살기를 원하는 상황입니다. 모든 서비스와 식당, 오락, 쇼핑 등이 도심에 있기 때문이죠.

로: 그리고.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게 된 것엔 많은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도시 밖에 살려면 그것들을 뒷받침해 줄 어떠한 것들이 필요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람들은 차의 편리함에 의존했습니다. 다시 돌아온 게 된 주된 이유는 도심의 서비스 집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모든 회사들이 도심을 상업적인 도심으로 바뀌었는데 그러면서 도심 지역의 땅 값이 비싸지고 많은 회사들의 도심 집중화로 많은 사람들이 도심 밖으로 주거 공간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서비스가 형성된 곳 가까이에 살기를 원하고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을 걸어서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와 동시에 회사들은 도심 밖으로 나가길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포르투에서 가장 최근에 있는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 밖에서 일을 하고 일을 마치고서는 도심 지역으로 돌아와서 생활하는 것이죠.

박: 아 그렇군요. 서울에서도 그와 비슷한 생활 패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령 사회와 핵 가족화 되면서 1~2인 가구가 보편화(전체인구의 53%) 되었고, 자기가 살고 있는 주변에서 소비하는 홈어라운드 소비의 경향이 뚜렸해졌고 앞으로는 더 두드러질 것 같습니다. 포르투에서의 그런 변화는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아: 1980년대만 하더라도 모두가 도시 밖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매우 최근에 일어난거죠.

로: 그렇죠. 매우 최근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전에는 들판이었던 포르투의 주변 도시들은 갑자기 매우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박: 포르투갈의 도시 상황들에 대해서 과거, 현재 상황, 변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 듣고 싶습니다.

아: 역사를 보면 실제 유럽은 행정구역의 경계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시아에서 도시가 커진다는 개념과 유럽에서 도시가 커진다는 개념은 아예 다릅니다. 고속도로로 묶여 있는 포르투 행정구역은 로마시대에 이미 고정 되었습니다. 이 길은 이전부터 존재해 왔고 다른 도시의 행정구역이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보면 서울처럼 다른 행정구역이 포함되는 등의 확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계획된 도시가 각각 있었기에 도시가 커졌다는 개념은 이동 범위에 의해 수도권이라고 묶는 것처럼 ‘포르투권’으로 묶이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에서 실제로 포르투 인구는 24만명인데 포르투 광역으로 보면 인구는 100만명이 넘습니다. 

로: 가장 오래된 포르투 시가지는 이미 12세기에 다 완성이 된 것이지만 포르투에서 가장 메인 성당인 포르투 대성당을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었기 때문에 도시 기원의 이야기를 할 때 포르투 대성당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포르투는 port 항구의 뜻에서 불려지게 되었고 항구이다 보니 이곳에 많은 사람들을 유입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곳 포르투 대성당을 주변으로 살기 시작했고, 이후에 포르투 대성당에 모든 서비스들이 점점 확장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을 다른 공간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수 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현재에는 큰 경제적 집단들이 도시 밖에 있는 상황이고 사람들은 도심 지역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도시의 자연스러운 트렌드이고 사람들은 도심에 살고, 일은 도심 밖에서 하거나 혹은 재택 근무하는 것과 같이 생활과 일을 도심에서 하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하지만 현재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도 점점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포르투는 바다와 강, 도로가 있는데 이것들은 로마 시대 때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입니다. 주요 도로는 포르투의 경계를 나타냅니다. 포르투는 이 도로를 도시의 경계로 정하고 이 도로를 넘어서면 새로운 도시가 되는 것이고 그것들은 또 다른 확장이 됩니다.

박: 처음에는 도시에서 시작했지만 자본이 도시 밖으로 나가는 시기를 지나서 지금은 다시 사람들이 구도심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도심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은 언제 이루어졌고, 다시 들어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아시아의 주요 도시의 경우에는 공동화 현상이 생기면서 민간에서도 경제적 이익 때문에 무언가를 하기도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공동화되는 것들은 계속 문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시 또는 국가 차원에서 그런 현상들에 대한 정책들을 제안하고 있는 상황이고, 특히 동경에서는 2020년 동경올림픽 때문에 도심 변화를 최근에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포르투에서도 도심지역을 빠져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게 된 것도 정부의 차원에서의 어떠한 노력이 있었는지요?

로: 사람들이 도심지를 빠져나간 것은 1980년부터 시작 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경우에는 행정구역이 나눠져 있으니까 각 구역에 시 의회가 따로 있고 한 쪽에서 자신들의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 도시 정책에 대한 계획에는 전체가 모여야 합니다. 시 의회가 있고 포르투 광역을 공동으로 관할 합니다. 스페인과 같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 공동의 기관이 도시 각각의 의회와 함께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합니다. 수도권은 모든 의회를 관할하는 기관으로서 존재하지만 각 도시들은 그들 각각의 프로젝트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예산을 가지고 진행 해야 합니다.

박: 포르투의 경우에는 각각 그들만의 정책이 별도로 있다는 건가요?

아: 네, 지방자치만의 정책이 있고 이것들은 독립적입니다.

박: 그렇다면 그것들을 통합하기 위한 계획이나 정책들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아: 네. 여기에는 수 년전에 수립한 PDM(Plano Diretor Municipal)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계획은 공공의 사회를 논의하는 것입니다. 특정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도록 기회를 줍니다. 포르투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도 자치 계획의 승인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습니다. 전체를 묶는 PDM은 한 두 해에 시장이 바뀌어서 되는 계획이 아니고 몇 십 년간 논의를 통해서 정책들이 만들어집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하는 설계도 이 지침에 따라서 합니다. 도시 계획을 할 때, 교통을 어떻게 할 것이고 어떻게 이것들을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토의하고 경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도시에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수립되기를 원할 때 이것은 지방 자치 계획에 영향을 주고 그 변화는 제일 최근의 것에서 만들어질 수 있지만 이것은 국가적 수준에서 시의회와 단체가 논의해야만 합니다. 이 계획은 가까운 미래에 만들어질 것들을 포함합니다. 

로: 논의가 투표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그래서 그런 긴 논의를 거쳐 사람들이 도심으로 돌아오도록 포르투 시에서 인센티브를 주었는데 2년 전에 이러한 혜택을 철회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지방 자치세와 연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오게 되었죠. 하지만 지방 자치세를 지불하지 않는 혜택은 없어졌고, 이 특혜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격렬한 논의 주제입니다.

로: 이 정책은 포르투에서만 적용되는 것 입니다. 이런 혜택은 역사적인 구도심에 국한 된 매우 작은 부분이고 도시 전체는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결과를 낸 것들이 도심에 어떤 열정을 불어넣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삶의 조건이 더 좋아져서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기에 있기를 원해서 온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떠한 것이 있었다거나 보상보다 그들의 열정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으로 돌아오길 원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 이것은 그들에게 차가 필요하지 않고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로: 맞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요소들만이 그들을 이주하는데 자극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 네. 하지만 도움은 되었죠.

박: 맞습니다. 저도 그것에 대해 알고 있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도심지는 더 비싸고 더 문화적이며 역사적인 곳입니다. 흥미로운 부분인데 이것에 대해 설명하기가 쉽지 않군요. PDM에 대해서 저도 조금은 알고 있는데 이것은 5년마다 바뀐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장이 무언가를 변경하려고 결정한다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로: PDM은 15년 정도 지속됩니다. 포르투 계획은 최소한 15년입니다. PDM은 새로운 거리의 흔적을 규정하고 특정 대지에 새로운 변화에 대한 미래의 계획들도 포함합니다. 하지만 시 차원에서 어떠한 것도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필지에 무언가를 짓기를 원하는 사람이 비용을 지불을 합니다. 새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길을 낸다든지 여러가지 힘든 일들이 많이 있지만 정부에서는 특별하게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개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직접 돈을 내서 개인이 진행 합니다. 토지주가 아니더라도 그곳을 개발하기 위한 자본이 들어오면 개발을 할 수 있고 정부는 개발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허가를 내주고 법에 맞춰서 그것들을 풀어줄 수는 있지만 정부가 그것을 보상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작을 하게 되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위해 누가 비용을 지불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굉장히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아: 이러한 규율은 다른 나라와는 조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 예전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대지에 관심을 가지고 땅을 사고 시공하는 개인만이 프로젝트에 돈을 투입해왔습니다. 은행, 쓰레기 분리 수거 등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모든 것들이 개인의 돈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사적인 투자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아: 어떻게 보면 그들이 도시에 이익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로: 시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보다는 재개발 같은 프로젝트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시 거리의 프로젝트는 15년 뒤에 진행되거나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됩니다. 그 거리는 어떠한 계획 안에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거기에 지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책의 좋은 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안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박: 서울의 경우에는 오래된 구도심안에 있던 건물들, 필지가 작은 것을 주거 환경 개선이라고 해서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하고 있고 그런 가운데 주택 공사가 역할을 많이 했고 마찬가지로 일반 민간 회사들도 아파트들을 많이 지었습니다. 현재 서울에 아파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게 오랜 역사를 간직해 온 집들을 한꺼번에 다 없애고 아파트를 새로 짓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쭉 해 오다가 현재는 정책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옥 보존 지구를 지정한다든지 북촌을 시작으로 오래된 동네를 살리기 위해 여러 노력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데 포르투 구도심 안에도 오래된 건물들이 많습니다. 포르투에서도 그런 건물들은 법적으로 제재하기도 합니까? 아니면 반대로 상황에 따라 수리를 하거나 새로 짓기도 합니까?

아: 다른 유럽의 도시처럼 포르투도 구도심 안에 있는 오래된 건물들은 부시지 못합니다. 완전히 묶여있기 때문에 입면을 다 살려야 하고 구도심 안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구도심 안에 비어있는 집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것들은 입면을 그대로 살리고 내부만 수리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작업을 해서 그곳을 들어가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집주인들이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도 많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노인의 경우는 그것들을 할 힘이 없거나 돈이 없기 때문에 그 다음 세대가 물려받아서 하거나 그곳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서 수리하는 경우와 같이 다양하게 있습니다.

박: 포르투갈이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면서 독재 체재에서 벗어난 것처럼 한국도 1980년대까지 군사정권 체재에 있었기 때문에 유럽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 1980년대 까지요? 군사적 체제로요?

박: 네. 그 당시는 경제 성장이 가장 큰 목표였고 그 만큼 한국의 경제적 성장은 큰 성과를 냈습니다. 당시에는 매년 50만 개 이상의 주택이 지어졌습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아파트거나 주상복합 이었습니다만 현재는 많은 건축가들이 주택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이것들은 도시 주변에 있는 현상입니까?

박: 네. 한국의 지방도 점점 도시화 되면서 지금까지도 아파트가 많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공기업들이 이런 프로젝트를 많이 맡았었고 한국에서 개인 건축가보다 기업들이 더 파워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거의 형식

박: 도시에서 이젠 조금 더 건축 쪽 이야기로 넘어가 보죠. 이전에 미얀마의 주거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영국 식민지 경험이 있다 보니 영국의 건축물의 형식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1854년에 양곤의 도시 설계를 알렉산더 프레이저가 맡았었는데 도시를 격자로 계획하고 그 형식은 도로에서 보면 좁고 아주 길게 형성된 건물이 거의 합벽으로 붙어 가로를 형성하고 있는 주거였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보통은 4~5층 정도의 높이 건물로 1층에는 상가가 있고 그 위쪽으로 주거가 있는 형식 이었습니다. 포루투갈 역시 18세기에 영국과의 교역이나 경제적 연결에 의해 교류가 많았다고 들었고 구 도심의 주택의 형식으로 비슷하게 좁고 긴 형태가 인상적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주택의 형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로: 포르투는 중산층의 도시이기 때문에 도시의 기원에 대해서 중요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초기에 도시에 살고 싶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을 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도시의 부동산에 투자를 했습니다. 영국과의 교역이 많던 시기부터 도심의 거리는 긴 땅으로 구분되었고 돈을 가진 자들은 긴 땅과 함께 양쪽의 두 입면을 구매했습니다. 한 쪽에는 주택을 지었고 다른 한 쪽에는 3개의 다른 집들을 팔기 위해 지었습니다. 최근에 이 집들과 관련해서 “the islands” 라고 해서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의 새로운 양식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30-40m 길이의 정원을 가진 중간 정도의 집 대신에 그들은 길을 냈고 몇 개의 작은 집들로 만들어 집 뿐만 아니라 다른 기능까지 해서 집의 상품성을 높여 팔았습니다. 그 동네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곳에서 살기를 원하면서 그것들을 “the islands” 라고 불렀습니다. 

박: the islands라 불리우는 형식의 주거가 요즘도 많이 있나요?

로: 지금은 포르투에서 아주 많지는 않지만 여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폭은 5.5m, 7m, 9m로 다양하게 있습니다. 

박: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러한 양식이 나타났습니까?

로: 제일 오래된 것은 18세기, 19세기에 구도시 지역의 확장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중간에 길을 내는 주택으로19세기부터 가장 반복적인 주택 양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때로는 건물에 떨어져 있기도 했고 때로는 주거와 연결된 공장(일터)이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도시 공간을 차지했습니다. 빼곡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에 보시다시피 녹지 공간을 거의 보기 힘듭니다. 

아: 그러다가 사람들이 점점 이러한 주택에서 떠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들이 비어졌습니다.

박: 그렇다면 “The islands” 가 포르투에서 가장 전형적인 주택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로: “The islands” 가요? 아니요. 더 이상은 아닙니다. 이런 형식은 매우 조금 남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에 대한 치열한 공방이 있었습니다. 살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하물며 어떤 것은 화장실도 없는 것도 있습니다. 햇볕도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박: 포르투에서 나타나는 오랜 된 주택 형식은 어떻게 이루어졌고 다른 유럽에서 나타나는 형식입니까?

로: 포르투의 오래된 주택의 경우 길에 면하는 폭이 좁았고, 자신의 집을 짓는데 길이 방향(길게는 100m)으로 세 개로 나눠서 중앙을 정원으로 길게 빼는 주택 유닛이 많이 있습니다. 집이 너무 깊어 안쪽을 사용할 수가 없으니 좁은 길에 면하는 파사드에 다시 좁은 길을 내서 안쪽에 집을 지어 세를 주기도 했는데 원래는 불법이었지만 지금은 합법화 되었습니다. 이런 형식의 주택은 프랑스 등등 유럽에도 몇 군데 있지만 포르투갈이 제일 많습니다. 예전에는 안쪽의 경우 전기랑 물도 없어서 지금도 우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도 있습니다. 잘 가꿔진 곳도 있지만 유닛이 많이 낡아서 엉망인 곳이 많습니다. 요즘에는 이전 유닛의 개념은 유지하고 내부만 새로 공사해서 프로그램을 아뜰리에로 바꾸는 프로젝트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중간 영역이 허물어 정원처럼 바뀌기도 하고 새로운 길이 되기도 해서 그곳에 별도의 문을 달아 프라이빗 공간을 만들어서 들어가게 하는 곳도 몇 군데가 있습니다. 이렇게 남아있는 것들을 개인이 원하는 대로 따로 바꿔서 사용하는 상황입니다.

박: 이러한 주택 양식은 언제부터 나타난 것입니까? 이 역시도 구도심에서 제재가 있는 건물이어서 수리나 새롭게 건축하기 어렵습니까?

아: 원래는 거의 다 정원으로 사용을 했는데 18,19 세기에 도시가 확 커지면서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하고 주거 공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많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말씀 드렸던 것과 같이 로마 시대 때부터 있던 집 형태입니다. 도로에 면한 맨 앞 집이 주인이 사는 곳이고 안쪽으로 공장도 있어서 주인이 여기서 일을 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주거 형식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섞여서 사는 것이고 게다가 출입문 역할을 하는 문도 따로 도로 쪽에 두 개가 있기 때문에 공간이 확실하게 분리가 됩니다. 여러 계층이 섞여 산다는 점에서 할렘 지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포르투 만의 양식이 많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고, 리스본만 봐도 경제 수준이 블록 별로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포르투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 했던 물, 전기, 화장실 문제들이 있어서 이러한 양식은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도심에서 제재가 있는 다른 건물들과 달리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허물어도 상관 없지만 건축가들이 관심이 있어 살리려고 하는 추세입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이러한 양식이 많이 생긴 것이고 사람들이 모이니까 소득에 따라, 길이는 조금씩 다르지만 땅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되었습니다. 

박: 질문했던 이런 양식이 다른 유럽 도시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까?

로: 많지 않습니다. 20세기에 포르투는 게토(빈민가) 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회주택에 대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택은 도시의 좋은 환경에 섞여 분포해있습니다. 좋은 환경에 있는 강을 내려다 보이는 작은 필지의 블록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것은 1950년대 즈음부터 생겨 났고 리스본 보다는 포르투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리스본에는 아주 많은 게토 지역이 생겨났지만 포르투에서는 다양한 계층과 섞으려고 했고, 그들은 매우 작은 규모로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S.A.A.L

박: 사회주택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내용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면 좋겠습니다.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 이후 학생들과 건축가들이 구체적으로 반응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고, 포르투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SAAL에 참여 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독재 정권 이후 포르투갈 건축의 변화와 1986년 유럽연합에 가입을 하면서 건축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용이 많아서 요약을 해서 답을 하겠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이었습니다. S.A.A.L(지역 지원을 위한 이동 서비스the Serviço Ambulatório de Apoio Local (SAAL) – the Local Am-bulance Support Service)의 개념은 주거 향상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건축가들이 모여서 이것에 대한 책 작업도 했을 만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이라는 주거 공간이 중요했기 때문에 카네이션 혁명 이후부터 건축가들이 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공동주거의 개념이 처음 생겼습니다. 누노 포르타(Nuno Portas) 등 여러 건축가들이 참여를 했고, 도시 이론가와 건축가의 의견이 달랐기 때문에 누노 포르타스와 알바로 시자가 이것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는 책도 나왔습니다. 

로: 정말 간단하게 하자면, 그것과 관련해서는 엄청 많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SAAL이 나타나기 시작한 4월 25일 즈음에 다양한 조건들이 있었고, 그 당시에 빠르게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집이 반드시 필요했고 이러한 이유가 주택의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 차원에서 사람들에게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제공하도록 하는 아이디어와 전략에 대해 모색할 건축가를 찾았습니다. 시자의 경우에 일을 하고 이것들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더 모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의도하고 원하는 것에 대해서 건축가와 직접적으로 의논 했고 시자와 많은 다른 건축가들이 SAAL에 관여했습니다. 협동 조합과 이러한 시스템은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박: SAAL에 들어가는 자본은 어떻게 모아졌습니까? 그리고 SAAL형식의 주거 형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 SAAL의 경우에는 일정기간 동안 정부에서 돈을 지원하였습니다. 독재 정치를 하던 살라자르 총리가 사망하고 1974년에서 1980년대 사이에 좌파 정부가 들어오는데 이념적으로 혼란기가 찾아 왔습니다. 젊은 좌파 군인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독재 정치가 끝난 시기임에도 숙청이 이루어지는 등 혼란 스러웠고 이런 복잡한 시기에 SAAL을 지지했던 오텔루 카르발류(Otelo Carvalho)의 몰락 때문에 더 이상 운영될 수 없었습니다. 원래 SAAL은 저소득층에서 시작했고 그것이 확산되어 중간 계층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박: 구도심은 법적 제재를 받기 때문에 구도심 밖에 SAAL 개념의 주거형태가 나타났는데 그것들과 구도심과의 경계,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만나는 상황에서 어떠한 건축적 현상들이 있었습니까?

로: SAAL 같은 경우에는 설계하는 건축가와 그곳의 사용자의 관계가 가까웠기 때문에 그 사람들만을 위해 집을 짓는 성격이 더 강했습니다. 그리고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날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그 부분이 부각된 적은 없었습니다. 알바로 시자 같은 경우에도 도시에 SAAL을 설계한 것이 몇 개 있는데 각각 다른 설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각각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반복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조합이라고 하지만 한 개인은 개인의 집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각각의 집은 개별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리고 점점 생활 수준이 올라갔기 때문에 좀 더 잘 지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 요즘에도 많이 지어지는 건축 형식인가요?

로: 많이 지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최근 5년 전까지 지어진 것도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모여서 땅을 사고 자신들이 원하는 집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걸리고 과정이 더 길기 때문에 활발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나타납니다.  

아: 다양한 협동 조합, 협력들이요.

로: 이러한 시스템은 지금은 너무 복제되어 정책적 방법이 아닌 사업적인 아이디어로 나타났습니다. 

아: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돈을 굴리고 주택을 짓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로: 저렴한 방식으로 말이죠.

박: 그러면 그들은 이 방식을 진행하기 위해 건축가를 초빙해서 그것들을 진행한 것입니까?

아: 네. 그들은 건축가를 고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Aldoar (포르투 행적구역의 있는 도시) 의 경우에는 시와 가까운, 건축가 협동조합을 말이죠. 

로: 그래요. 적은 예산으로 협동 조합과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디어는 이것들을 건축가와 함께 경제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잘 만들어야 하고 잘 실행 되어야 하지만 경제적인 시공, 저렴한 땅 값으로 사람들이 같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박: 이것은 언제 주로 이루어졌습니까?

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요.

아: 1990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박: 그러면 SAAL은 이제 실질적으로 끝난 프로젝트인가요?

로: SAAL은 정책적인 아이디어에 기반한 것이고 이러한 정책적인 아이디어는 죽은 아이디어기 때문에 정치적 이슈화는 예전에 이루어진 것이라 이제는 끝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많은 공실들에 대해 사람들은 이사하자는 생각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사회적인 이웃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로: 그 당시에 이것은 이것 자체가 드러날 때부터 여러 의견으로 부딪혔고 이것은 국가를 강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국가 연합의 정부가 있었는데 많은 중심 정당들이 정부를 형성한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균형 잡힌 정책적 논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SAAL은 끝이 났고 이것은 4-5년 정도 지속되었던 것인데 매우 빠르게 지나간 것입니다. 수 많은 것들이 SAAL의 결과물로 남아있고 몇 개의 원칙들이 협동 조합과 함께 남았습니다. 

아: SAAL 그 자체만이 아니라 형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 SAAL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것은 사회적 프로젝트이면서 중산층으로 도달하는 것이었고, 그 예로 Aldoar은 중산층과 함께 더 소득층이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협동 조합에 속해서 돈을 모으고 지불했습니다. 협동 조합의 누군가는 땅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은 다시 몇 개의 땅으로 나눠지고 협동 조합에게 배분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고, 사람들은 지불을 프로젝트의 초반에 시작해서 수년에 걸쳐 그 작업이 진행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친구들과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서 빌딩을 짓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그들은 모여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추가로 모집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것이 국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반면에 여기에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없었습니다. 한쪽은 지원이 있고 다른 쪽은 없는 것은 균형 잡힌 것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 또 한가지 특징을 설명 하자면, SAAL에서 독특한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건축가들의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그들 모두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자의 경우,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자 하는 곳으로 갔고 거기에서는 가까운 상호작용이 있고 살기 위해 온 사람들은 주거공간을 형성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거기에는 다시는 모사되지 않는 단일한 논리들이 있었고, 그들은 매우 가깝고 이것들에 묶여 있었습니다. 협동 조합은 이와 같이 일을 했습니다. 이런 것과 관련해서 꼬레이아 페르난데스(Correia Fernandes)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도 이런 방식으로 일을 했죠. 

아: 하지만 그것들은 비교적 잘 만들어졌습니다. 부동산 규제도 없었기 때문에 집의 가격도 낮아질 수 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는 사람도 없었고, 이런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주택에 적절한 가격으로 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박: 지금도 이러한 방식으로 지어지는 경우들이 있습니까? 

아: Matosinhos 병원 근처에서 아직까지 나타납니다. 이것은 3~5년 전에 Rua Dom Pedro에 끝이 났고 협동 조합 이었습니다. 강 주변이죠.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이 경우에는 짧게 끝났습니다. 

로: 하지만 이것은 아직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주민 협동조합을 만들고 땅을 산다고 하면 그 조합의 모두가 이것을 지불하고 땅은 모두의 것이 됩니다. 100개의 집을 지어야 한다고 가정해 보면 당신은 100명의 사람들과 조합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제도 없기 때문에 집들은 저렴한 가격에 처리되고 이것들은 관리된 가격에 시공이 될 것입니다. 

박: 한국의 경우에 지금까지의 아파트와 주택이 양적으로 생겨나고 획일적인 모습을 보이니까 이러한 조합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추세이고 이는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됩니다.

포르투 건축, 포르투 학파

박: 개인적인 프로젝트들에 대해서 물어보지 못해 미안합니다. 포르투 건축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더 있는데 도미니크 마샤베르(Dominique Machabert)가 ‘포르투 학파’라고 말을 하면서 포르투 건축에 대해서 정리한 것들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와 그것과 관련해서 그 위의 선배 건축가들과 그 이후 후배 건축가들의 건축 활동의 성향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아: 어떤 학파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페르난두 타보라(Fernando Távora) 전에 근대기 건축가들이 있는데 근대 건축이 초기의 모든 실험을 하는 것이었고, 그것에서 방향 전환을 했던 것은 역시 타보라의 힘이 컸습니다. 포르토 만의 성격이 강한 것은 확실히 맞는데 그것을 딱 어떠한 특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건축가들이 굉장히 친밀하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것들이 많습니다. 시자가 나온 벨라자르트 (프랑스의 보자르와 같은 개념의 교육, 장식미술&미술&건축이 함께 있던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르투 건축학교는 벨라자르트에서 미술대학과 건축대학이 분리되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포르투 학파의 색은 포르투 건축대학 이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 1950년대 포르투갈에서 비아나 드 리마(Viana de Lima)와 함께 CIAM의 포르투갈 지부를 결성하면서 타보라는 ‘포르투갈만의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보고 포르투갈 학파라고 칭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럽연합에 가입을 하고 유럽의 교류가 더 활발해지면서 포르투에서 다른 유럽으로 건축활동을 하러 나가기도 하고 다른 유럽에서 포르투로 들어오기도 했을 텐데 포르투 건축이 가지고 가려고 하는 포르투 건축만의 색깔이 있습니까?

로: 포르투 건축학교에서 학생들과 교수와의 관계가 가까워서 그 부분을 같은 시선으로 보는 생각들이 존재하지만 뭐라고 단정지어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럽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특별하게 국가나 포르투 만의 색을 별도로 구분해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박: 한국에서도 해외 유명 건축가들을 초대해서 건축물을 짓기도 하는데 항상 정통성에 대한 이야기가 뒤따라 나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이탈리아 같은 경우에는 이런 것과 관련해서 쇄국의 마인드의 관점으로 금지 시켜야 한다는 생각들이 나오고 있고 그런 움직임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포르투에서도 OMA의 카사다 무지카(Casa da musica),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계획한 마이에르 공원 등이 있는데 그것들이 규모도 크고 예산도 클텐데 외국 건축가들이 들어와서 작업 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로: 여기는 너무 외곽이고 외국 건축가들이 그렇게 많은 작업들을 하지는 않습니다.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카사다 무지카(Casa da musica)는 시작부터 공모전을 통해서 외국 건축가가 하게끔 지침이 되었던 부분이어서 그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분위기는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건축물의 결과가 잘 나와서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Indexnewspaper

박: 지금 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출판에 대한 일까지도 겸해서 바쁘게 지내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두분을 알게 된 것도 잡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Indexnewspaper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 주변 건축가들이 직접 발행하고 있는 이 잡지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건축가들의 프로젝트 사진, 그들과의 대담을 담은 내용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로: 어떤 건축가와 출판사와의 프로젝트 보조로 출판 관련된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프로젝트가 갑자기 무산 되어버렸습니다. 그때까지 출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그 작업을 통해 출판에 대해 조금 배우게 되었었고, 그렇게 진행해 오던 작업들이 너무 아까워서 우리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모르는 분야여서 새로운 도전으로 생각하고 시작을 하게 되었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잡지에 담을 건축가에 대한 기준은 딱히 없고, 인터넷을 보고 우리가 마음에 드는 건축가에게 연락을 하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아: 서로 이야기 하다가 신문의 형식을 가자고 해서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게 한 것도 있었고, 잡지 표지의 색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페인트 회사의 협찬을 받아서 하고 있습니다.

박: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로 이 신문의 형식의 잡지를 만든다고 했는데 그것들이 작업과 잘 연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로: 글쎄요. 특별하게 관심 가지고 있는 것은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재료, 공간 같이 딱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이다라고 정할 수 없고, 전체적인 것들을 다 봅니다. 좋다고 해서 모든 걸 출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담고자 하는 것들도 직관적으로 정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 그렇군요. 매년 여름 진행하고 있는 포르투 아카데미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업, 출판, 교육이 어쩌면 연결되어 있는 범주의 일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곳에서의 활동이 앞으로 더 발전적으로 진행되면 좋겠고 긴 시간 동안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도 종종 연락 드리겠습니다.

통역 – 전수현
정리 – 주한슬
인터뷰: 2015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