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무라 류지 인터뷰

후지무라 류지: 1976년 동경 출생으로 동경공업대학 대학원 졸업하였다. 베를라헤 인스튜티드에서 수학하였고 ISSHO건축설계사무소 공동 주임을 마치고 후지무라류지건축설계사무소를 개소하였다. 지금은 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토요대학 건축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실무와 강의를 병행하며 자신의 담론을 실천하고 있다. “Facility for Ecology Education”(2014), “APARTMENT N”(2014), “House HOUSE”(2012), “Shed HOUSE”(2011), “Storage HOUSE”(2009), “HOUSE in Tokyo Suburvia”(2009), “BUILDING K”(2008)등의 건축 작업과 2009년에 ‘1995년 이후’라는 차세대 건축가의 대화를 인터뷰 형식으로 건축과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냈다. 그 이후로 건축 전문 웹진 ‘art and architecture’를 통해 일본 현대 건축을 대화 형식으로 이끌어 내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박: 박창현 소장(인터뷰어)

후지무라: 후지무라 류지 소장(인터뷰이)

논리적 설계 프로세스

박: 2012년 겨울 서울에서 열렸던 ‘한일 건축 교류전’을 하면서 후지무라씨의 전시 내용에서 제가 궁금했던 부분들을 좀 더 질문을 하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후지무라: 함께 이야기할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지난 전시의 기획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가 있어 왔습니다.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과 함께한 일본 젊은 건축가들의 작업 방식과 지역별로 나눠진 다양한 건축가 팀의 작품이 전시되어 폭 넓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후지무라씨는 전시에 참가 했던 일본팀에서 토론 진행을 맡아 이야기 나눴던 내용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후지무라: 감사합니다. (웃음)

박: ‘한일 건축 교류전 전시’를 보면서 한국에서 관심 가지고 있는 내용과 일본에서 관심 가지고 있는 내용이 좀 다른 부분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개인적인 관심사와 건축 환경 범주 내용에 좀 더 관심 가지고 있다면 일본에서는 사회적인 내용에 관심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커미셔너가 사회적 관점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작업 하시는 소가베 선생님을 중심으로 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그 전시에서 약간 다른 관점으로 전시를 했던 후지무라씨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부터 좀 시작을 할까 합니다. 후지무라씨가 전시에서 이야기 한 자신의 설계 프로세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설계 프로세스라는 부분이 설계를 진행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이야기 하신 작업 프로세스가 자신의 건축 목표로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후지무라씨가 어떤 의미에서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저는 기본적으로 건축가가 아닌 사람들, 일반 사회를 대상으로 건축의 이미지를 전해주기 위해서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건축의 역할을 만들기 위해서 최고로 효과적인 것은 그 건축가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프로세스를 보여드린 겁니다.

박: 이번 전시에서 따로 전시를 위해서 프로세스를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전시의 결과물이 일반인인 클라이언트를 위해서 작업들이 진행된 것이라고 설명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전시의 모형에서 나타나는 각 과정의 변수에 대한 변화의 내용은 하나의 형식으로 읽혀져 정말 이런 방식으로 클라이언트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주에게 보여줄 때도 그런 방식의 프로세스를 통해 설명하고 진행되는 것인가요?

후지무라: 작업을 진행하면서 클라이언트에게도 기본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세대의 구분

박: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대단히 논리적인 장치를 가지고 설계를 진행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가가 설계를 하다 보면 후지무라씨가 이야기하는 ‘초선형이론’처럼 설계를 끌고 나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논리보다 직관이나 감각 같은 부분들이 중간에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런 부분들이 후지무라씨의 이론에서는 놓치게 되거나 무심한 상황으로 진행 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그렇군요. 어느 쪽이라고 하면 감성도 있지만, 일본 건축가들 사이에서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가 꽤 유행을 했습니다. 세지마씨가 1990년도 제가 학생이었을 때 모형을 주택 하나를 위해서 100개 이상 만든다 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에 한발 뒤따라 우리들도 그러한 프로세스를 따라가는 분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박: 그렇다면 그 당시 세지마씨가 했던 과정으로서의 100개 만들었던 그 결과와 지금 후지무라씨가 하고 있는 모형 만드는 것은 모형을 여러 개를 만든다는 것은 같지만 사실 내용에 있어서는 접근이 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후지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형을 많이 만드는 것은 세지마씨의 뒷 세대 건축가들의 유행이 되었습니다. 이시가미 준야, 후지모토 소스케씨라던지 우리들의 세대도 그렇지만 꽤 많은 모형을 만들고 있지요. 그것으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한다면 감각적으로 모형을 만들어 보고 그 안에서 논리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진행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논리를 모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형에 감각을 표현해서 그 모형으로부터 논리를 발견해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박: 그렇군요. 다이어그램으로 표현 되는 논리를 가지고 모형이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먼저 모형을 통해 감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논리에 대한 접근으로 작업이 진행된다는 이야기군요. 사실 작업 진행 과정을 직접 보지 않고서 그런 부분을 읽어 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후지무라씨의 전시장에서 설명했던 내용에는 감각이라든지 직관과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없이 논리에 대한 부분만 있었거든요.

후지무라: 스터디 모형으로 설계를 검토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단게 겐죠씨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단게 겐죠씨는 연구실 학생 20명, 공장의 연구실 직원 20명, 사무실 직원 20명으로 총 60명의 팀으로 요요기 국립 경기장 설계 했는데 그 때 모형을 많이 만들어 그 속에서 점점 안을 짜내는 방식으로 했다고 합니다. 세지마씨도 그런 방식으로 수단으로써 모형을 많이 만들어 안을 선택하는 방법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수단을 쓸 수 없었고 저와 스태프 둘이서 모형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초선형’이라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단 하나의 방향으로 물건을 만들어 가자! 라는 독립적인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네덜란드 유학 영향

박: 그런 현실적인 상황에서 후지무라씨의 설계 프로세스에 대한 이론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군요. 그렇지만 이전 일본의 보편적인 작업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되니 지금 이야기 하셨던 ‘초선형이론’ 이야기가 후지무라씨의 네덜란드 유학 생활과 연관 있어 보입니다. 

후지무라: 그렇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신의 설계의 안을 설명할 때 책을 만들어 원 비쥬얼 원 센텐스의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림책 같은 형식으로 설명을 하는데 꽤 직접적인 선형이었습니다. 그런 것에 많은 영향을 받아서 건물을 만드는 방법에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지만 직접적인 선형으로 한 가지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그때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박: 전시장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하나의 선형으로 쭉 설명하는 설계 프로세스에서 주변 건물과의 컨텍스트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컨텍스트가 실제로 쭉 하나로 이어가는 내용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건축 설계를 의미나 개념이라는 말로 바꾸지 않고 설계하는 방법이라는 느낌인 것 같습니다. 우리 조금 위 시대의 분들 즉, 세지마씨 전시대의 건축가들은 건축을 말로 표현한 다음 설계를 했는데, 그것을 모형으로 바꿔서 모형으로부터 문제를 발견하고 모형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된 것이 세지마씨 이후입니다. 

박: 그런 면에서 세지마씨의 방법에 대한 전환이 일본의 젊은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하면 모형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한계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가령 규모가 아주 큰 프로젝트라든지, 시간이 촉박한 프로젝트일 경우에서는 좀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모든 프로젝트에 대해서 규모에 상관없이 모형을 통해서 계속 작업 진행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그렇습니다.

건축가의 사회적 책무

박: 전시장에서 마지막 클로징 토크를 하면서 후지무라씨가 이야기 했던 부분을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네요. 그 내용 중 하나가 최근 일본의 큰 사건들과 관련된 이야기 입니다. 좀 전에 설명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는 IMF나 리먼 사태 같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것과 다르게 일본에서는 한신 대지진이나 쓰나미와 같은 큰 자연 재해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런 국가적 재해와 관련된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그 때마다 자신이 이것을 어떻게 해결 해야 할지 또는 건축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공론화 되고 실재로 실행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사실 한국 같은 경우에는 이야기 했던 그런 부분들이 국가 경제에 국한된 것으로부터 시작 되는데, 일본 같은 경우에는 자연 재해로부터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아주 큰 정신적인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최근 일본 상황을 관심 있게 봤을 때 그런 자연 재해나 국민들이 받았을 그런 심리적인 충격을 일본 정치계에서는 약간 이용하는 것들도 보입니다. 일본 정치에서 외국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한다고 보면, 일본 건축계에서는 큰 사건에 의해서 발생하는 국민의 심리적인 충격을 어떤 식으로 해결하려 하는지, 심리적으로 불안한 부분을 건축계에서는 어떻게 해결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자연 재해에 대해서는 건축 쪽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커뮤니티로 치료 해 나가자는 생각과 기술로서 치료 해 나가자는 생각입니다. 커뮤니티는 사람간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건축이 그런 환경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건물 구조의 내진 개선이라든가 건물에 보강을 좀 더 하자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일본이 인구 감소 사회로 바뀌는 타이밍에 겹치게 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의 문제로 연결하고 싶습니다. 일본이 이제부터 축소 사회로 가게 되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첫 번째 이야기 했던 공공 그리고 사람 간 커뮤니티에 대한 부분이 제가 이해하기에는 공공 건물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는데 좀 전에 이야기 했던 건축계에서 공공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제안하려고 하면, 사실 그 부분이 공공 건물을 진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설계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설계 이전에 기획자 같은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부분들을 일본에서는 건축가가 관심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지금 일본의 현재의 상황은 그 역할을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지만 저는 공공 건물을 개선하기 위해서 설계 프로세스라는 것을 오픈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박: 그렇다면 그 부분을 위해서 기획자와 설계자가 계속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는 건가요?

후지무라: 지금 몇 개의 실험을 시작했는데, 몇 일 전 박창현씨의 초대로 경기대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 소개했던 츠루가시마 프로젝트가 그 중 하나입니다. 시청에서 그 지역 주민에게 공공시설 계획을 공개하면서 설계하는 실험인데 아직 실제 프로젝트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만, 일본에서는 새로운 방법이기 때문에 몇 개의 신문에 게재되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초선형이론

박: 이전에 경기대에서 후지무라씨가 소개해 주었던 내용을 흥미롭게 봤는데 사실 저도 개인 클라이언트의 프로젝트와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설계 프로세스가 차이나는 부분이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마련이라고 생각됩니다. 시작되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진행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지무라: 저의 경우 둘을 구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택도 공공 건축이라는 생각으로 설계 하고 있습니다. 

박: 공공 건물에 대한 설계도 초선형이론을 바탕으로 한 방법을 따르고 있는지요?

후지무라: 초선형이론을 공공 건물에도 연결하려고 노력하는 중 입니다. 

박: 이전에 전시장에서 봤던 ‘초선형이론’으로 개인의 클라이언트 일들을 설명하는 이론과 경기대에서 이렇게 공공 건물들을 설명하면서 이야기 나왔던 방법이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츠루가시마 프로젝트는 학생들과 진행하는 것이었고, 그때 제가 받았던 인상은 프로세스에 대한 설명보다 그곳 주민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학생들, 그리고 후지무라씨가 공동으로 만들어 나가고 결과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 가면서 진행하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후지무라씨가 이야기 했던 ‘초선형이론’과 연계해서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후지무라: 츠루가시마 프로젝트는 초선형이라기보다 많은 루트가 있습니다. 사무실에서는 스태프 혼자 하는 하나의 루트이지만요.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같기 때문에 모형을 만들어 프로젝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박: 한 명의 스태프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어쨌든 클라이언트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데, 초선형이론 중에 피드백과 같이 진행되어 결정된 내용으로부터 다시 뒤로 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기억납니다. 예를 들면 클라이언트가 이번 것보다 이전 것에서 조금 바꾸자고 하는 것처럼 초선형이론과 반대의 내용들을 요구하거나 이렇게 됐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물론 그런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건축가로서 꼭 필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 편집해 가는 것입니다. 조금 형식이 변화더라도 뒤에 조금씩 익숙해지게 하는 방법으로 해서 최종적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보여지게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공과 건축의 관계

박: 공공 프로젝트의 어려움도 있지만 또한 성취감이나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공공 프로젝트를 학교 학생들, 주민들과 진행 하면서 실제로 그 안에서 어떤 가치를 끄집어 내거나 아니면 가능성을 얻을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한 가지는 공공 프로젝트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그런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프로젝트를 오픈 하는 시선 말입니다. 그런 시선이 필요하게 된 것은 중요한 것인데, 일본은 버블 경제 때 건축가들이 인기가 있어서 다양한 건축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는 건축가들이 대중들로부터 미움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때 건축가들이 만든 건물이 이상한 것이 많았고, 너무 지나치게 개성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건축가들이 사회의 신뢰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단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박: 그렇군요. 지금 이야기 하신 내용은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에게 좋은 내용으로 전달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경기가 좋거나 나쁘거나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은 건축의 고립으로 이어지고 결국 사회에서 건축이 적절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적극적으로 좋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후지무라씨가 일본 건축계에서 다양한 발언과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후지무라씨의 생각들이 건축계 내에서 소통의 방식으로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건축가의 역할을 바꾸고 싶다고 할까? 이전에 가지고 있던 건축가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건축가의 역할과는 다르다는 것을 사회에 전하려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건축가 자신이 의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995년이라고 하는 전환기를 강조해 1990년도 까지 버블이었을 때의 건축가와 지금의 건축가가 다르다는 것을 우선 건축가들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학

박: 전시 때 일본 다섯 팀과 한국 다섯 팀이 함께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전시를 한 팀을 보면 공교롭게도 한국에 다섯 팀 중에 저희 팀 빼고 나머지 네 팀은 유학을 갔다 온 팀이고 일본은 반대로 후지무라씨만 유학을 갔다 오고 나머지 네 팀은 유학을 갔다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하고 다른 관심이나 성향이 나타난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젊은 건축가들이 해외로 유학을 많이 안 가는 분위기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무라씨는 유학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요? 유학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후지무라: 그러네요. 제 시대 직전까지 유학을 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네덜란드나 스위스의 건축가가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히 네덜란드의 건축에 흥미가 있어서 그곳에서 유학을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은 개발의 시대에 태어나 자랐는데 1980년도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에서도 건설이나 개발이 번성했었죠. 그러던 것이 1995년 전부 멈춰버렸습니다. 저는 도시 개발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은 그런 일이 없어졌고 1990년도의 네덜란드에는 건축가가 개발에 참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것을 보고 싶어 갔습니다. 네덜란드에 갔더니 그때 마침 네덜란드에도 버블이 터지기 시작해서 저는 개발 붐을 뒤쫓아 가지도 못했습니다. 네덜란드가 꽤 재미있었던 부분은 여러 사람의 이해를 위해서 설명에 꽤 신경을 썼다는 것입니다. 전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만 일반 사회에 건축가가 프레젠테이션 한다는 것, 네덜란드의 합리주의 같은 것이 건축 설계에 연결되어있는 것이 지금 일본의 상황과 상당이 비슷한 게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박: 오늘 하루 종일 동경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프로듀서라고 해야 하나 스타일리스트 같은 유명한 분이 기획해서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 낸 곳을 갔습니다. 오모테산도 옆에 있는 비어있는 땅에 아주 작은 이동 가능한 건물들을 여러 개 갔다 놓고 약간 도심 속 마을처럼 다양한 것들을 팔고 있던 곳이 있었습니다. 내일 가 보려고 하는 곳은 ‘요요기 빌리지’라고 하는 곳인데 비슷하게 작은 컨테이너 공간을 모아 작은 마을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재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사실 사람들이 혼자, 따로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꼐하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느껴 졌습니다. 

후지무라: 좀 전에 말한 커뮤니티 같은 것이 자연 재해가 일어난 것도 있고 해서 지금 유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것이 단지 일종의 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유행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좀 더 확대해서 본다면 일반인의 주거 형식에 있어서 함께 해야한다, 함께 사는 것이 좋다는 분위기와 연결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이제 현실적 제안으로 나루세 이노쿠마의 쉐어하우스같은 주거 형식도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후지무라: 나루세 이노쿠마는 쉐어하우스의 스타죠. (웃음)

박: 나루세 이노쿠마와 같이 어떤 모습으로 건축을 하는가는 어떤 면에서 우연도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전시에서도 그런 점이 느껴졌지만 후지무라씨는 왜 건축을 하는가요? 그리고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지요?

후지무라: 건축은 기본적으로 정치라고 생각합니다만, 정치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와 관련있는 것을 의사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축에서의 좋은 예는 고베시 시장이라 생각됩니다. 당시의 고베시의 문제는 로코산이라는 곳에 1960년 원래부터 수해가 많았고 항구가 협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산에서 바다로 터널을 만들어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 고베시를 기획, 개발 했죠. 그분은 고베의 시장이지만 원래는 토목 엔지니어이였죠. 엔지니어링으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과 같은 그런 직업에 동경해서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정치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나쁜 이미지라 한국과 비교하면 이명박 대통령 같이 자신을 어필 하기 위해서 건축을 사용하는 것이 되어버렸는데, 본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나 사람간의 연결을 만들고자 건축을 만드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회에 다시 실현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더 건축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하고 있고 한국의 경우에 훨씬 개인적 관점으로부터 접근한다는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저도 개인적으로 계속 사람간의 관계 또는 시스템의 관계, 이런 부분에 계속 관심을 가져 앞으로 같이 이야기 해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 의미의 변곡점

후지무라: 아마 일본의 경우도 개인의 감각을 어떻게 사회로 연결할까라는 의식은 원래부터 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 역시 변화된 것이 1995년 정도부터 입니다. 소가베씨는 미칸구미팀으로 1995년에 시작하신 분이신데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바뀐 뒤의 분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건축을 만들고 싶다는 의식이 강하셨습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을 이번에도 특별히 모아서 전시회를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의미로서 한국도 그런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이 이번의 전시회의 공통퇸 컨셉이 아닌가 합니다.

박: 사실 한국에서는 소가베씨에 대해서 거의 모릅니다. 이전에 소가베씨가 관심을 가졌던 사회적인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후지무라: 네. 소가베씨는 지금 네 명으로 건축을 하고 계신데 4명이 건축을 함께 하면서 쓰신 논문이 “비작가성의 시대에”라는 글 입니다. 버블 때처럼 ‘개인의 이름을 제시하면서 화려한 작품을 만들지 말고 좀 더 일상 속에서 보통의 건물을 만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소가베씨 그룹은 당시에 꽤 비판을 받았습니다. 소가베씨는 일반인 사회로부터 지지를 받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가베팀은 최근 그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지만 저는 그것이 그 당시에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주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박: 그렇군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본다면 다른 건축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행보와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셨다시피 소가베씨가 건축가들에게는 비판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후지무라: 건축가들은 특별히 이토 도요, 안도 타타오 이후에 사회로부터 자립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했었습니다. 사회에 경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점에서 비작가라고 하는 것처럼 보통의 건물 만드는 것을 사회에 대해서 비판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라 생각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박: 그렇군요. 그렇지만 비작가성의 시대에 나온 이야기처럼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과도한 표현력에 따른 현실적 이해의 부족 등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통이나 한국성에 대한 관심으로 4.3그룹이라는 그룹이 활동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정부 주도의 큰 프로젝트들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큰 공공 프로젝트들은 외국 건축가가 정치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경우도 생기고, 공기업인 LH공사에서는 공동 주거에 대한 새로운 제안들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일본은 정부 주도 보다도 도심지 사업과 관련된 부분은 민간에서 더 과감하게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후지무라: 문제 의식이 닮은 것은 알았습니다만, 일본의 어느 쪽에서는 서울을 보고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조가 많았습니다. 2000년도에 이명박씨가 청계천으로 성공하고 자하 하디드를 끌어 들인다는지, 상당히 건축을 중심으로 정치를 해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버블 이후에 정치가가 건축을 말하는 것은 금기였습니다. 일본은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건축을 완전히 이용하지 않고 사회를 생각해나가는 글로벌제이션을 놓치는 것이 아닌가하는 논조가 강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가서 알게 된 것은 이명박 대통령 이후부터 정치적인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찬반 여론으로 나뉘고 지금 차이가 벌어진 사회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커뮤니티나 이웃 같은 것에 관해 생각이 많은 듯했습니다 일본과 너무 닮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 말씀하신 한국의 청계천 공사와 오세훈 시장 때 진행되었던 한강 르네상스, DDP 등은 한때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외국 스타 건축가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동대문 운동장 대지에 그렇게 과하게 세금을 투입한 건물을 의뢰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판단인가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있었습니다.

후지무라: 자하 하디드씨가 비판 받는 구도가 버블 뒤의 일본의 건축가의 비판과 상당히 닮아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획이 나쁘기보다 자하 하디드씨에게 좀 더 콘텍스트를 읽을 수 있도록 의뢰할 때 요구가 없었나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클라이언트가 아이콘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건축가에게 했다면 건축가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버블 뒤의 일본 건축가도 비슷한 상황 이어서 건축가가 자신만의 표현을 하고 있다고 듣거나 또는 주변을 보지 않았다고 하는 비판을 받게 될까 그것에 각별히 의식하고 있습니다.

박: 일본에서의 버블 이후의 건축에 대해 여러가지 변화가 있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축에서도 버블 상황이 그대로 전달되었고 경제 버블이 사라지면서 건축에서도 그와 같은 버블이 비판받아 왔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은 일본에서 좀 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관심을 가지고 건축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느껴집니다. 다시 한번 긴 시간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다음 기회에 더 진지한 고민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통역: 이영화
날짜: 2012년 12월 21일

참고로 위 내용에 나오는 ‘비 작가성의 시대에’ 원문을 덧붙인다.

비작가성의 시대에 (글: 미칸구미)

이번에 동시에 발표하는 두 주택은 미칸구미에서 처음으로 다룬 주택 설계이다. 우리는 다섯 명의 파트너가 공동으로 설계를 하고 있고, 주택 설계에서도 이 방법은 기본적으로 변함없다. 대지 조사에서 기본 설계를 정리하는 단계까지는 파트너 모두가 함께 의논하며 설계를 진행한다.

보통 감각

공동으로 설계를 하는 동안, 점차 다섯 명에게 공통되는 어떤 지향성이 분명해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보통 감각으로 주택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다. 주택을 설계하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제안을 한다던가, 개성적인 형태를 도입하는 등의 독특성(uniqueness)이 없으면 건축가로서의 존재의식이 없다는 식의 사고는 우리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독특성이 과격해졌을 때 나타나는 기이한(eccentric) 작가성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주택에 작가성이 나타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사전에 탈색된 작품을 만들려고 고민한다. 작가성, 즉 건축가로서의 과잉 표현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미칸구미의 공통된 지향성이고, 이는 보통 감각으로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 보통 감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매개변수(parameter)의 풍부화’이다.

매개변수의 풍부화

단 한 가족을 위한 주택이라고 하지만, 주택을 둘러싼 오늘날의 상황은 꽤 복잡하여 설계자가 고려해야 할 문제는 다양하다. 주택에 필요한 기능성, 사회성, 경제성, 혹은 건축주의 개성 등에서 도출되는 잡다한 조건 하나하나를 설계의 매개변수라 한다면, 우리가 이상적이라 여기는 방법은 설계 프로세스에서 다루는 매개변수를 풍부화하는 것이다. 가능한 많은 매개변수를 모으고, 그 변수들을 우선순위 매기지 않고 최대한 등가로 다루려고 한다. 예컨대 이번의 두 주택 설계에서 다룬 매개변수 가운데 배치 계획에 관한 것만 해도 ‘거리, 이웃, 프라이버시, 채광, 통풍, 소음, 조망, 대지의 경사, 적설량, 건물의 외관, 수목, 수종, 분재, 어프로치, 주차장, 아웃도어 요리, 창고, 배관, 비계, 설비 기기, 태양열 패널, 지반’ 등의 조건을 들 수 있고, 이것들은 동등한 무게로 설계에 반영되었다. 다만, 많은 매개변수를 등가로 다룬다고 해서 무질서하게 늘어놓거나 혹은 의식적으로 ‘풍부함’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이 매개변수를 다루는 프로세스이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의도가 가시화됐는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도 되도록 아무 것도 아닌 듯한 인상을 가지도록 전체를 통합할 수 있으면 된다.

건축주

거주자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설계 시작 시점에서 스태프를 포함한 전원이 건축주와 상견례를 한다. 건축주와 협의하는 초기에는 건축주의 희망 사항을 듣는데, 그 때는 설계자라기보다는 철저히 인터뷰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기능적인 요구에서 막연한 이미지까지, 가능한 건축주의 많은 생각을 묻고 들은 후 개개의 바람을 다른 전제 조건과 함께 매개변수로써 설계에 반영한다. 또한 어느 정도 기본 구상안이 정해진 단계에서 건축주와 함께 토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건축주가 품고 있는 이미지와 우리 생각 사이의 거리를 재고 건축주의 바람을 가능한 정확하게 매개변수로 삼기 위해서이다.

복잡함의 수용

건축주의 인터뷰나 매개변수의 풍부화라는 말에서 사용자 맞춤 친절한 설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사용자인 클라이언트의 요구도 매개변수이므로 필연적으로 반영된다. 하지만 우리의 의도는 다른 데 있다. 본 잡지 97년 12월호 편집 후기에서 mt 씨가 말한 ‘친절 설계라는 이름 하에 안이한 타협을 계속하면, 교각살우(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잘못된 점을 고치려다가 그 방법이나 정도가 지나쳐 오히려 일을 그르침)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그리고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가 직접 전해지는’ 것이나 ‘개념을 어떻게 실현해 갈 것인가’를 중시하는 가치관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는 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범위를 압축시킨 조건을 예리한 개념으로, 마치 날이 잘 드는 칼로 단번에 두 동강 내듯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명쾌한 건축을 낳는다. 전후 주택 건축사를 돌아보면 그러한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 기라성 같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만큼 복잡함이 늘어난 현대사회에서 그런 단순 명쾌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취해야 할 길은 복잡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균형을 잃지 않도록 매사를 판단해 가는 것이다. 매개변수를 풍부화하는 것은 복잡한 시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 시대에 어울리는 설계 방법을 모색하는 것과 연결된다. 나아가 한 주택을 둘러싼 상황은 시간과 더불어 점점 변화해 가고 매개변수를 늘리는 것은 곧, 완성된 건물에 건물이 설계된 시대를 짙게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해하기 어려움과 역동주의(dynamism)

우리가 보통 잡지에서 보는 건축은 앞서 말한 mt 씨가 극찬하는 헤르조그 & 드 므롱(Herzog & de Meuron) 스타일에 개념도 명백하고 시선을 끄는 작품이다. 그런데 미칸구미의 주택은, 가령 전시회에 방문한 지인 건축가들로부터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거나 ‘평면이 외관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설계한 주택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눈에 띄는 표현이 없고, 문제를 단순화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풍부함’을 어필하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 비판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그런 의식적인 이해하기 어려움은 자연스럽고 친밀한 존재이다. 한편, 우리 다섯 사람이 설계를 하고 있으면 기본적인 방향성은 공통되어 있지만 다양한 국면에서 개개인의 어긋남이 나타난다. 이 개인차가 디자인을 전개시키는 에너지의 근원 같은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그룹에서 활동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개인차에 의한 어긋남이 설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꽤 구불구불한 과정을 거치면서 전진해 간다. 이러한 예측불가능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하기 어려움이 미칸구미의 설계 역동주의라고 생각한다.

비작가성의 시대의 방법론을 찾아서

과잉 표현을 억제하는 것도, 매개변수를 풍부화하는 것도, 주택에 작가성이라는 자아를 가져가고 싶지 않다는 한 뿌리에서 나온다. 다시 말하면 우리 다섯이 동등 파트너십으로 설계를 하고 있는 것도 개인의 자아의 표출보다는 시야 확장의 가능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현대의 작가성을 표명하는 일에 현실성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세대론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가성을 부정하거나 혹은 중시하지 않는 일군의 건축가가 젊은 세대에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1997년 도쿄에서 개최된 30대 건축가 회의 & 전시(30×100architects 전)에 미칸구미도 참가했지만, 이 전시를 본 어느 윗세대 건축가가 ‘전부 다 같아 보인다’는 감상을 피력했다고 한다. 분명 개성적이라기보다는 동시대적이고자 하는 자세가 적잖이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건축 상황을 비작가성의 시대라 불러야 할지 어떨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두 주택 설계를 통해 우리가 해 온 것은 비작가성 시대의 방법론을 찾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참고>
미칸구미(MIKAN) – 현재는 4인 파트너 (가모 기와코, 소가베 마사시, 다케우치 마사요시, Manuel TARDITS 프랑스 출신), 사무소 이름의 유래는 멤버의 딸이 다니고 있던 보육원 반 이름. 감귤 반