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신욱 소장 인터뷰

윤재민: 동아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 건축가 노정민과 건축사사무소 라움을 설립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마스터플랜 현상설계 당선을 비롯해, S1, 청도어린이 도서관, 반쪽집, 아이누리 아트센터, 마로인 사옥, 아트스페이스 라움 등 다수의 작업을 했으며, 2013년 부산신인건축가상을 수상하였다. 타 분야의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하는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여 공간실험을 병행하고 있으며 현재 동아대학교 겸임교수이다.

박: 박창현 소장(인터뷰어)

오: 오신욱 소장(인터뷰이)

부산의 현대건축사

박: 일본의 경우 동경이나 오사카와 같이 도심지가 아닌, 지방에도 뛰어난 건축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잡지나 미디어를 통해 빈번하게 소개되어 많이 알려집니다. 그런 인프라 혹은 네트워크,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들은 그들에게 아주 좋은 환경이 되는 것 같아요. 반면에 제가 부산, 대구, 광주 일대의, 제 또래 건축가들을 소개시켜 달라고 이야기를 할 때 느끼는 것은, 서울에서는 지역의 건축가들을 잘 모른다는 거예요. 알 수 있는 방법은 공간지 라든지, 전국으로 나가는 잡지 정도를 통해서 혹은 소개를 받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서울에서는 <4.3 그룹>이라고 하는 집단이 뭉쳐 굵직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 이후 세대들에게 없는 그러한 요소들이었죠. 부산을 거점으로 작업하셨던 선배 건축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떤 분들이 계셨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계셨는지.

오: 부산에는 <다시>라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주축을 이루었던 60년대생 분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에서 유학을 한 후, 부산에 연고가 있는 대학들에 자리를 잡는 경우와 부산 출신이 ‘공간’에서 실무를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사무실을 연 경우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 시기는 1997년부터 2000년 사이로 볼 수 있습니다. 부산대, 동아대 출신의 선후배들로 이루어진, 대학교수와 건축사무소장들이 뭉쳐 작품활동을 하거나 건축전을 주최하기도 했죠. 일신설계의 ‘이상건축’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을 통해 여러 작품들이 모아지게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10명 정도의 그룹, <다시>가 형성되었습니다. 2∼3년 정도 반짝 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개인적인 유대와 친목활동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한계를 드러냈죠. 그 이유는 그 중에서도 잘 되신 분들과 그렇지 않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어쨌든 밖에서 본 제 입장에서는 그 분들이 롤모델이었고, 그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저는 우리 젊은 세대들도 그런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M>이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의 성격은 ‘anti-다시’의 성향을 띄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각의 반대편에서 보는 것이죠. 그 그룹과 우리의 그것과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우리 <M>의 경우 이론공부를 주로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도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론과 비평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 주축이었습니다. <다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고요. <다시>의 경우 ‘공간’에서 설계를 주로 하던 사람들이었어요. 우리의 관점에서 그저 설계만 하고 친목도모만 하는 그룹은 의미가 없지 않느냐 라고 생각했어요. 부산을 위해 올바르게 이야기 하고 담론을 만들고, 작품에 대한 조언들도 활발히 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다시>는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모임을 꾸려나가기엔 우리는 당시 너무 어렸던 거죠. 1년 정도 카페를 만들고 글을 쓰다가 보니,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사정, 사무소 여건, 건축사 시험 등으로 그룹이 와해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10년 정도가 흘렀어요. 주위의 연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저는 저만의 길을 가기 시작했어요. 

박: 그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시대적 상황인가요?

오: 저는 IMF이후 철없이 사무소를 오픈 했어요. 사실 부산은 서울과 다르게 일이 많이 없어요. IMF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독립하는 사무실이 없었죠. 저희는 부부가 같이 하는 처지라 1년에 하나씩이라도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안되면 예전에 모아두었던 돈을 쓸 생각으로 사무실을 오픈 했어요.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 디자인을 건물에 반영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무실을 오픈 해도 6개월 만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결국 혼자서 건축을 하게 되었고요. 그러다 보니 제가 <다시> 그룹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 같아요.

박: <다시>그룹에서 배우게 된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오: 저는 건축가의 길을 사방에 소리치고 외치며 다니던 때가 있었어요. 작업적인 면이라든가 공모전을 했을 때 결과를 공개해 달라는 요청 같은 것들이요. 그래서 옛날에 저는 부산에서 잘난 체 하는, 부산시에서 찍힌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시에서도 저를 부르기 시작하고 옳은 목소리를 내달라고 하는 상황이에요. 저로 인해서 이런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부산이 이제는 그 때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들을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울이 부러웠어요. 노는 판이 달랐으니까요. 부산은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노는 판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기반을 잡은 선배들이 후배 건축가들을 위해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하지만 교훈적인 면도 분명히 존재해요. 나도 한번 뭉쳐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죠.

박: 제가 아는 분 중에 ‘김승익’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90년대 말에 저를 가르치셨던 분이 강의 차 부산에 가셨는데, 그 때 강의를 통해 알게 된, 그리고 강의가 이루어졌던 ‘오름’이라는 건물을 설계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도 혹시 <다시>그룹에 속해 있는 분이십니까?

오: 그분은 몇 년 더 연배가 되십니다. 혼자 작품을 하셨던 분이시고요. 그분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아뜰리에 작업이라는 것을 시작하신 분이기도 하시죠. 50년대 생입니다. 이분은 지금 현재 설계를 안하시고 계시고요.

박: 그렇다면 <다시>그룹에 속해 있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오: ‘가가건축’의 안용대 소장님, ‘다음건축’의 김명건 소장님, 카자흐스탄에 계시는 노진석 소장님, 동아대의 김기수 교수님이 계십니다. 김기수 교수님을 주축으로 모인 거라고 말할 수 있죠. ‘공간’ 을 나온 후 교토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셔서 실무를 하려고 하다가 학교로 가셨죠. 그분이 부산에 건축이라는 씨앗을 심어주신 분입니다. 부산은 서울대 건축과 출신 위주의 분위기가 흘러갔는데, 이분이 처음으로 지역대학 출신의 지역건축가들을 위한 흐름을 만들기 시작하셨죠. 지금 현재의 이야기를 하자면, ‘가가건축’의 안용대 소장님은 아뜰리에 작업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직접적인 교류보다는 금전적인 지원을 자주, 많이 해주시죠.(웃음)

박: 그때 그 <다시>의 작업, 작품 성향은 어땠었나요?

오: 모두는 아니지만 ‘공간’의 스타일이 있었어요. ‘공간’이 썼던 어휘, 승효상 건축가가 주로 쓰는 방법들을 조금씩 차용해서 썼죠. 그리고 ‘공간’ 출신이 아닌 분들은 또 그것을 차용해서 쓰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건물에 조금만 디자인이 되면 건축으로서 상당히 튀게 되는 때였으니까요. 

박: 그래도 그 당시에는 <다시>가 건축계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거군요?

오: 결과물들이 우리에게 감응을 주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건물에 디자인을 가미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건축적 작품 활동에 대한 전시활동을 주체적으로 했다는 것은 사실이죠.

박: 그렇다면 부산에서 활동하시는, 소장님과 동년배 건축가는 어떤 분이 계십니까?

오: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재민 소장님이 2008년에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프랑스에서 귀국하고 기반을 잡아 나가는 과정이었죠. 그 때 윤재민 소장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이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어떤 사람들은 부산의 투톱이라고 하면 저와 윤재민 소장님이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스스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웃음) 하지만 뼛속까지 부산인 저에 비해, 윤재민 소장님은 타자의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관점을 견지하고 있죠. 프랑스에서 장기간 유학을 마치고 오셔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뭔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보려고 하시는 것이 보여요. 저는 일상이 부산이고 그래서 이 안에서, 현재의 상황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것들이 많고요.

부산의 젊은 건축가

박: 누가 더 낫다 못하다를 떠나서 제가 생각해도 부산만이 가진, 부산에 의한 건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를 위해 소장님께서는 어떤 노력들을 하고 계신가요?

오: 저는 30⋅40대 건축가들이 뭉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해요. 작년에 건축가가 만든 의자 전시(부산건축가회 젊은 건축가 기획전 床)를 하기도 했고 그에 대한 출판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책 내용으로는 도면, 재료, 구조에 대한 여러 비평들이 담겨 있고요. 전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명의 구성원들에게 서로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박: 서울의 경우 빠른 시기에 사무실을 오픈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34에 시작했고요.(웃음) 그런 사무실들이 하는 작업들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고요.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부산은 어떤가요?

오: 많이 부추기고 있습니다.(웃음) 제가 부추겨서 한 분들이 8명 정도 됩니다. 사무실을 차리고 난 후에 어떤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안하고, 어쩌면 못하는 그런 시간. 그런 시간들을 어차피 보내야 하는 거라면 ‘일찍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회사의 실장이나 과장도 하나의 건축가로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있습니다.

박: 서울의 경우, 출신 사무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공간’, ‘정림’ 등의 출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그런 선배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70년대에 와서는 끊겼었죠. 하지만 최근 다시 ‘조민석’, ‘조병수’ 사무실 출신 건축가들의 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하더라고요. 라움도 ‘조민석’, ‘조병수’ 사무실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의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

박: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지역에 있는 건축가들을 잘 모릅니다. 사실은 소개가 많이 안 됐을 뿐이지 많은 것들을 하고 있거든요. 모르다 보니 ‘없다’라고 생각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 ‘공간지’에서, 혹은 기자들이 부산에 오면 제가 부산의 작품들에 대해 소개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잘 모르더라고요.(웃음)

박: 후배들은 어떤 작품들을 하고 있나요?

오: 안기현 소장님과 같이 하시는 이기철이라는 건축가가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김성률 건축가도 그렇고요. 조정훈 소장님의 사무실, 조재득 건축가도 생각이 나네요.

박: 다른 분에게 소개를 받아 박은정 건축가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여자 건축가가 부산에 많이 있나요?

오: 부산에서 여자파워는 대단합니다.(웃음) 여자 건축가가 사무실을 오픈 하면 망하는 경우는 잘 없죠. 부산시에서 하는 프로젝트들에 강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산의 건축

박: 오신욱 소장님의 경우,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셨는데, 다른 지역과는 다른, 부산만의 어떤 건축적 차별성이 있나요? 예를 들어, 기후라든가 클라이언트의 성향들 같은 것들에 대해서요.

오: 부산만의 건축, 부산만이 가질 수 있는 건축적인 조건들에 대해 찾으려고 노력을 하는 중입니다. 한가지 이야기 하자면, 부산은 평지가 없습니다. 50∼60평의 땅이 6m의 레벨 차이를 가지기도 합니다. 이런 종류의 대지를 지속적으로 계획 하다 보면 부산에서 실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강점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클라이언트의 성향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시원시원하다가도 어떤 때는 엄청난 억지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도권에 대한 피해의식, 막연한 동경 등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건축에 대한 공간적인, 그리고 인문적인 접근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계가 명백히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신도시의 정리된 구획 역시 부산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들죠. 얽히고 설킨 그런 대지들을 계획하는 것이 부산이 가진 특징입니다. 제가 흰색을 많이 쓰는 것 역시 부산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잘 쓰는 하얀 벽, 제 사무실을 둘러싼 하얀 벽에 반짝이는 펄을 섞었어요. 부산이 가지는 채광을 고려한 부분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부산성’ 대한 고민들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외부에서 보면 이러한 것들로 인해 차이가 생길 것 같기도 하네요. 둘러보면 이런 ‘부산성’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너무 없다고 생각이 들기도 해요. 

박: 저희 사무실에서 제한적이긴 하지만, 배경조사를 통해 오신욱 소장님의 프로젝트들을 쭉 봤었는데, 먼저 저는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그 부산사람들만의 화끈함(?)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라든가.

오: 처음에는 제 말이 전혀 안 먹히던 때가 있었어요. 그 이후에는 제가 클라이언트들의 요구를 무시하던 때도 있었고요. 지금은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 그 속에서 나의 작품을 하자 라는 생각인 것 같아요. 아무리 엉뚱한 요구 라고 해도요. 특히 지위나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그러더라고요.(웃음) 하지만 그런 한계들을 극복할 때 좋은 작품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부산성’과 라움의 건축작품

박: 프로젝트를 쭉 보면 주거보다는 근생 건물이 비율상으로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로 민락동을 지나가다가 괜찮다고 생각한 건물이 있었는데 한참 뒤 오신욱 건축가의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Maroin Office Building).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직원들과 조사를 하면서 그 건물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건물이 가진 메스에서 몇 개의 레이어가 더 확장되어 새로운 프레임을 형성하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을 형성하기도 했어요. 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 라는 것에 대해 이견이 있었습니다. <반쪽집>이나 다른 프로젝트에도 반복적으로 보여진 이 방법은, 원래의 메스를 조금 과장하기 위한 표현인가, 혹은 빛에 대한 스터디를 통해 나온 레이어 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이러한 반복적인 어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오: 제가 자주 언급하고 계속 디자인에 가미한 컨셉 중에 ‘들 띄우기’가 있는데요. 어떤 표면을 들띄워서 그 사이에 의미를 담아내는 작업들을 일관성 있게 해왔던 것 같아요. 마로인 사옥 역시 그랬고요. 북쪽 채광을 위해 본래의 메스에서 그 메스를 둘러싸는 벽을 들 띄워서 빛의 반사를 이끌어 내기도 하고, 그 벽 자체가 스크린으로 사용되기도 하죠. <O+A 빌딩>에서는 수직적⋅수평적 들 띄우기를 동시에 했었어요. <반쪽집>에서도 역시 그랬고요. 예전에 했던 전시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2011, 공간실험전). 의도적 들 띄우기를 통해서 동선에 따른 시각적 프레임의 다양성을 추구했어요. 그리고 그 사이 공간들에 대한 느낌, 감각, 의미들을 담으려는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박: <O+A 빌딩>은 창에 대한 것들을 포함해서 옥상에 대한 것들도 아주 재밌었어요.

오: 옥상에 대한 내용도 역시 들 띄우기와 연관되어 있어요. 수평적으로 말이죠. 그 사이에서 만들어진 내용들이 옥상과 연관되어서 프로그램이 조직되었죠. 그저 우리 사무실처럼 옥상을 만들게 되면 사람들이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리는 옥상을 복층으로 만들었습니다. 복층으로 계획된 4층에서 바로 옥상과의 연계가 생길 수 있도록 말이죠.

박: 부산이 가지는 대지의 컨디션 중 가장 특이한 것들이 산복도로가 많다는 거죠. 산복도로에 걸쳐진 건물들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곳과는 다른데 결국 그것이 옥상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오: 맞아요. 옥상에서의 쾌적한 조건을 기반으로, 옥상도 하나의 대지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진행했죠. 우리 사무실과 같이. 옥상을 건물에 삽입시켜 적극적인 관계가 일어나게 한 것들이 그런 내용입니다.

박: 이건 편견이라고도 생각되지만, 옥상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생각하게 된 이유가 결국 부산의 따뜻한 기후 때문이라고도 생각이 됩니다. 경사지를 활용한 복층형 옥상도 그렇고요. 서울은 추워서 외부와의 관계를 가지기도, 옥상에서의 활동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오: 맞습니다. 우리 사무실의 경우에도 사무공간을 코어에 붙이지 않고, 따로 만들어서 그 사이에 외부공간을 두었는데요. 외부의 개방된 공간이 아닌, 햇살을 담을 수 있는 중정 같은 느낌을 준 것도 따뜻한 기후를 염두에 두고 한 내용들이죠.

박: 제가 2013년 부산대 졸업작품 크리틱을 하러 간 적이 있는데, 주변 동네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아니 이런 대지에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파른 경사들에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들을 많이 보이더군요. 이러한 경사 대지에 계획하는 방법 같은 것들에 대해 내공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오: 동광동의 임대주택, 그리고 2005년 당선되었던 대학교 캠퍼스 계획안 역시 경사지 작업들인데, 이런 반복적인 작업과 스터디가 축적되는 것이 사실이죠. 대학교 캠퍼스의 경우 17m의 단차가 있는데, 이를 <O+A 빌딩>의 계단과 같이 조금씩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단 차가 극복되는 작업들이 있었죠. 사실 그래서 평지에서 작업을 시작하게 되면 좀 막막하기도 하죠.(웃음) 경제적인 측면으로는 경사지를 잘 극복하지 못하면 손실되는 면적이 엄청나서 어쩔 수 없이 훈련됩니다.

프로젝트의 진행

박: 공모전도 함께 진행하시나요?

오: 일년에 2개, 그리고 그 중 한 개는 당선시킨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1년에 열 번 넘게 진행했지만, 항상 2등이었어요. 그러다가 2005년 외국어 대학교 현상공모에 당선되었죠. 그 이후에는 횟수는 줄이고, 당선율은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규모는 작게. 왜냐면 큰 규모일수록 우리가 참여 가능한 것들에 대한 한계가 많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규모를 하자 라는 생각이에요.

박: 완성도나 디테일에 대한 부분들에 대한 욕심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 그런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방법이 따로 있나요?

오: 저는 졸업 이후 사무소를 오픈 하기 전에 3년 정도 현장에서 실무를 쌓았어요. 그래서 그 감은 있는 편이고요. 지금도 되도록 현장을 자주 가려고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시공하는 분들과의 힘겨루기가 발생하는데 한 두 달 있으면 그분들도 저를 인정하는 것 같아요. 그 분들이 말씀하시기를 ‘그래도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임기응변으로 디자인하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부산에서 오신욱이다’ 라고 말씀 하시기도 하죠.(웃음) 매주 토요일 현장을 도는데 그때마다 생길법한 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소통을 하죠. 디자인 감리자로서 협상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써주면 다른 곳에서 편의를 봐주겠다는 식으로요. 현장은 제가 건축가의 감을 유지하기 위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건축가의 역할

오: 시간이 지나고 이제 제가 주목을 받으면서 하는 생각은, 건축가의 역할에 대한 것들입니다. 직접적으로 공공성을 띈 뭔가를 못하더라도 건축가로의 역할만 충실히 한다면 그런 것들을 간접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HOPE 주택(House of people’s empowerment project)’ 이나 ‘아토피를 겪는 건축주를 위한 주택’ 등은 거의 재능기부 형식으로 하고 있기도 하고, 예전에 제가 사무실로 있었던 공간을 젊은 예술가를 위한 갤러리로 기부하기도 합니다. 현재 사무실도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갤러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지역 건축가로서 내 작품만 신경 쓰는 작가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도 함께하는 건축가를 지향합니다. 사실 작품으로도 공공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만, 공모전에 당선되지 않으면 힘들고, 당선이 된다 할지라도 작품으로 결과가 나오기가 힘들더라고요. 대신 개인적으로 재능기부라든가,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들이 이 도시에서 필요한 공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HOPE’ 주택을 포함해서 공모전에서는 많은 부분 시도한 것들이 있는데, 공무원들이 싫어하더라고요. 끊임없이 소리 내도 실현되는 것들이 아직 없고요. 아직까지 많이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웃음)

박: 저 역시 이 인터뷰를 진행하는 이유 중 하나가 후배 건축가를 위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작품만 하지 말고 주위를 둘러봐라 라는 의미로. 선배들이 하지 못한 것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이제 본인 스스로도 선배가 될 것인데, 그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습니다. 그렇다면 부산의 근대건축물이라든가 부산의 가치 있는 건축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 부산에도 근대건축물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조사하고 계획하는 전담팀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들에 대해 반대의 입장에 있습니다. 학자로서의 관심은 관심이고, 저의 입장에서는 작업의 배경이 근대면 근대에 맞춰, 그리고 현대면 또 현대에 맞춰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예를 들어, 전에 제가 사무실로 사용하려고 사두었던 공간을 갤러리로 리모델링을 하게 되어 그 천장을 뜯어내니 그 대들보에 상량문이 써져 있더라고요. 아주 오래된 건물이었죠. 이후 그 지역의 역사를 잘 찾아보니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이고 활동하던 유서 깊은 지역이었어요. 그래서 그 프로젝트는 그런 역사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죠. 그리고 부산 전체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또 예를 들어, <O+A 빌딩>의 근처 동네의 경우, 깊진 않지만 역사들이 존재했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새로운 것 역시 역사가 될 것인데, 가끔은 또 색다른 어휘가 들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건축가가 역사에 대해 너무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국 ‘역사학자들이 생각하는 역사와 건축가들이 생각하는 역사는 달라도 된다’ 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기도 합니다. 

박: 앞으로의 작업이나 행보에 대해 많은 기대가 됩니다. 현재 이루신 중요한 위치는 결국 많은 책임감과 역할에 대한 숙제를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배 건축가들을 위해 해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오: 누구나 하는 말들이 있죠. 즐겨라 버텨라 라는 말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입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데, 1학년 학생들에게 많이 하는 말입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그런 생각이 아니면 건축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네요.

박: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2015년 2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